휴전 4년차, 풍차는 전화를 잊은 듯이 굴러가고 화덕은 느긋하게 연기를 내뿜는다. 전국 각지에서 모였던 용사단도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명사수 웨인은 국경 근처의 숲에서 한가로이 사냥을 즐겨야 했지만, 왕국의 서신은 그 평화를 깨트렸다.


[모월 모일 염왕 이그니스의 방문에 격을 맞추고자 그대에게 숙식을 포함하여 이그니스가 다시 자신의 봉토로 돌아갈 때까지 경호해주기를 바라며 호위직을 수여함]


이그니스. 세간에서는 화염 마법에 능한 서큐버스라 알려졌지만, 웨인이 단 한 번 먼 발치에서 마주한 모습에 불길이라고는 없었다. 필시 환각과 술수에 능한 것이라. 그러나 방문객으로 오는 이상, 다시 성으로 돌려보낼 때까지 목숨을 걸고 보호해야 한다. 웨인이 뽑힌 것은 좁은 곳에서도 싸우기 쉬운 총잡이이기 때문이다. 웨인은 서신에 코웃음 한 번 치더니 탄띠를 허리에 몇 겹이고 둘러맨 채로 숲 너머 용암이 흐르는 땅으로 향했다.


유혹할 거리가 없는 염세적인 총잡이. 귀찮은 용사 일행의 재미 없는 사내. 이그니스는 웨인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평화롭게 만나서 반갑다는 둥, 자기는 어디까지나 상호교류를 위해 인간의 문화와 종교를 알고 싶어서 방문했다는 둥 형식적인 미소로 소개했다. 웨인은 그 이면에 병력이나 사기, 민심을 살피려는 계략이 있음을 진작에 눈치챘지만, '종족과 신분을 막론하고 접대의 관습을 어긴 자는 신벌을 받는다'는 불문율 탓에 쓴 웃음만 지었다.


이그니스의 질문은 성가셨지만 대답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따금 걸어오는 매혹도 견딜 만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나 마족이오' 하는 한쌍의 뿔은 웨인을 더욱 귀찮게 했다. 여기저기서 가족의 원수라며 던져대는 돌을 일일이 막아야 했을 뿐 아니라 격투까지 불사해야 했다. 실은 국경선에서 날아든 화살을 요격할 때 이그니스의 옷깃을 한 번 스치기도 했고, 여관은 커녕 마을 입구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 웨인은 빌어먹을 연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이그니스는 웨인의 답과 민심이나 방비를 성실히 기록했다. 서신은 웨인이 잠든 사이에 보내졌으나 명사수의 신경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연회가 무르었지만 웨인은 사치에 관심이 없었다. 화려한 장식이나 무희는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감미로운 선율과 음식은 맞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테이블에 앉아 틀에 박힌 말들이 주고 받았다. 그러나 웨인은 이들의 말 뜻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Q1. 오는 길이 험하지는 않았는가? (=경호원 실력 잘 봤냐?)

A1. 편안하고 즐겁게 올 수 있었다. (=백성들이 지랄맞아서 잘~ 봤다)

Q2. 문화와 종교에 대해 보고 들은 게 많았는가? (=언제쯤 꺼질건데?)

A2. 아직 배울 것이 많지만 일이 바빠 아쉽게 되었다. (=너네 좆같아서 끝나는대로 갈 거임)

Q3. 약소하게나마 선물을 준비했다. (=느그 집은 전쟁 복구 얼마나 했냐?)

A3. 돌아가는 대로 경호 편에 답례를 준비하겠다. (=할만큼 했다)


연회의 마지막은 무도회로, 서로 파트너를 바꾸어가며 추는 춤이었으나, 웨인은 짝을 바꾸지 않을 셈이었다. 그저 무사히 돌려보내고 일상을 되찾을 생각 뿐이었다. 이그니스는 야상곡에 맞추어 우아한 발걸음으로 웨인에게서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일순간 웨인의 머리카락이 쭈뼛 서더니 검보라빛 번개가 이그니스를 향했다. 요행히 웨인이 받아냈으나, 맨몸으로 받아낸 대가로 정신을 잃었다.


연회장의 사람들은 단순한 날벼락으로 생각했고, 왕국은 약품만 처방하는 수준이었으나, 이그니스만이 번개를 쏜 이가 있음을 알았다. 흑마법으로 쏜 번개의 마나는 인간의 몸으로 감당하기 버겁기가 바위산과 같다. 어차피 경호원이 쓰러진 채로 돌아가다간 린치에 당할 것이 뻔한 데다 돌아가 보았자 이미 그녀의 자리도 없을 것이다. 이그니스는 자신의 몸으로 흡수하였다. 덕분에 홀로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는 어려우리라.


마왕의 의도는 이그니스가 모르기에는 너무 뻔했다. 사신 하나 접대하지 못한 죄를 트집잡아 전쟁을 일으키려 했고, 눈여겨 본 인재를 기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렇게 전쟁이 일어난다면 자신의 처지가 난감하다는 것은 세 살 아이도 아는 일이다. 기왕 벌어진 상황을 이용하겠다, 용사 사단에 한 자리 끼기로 했다. 이들에게도 전후 왕국에 우호적인 지도자가 생기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마왕의 첩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고, 은연중에 이를 표출하기도 했다.


웨인이 깨어난 것은 용사단의 마차가 숲을 지났을 때였다. 번개에 맞은 바람에 기억을 모조리 잃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교태를 부리며 달라붙는 서큐버스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만큼은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의 기억은 여정 끝무렵이면 돌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