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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점점 더 무르익었고, 플로라 역시 날이 갈수록 성장해 갔다. 인간 가리지 않고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된 그녀는 이제 글을 읽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책을 볼 정도가 되었다. 여전히 먹는 데 관심은 많았지만, 짧은 팔에 책을 끼고 퇴근하고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모습은 일상이다.


그녀의 신비한 능력에 대해서도 몇 가지 알아낸 게 있는데, 우선 내가 일하는 식당의 주인, 마녀 엘자 씨에 따르면 플로라가 구사하는 마법은 '정령'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한다. 아무래도 기원도, 출신도 다른 만큼 마물이 구사하는 마법은 술식과 원리에 차이가 있는데, 플로라의 경우 효과가 비슷한 트롤의 것과는 달리 대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힘의 기원은 다름아닌 숲 그 자체 같다고 하는데, 주기적으로 정기를 흡수하는 모습이나 식물을 성장시키는 마법을 구사하는 플로라는 확실히 숲과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느낌이 강했다. 기껏해야 먹이의 공급처일 뿐인 평범한 그린웜과 다르게 말이다.


그 외에 특이점으로 달빛을 받으면 힘이 강해지는 것 같다. 요즘은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춥지도 않은지 마당에 나가서 높이 떠오른 달을 구경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몸에서 은은한 녹색의 빛을 뿜어내는 모습이 신비하다. 반딧불이처럼 열은 발생하지 않아 아무리 만져봐도 평상시 체온과 차이가 없었다.


"신(新) 과격파, 교단을 잇는 새로운 골칫거리?"


플로라와 함께 신문을 읽던 내가 대문만한 기사 체목을 중얼거렸다. 마왕과 용사 부부가 주신을 물리치고 남성의 안큐버스화, 인간계의 마계화 문제를 적당히 타협했지만, 둘 사이에 태어난 리림 몇 명과 극단적인 과격파 세력이 이에 반기를 들며 마을과 도시, 숲을 짙은 암흑 마력으로 물들이는 중이라고 한다. 마침 부부는 주신과의 격렬한 싸움에서 소모한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기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


"큰일이네. 여기 사는 평범한 마물들은 얘네를 막을 수 없는데."


본성에 내제된 성욕을 끌어올리는 마왕군의 마법은 거의 모든 마물에게 효과적으로 통했으며, 빠삐용처럼 인간을 먼저 덮치지 않는다는 원칙이 본능에 각인되어 있거나 드래곤 같은 상위종이 겨우 저항할까 말까한 수준이다


"그럼 조만간 여기도 마계로 변하는 거야?"


나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플로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여기서 한참 떨어져 있으니까 그 사이 어떻게든 될 거야."


그린웜답지 않게 덩치가 커지고 지성이 늘어나도 귀여운 점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금처럼 머리를 쓰다듬을 때 더듬이를 위아래로 쫑긋거린다던지, 뭔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던지.


"오빠도 걱정하지 마. 만약 그때가 되면.. 내가 꼭 지켜준다고 약속할게."


그녀는 보기보다 생각이 깊은 마물이다. 돌봄만 받는 처지에 항상 미안해했고, 언젠가 꼭 은혜를 갚겠다고 입버릇처럼 내뱉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노란 눈동자에는 항상 감정이 여실히 비춰져서 눈치채기 쉬웠다.

객관적인 측면에선 확실히 보통 그린웜보다 손이 많이 가긴 했다. 


"항상 그렇게 부담 갖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녀를 데려온 것도, 지금처럼 돌봐주는 것도 결국 내 의지일 뿐, 그 누구도 지금껏 강요하지 않았다. 조금 더 수고스럽더라도, 더 힘들더라도 종령이 다 되어가는 플로라가 무사히 우화한다면 만족하고도 남았다.


"나까지 미안해져서 그래, 이젠 마음의 짐을 내려놔줬으면 좋겠어."


