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화





"후...! 후...!"



한적한 숲 속. 대잎이 흩날리는 울창한 숲의 공터. 한 남자가 자세를 잡고 움켜쥔 주먹을 내지르고 있다.



보랏빛 눈에 보랏빛 머리칼. 다부진 근육을 가진 도복 차림의 남자는 완벽한 자세를 잡고 정권을 내질렀다.



한번, 그리고 두번. 일정한 박자로 뻗어지는 그의 주먹을 따라 땀에 흠뻑 젖은 그의 날숨이 새어나온다.



"후...! 후...!"



누렇게 뜬 대잎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우거진 대나무 숲 속, 하염없이 무를 생각하며 내지르는 그의 진중한 표정은 경건함이 느껴지고, 곧게 뻗어나가는 주먹은 유려의 극치로도 보인다.



그렇게 한번, 열번, 백번, 천번, 만번. 남자는 무아의 상태에 다다라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드디어, 소문만 무성하신 분을 만나뵙네요."



"후...! 후...!"



그런 때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



진홍빛의 또렷한 눈망울에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칼, 작은 체구와 쥐의 꼬리를 가진 수인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어보였지만, 남자는 그녀의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는 듯 거듭하여 주먹을 내지른다.



"제 이름은 샤오. 진뢰의 권법가를 만나기 위해 저 멀리 동쪽에서 찾아왔습니다. 부디 한 수..."



"후...! 후...!"



"..."



"후...! 후...!"



"...저기."



"후...! 후...!"



"저기요. 저기요?"



"후...!"



"...저기요!"



"후!"



스스로의 이름을 대고 자세를 잡은 여자, 샤오는 대꾸도 없이 수련에만 몰두중인 남자를 향해 빽 소리를 내질렀고, 남자는 미간을 찡그리며 마지막 주먹을 내질렀다.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내뻗은 자세를 유지중인 남자는 굳게 눈을 감은 채 깊고 깊게 숨을 내쉬었고, 이내 자세를 거두며 샤오를 바라봤다.



"무례가 지나치시네요! 사람의 말을 이렇게나 무시하시면—"



"만 육천번."



"...뭐라구요?"



"조금 더 보태면 이만 번을 채울 수 있었는데."



남자는 흐르는 땀을 앞섶으로 닦아낸 뒤, 아쉬운듯 입맛을 쩝 다시며 샤오를 바라보았다.



"왜 방해했지? 애초에 너는 누구야?"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제 이름은—!"



"...흠. 작군. 4척. 아니. 3척이 좀 넘나...나이는...흠. 14세? 15세? 어찌됐든 작군."



"혼자 뭘 중얼거리고 있는거죠? 그 눈은 또 뭐구요? 설마 제 키가 작다고—!!"



"여기서 곧장 서쪽으로 쭉 걸어가면 마을이 하나 나올거다. 네 걸음이면 사흘이 걸리겠다만, 늑대같은 들짐승은 없으니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될거야."



"...당신.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요?"



"어리숙한 것만 있는게 아니라 머리도 나쁜가 보군.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랴?"



"그게 아니고! 제 결투를—!"



"너같은 꼬마랑 주먹을 섞어서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표현을 하긴 싫지만, 그건 시간의 낭비일듯 싶은데."



"시간...낭비요?"



"그래. 시간낭비. 그렇잖냐. 고작 해야 3척 조금 넘는 너랑 뭘 해봐도—"



퍼엉—!



"같은 무의 길을 걷는 자로써 이름을 대고, 정식으로 대결을 청했는데, 받아주기는 커녕 모욕이나 먹게 될 줄은."



화르륵...!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요."



샤오는 남자를 잡아먹을듯 바라보며 진홍빛의 눈을 빛냈고, 양 주먹을 맞부딫쳐 화염을 일어냈다.



그녀의 팔다리에 털처럼 들러붙은 화염은 그녀가 느끼는 분노의 감정만큼 세차게 이글거리며 대나무 숲에 아지랑이를 만들어내고, 특유의 자세는 넘치는 투쟁심을 표방하듯 자연스럽게 자리한다.



"이 모욕. 당신의 패배로 씻어내겠습니다!"



"...흐음."



퍼엉!



곤란한 듯