"그래도.. 이제 거의 다 컸는데, 이런 몸으론 집안일도 못 하잖아. 오빠를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살면서 그린웜과 이렇게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게 되다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절초풍할 광경이었다.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아직도 근심이 가득한 플로라를 꼭 안아주었다. 특유의 부드럽고 말캉한 피부와 애벌레답지 않게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왔다.


"내가 좋아서 돌봐주는 거야. 넌 그냥 아무 걱정 없이 잘 자라기만 해줘, 응? 그게 나한테 제일 고마운 일이야."


"알겠어.. 고마워. 무슨 딸한테 말하는 것 같다."


짧은 다리들이 몸을 감싸는 감각이 느껴졌다. 확실히 덩치가 큰 만큼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안아줄 수 있어서 좋았다.


"사랑해. 이 세상에서 제일."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었다. 제법 차가워진 가을 바람이 조심스레 창문을 두드리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으며 순간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가슴이 터질 듯 쿵쾅대는 순간이 오자, 나와 플로라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마주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쪽, 그녀의 입 안은 사탕처럼 달콤한 맛이 났다. 쫑긋 솟아오른 더듬이를 피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우리는 끝없이 얽혀갔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오며 식물들도 변화를 맞이했다. 한때 푸르렀던 잎들은 형형색색을 띠다 짙은 갈색으로 변하고, 싱그러운 초록빛 팔을 자랑했던 나무들은 앙상한 뼈대만 쓸쓸히 남았다. 꾸준히 정기를 흡수하던 플로라도 더 이상 산에 가지 않게 되었다.


또 한 번 탈피를 마친 플로라는 예상했던 대로  2.5m가 넘는 거구로 자라났다. 외형은 별 차이가 없었지만 얼마나 커졌는지 몸을 쫙 펴면 침대에 간신히 맞을 정도였다. 


"오빠. 이거 봐봐."


며칠 전에 먹었던 사과 씨앗을 화분에 심고 물을 준 뒤, 그녀가 전보다 짙어진 녹색으로 빛나는 손을 갖다대자 순식간에 손바닥만한 높이의 어린 나무가 자라났다. 본래라면 두 달쯤 걸쳐 일어날 성장 과정을 건너뛸 만큼 마법이 강해진 것이다.


"와.. 멋진데? 봄 되면 뒷마당에 심어 볼까? 네가 좋아하는 사과도 먹을 수 있겠네."


나는 커튼을 걷어 따스한 아침 햇살을 거실에 불러들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에는 태양만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겨울이 싫진 않아? 네가 좋아하는 식물들이 다 시들어 버리잖아."


플로라는 거대한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조금 섭섭하긴 해. 하지만 볼품없이 시들고 죽은 것처럼 보여도, 풀들은 땅 밑에서, 나무들은 껍질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어. 다들 봄이 찾아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각자의 방식으로 묵묵히 맥동하는 거야.

낙엽과 말라버린 풀은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고, 양분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겠지."


"뭐랄까. 되게 철학적인 말이네. 그래서 밥 먹을 거지?"


탈피하기 열흘쯤 전부터, 그리고 탈피한 이후로 식욕이 늘어나 한참 먹어대던 플로라는 최근 먹는 양이 도로 줄어들었다. 건강상 문제는 확실히 아니었고, 예전처럼 더 먹이려고 해도 입맛이 없다며 거절할 뿐이었다. 보통은 가장 왕성하게 먹어대는 시기에 이러는 모습이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대신 그녀는 서서히 내 정기를 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억지로 덮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꼭 안은 채 탈피한 이후로 이따금 더듬이에서 풍기는 감미로운 향을 맡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불과 이틀 전 우리는 처음으로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고야 말았다.


식사로 얻어야 할 에너지를 정기로 보충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나는 곧 플로라가 종령이 된다는 생각에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하루빨리 두 눈으로 이 신기한 그린웜의 진정한 모습을 확인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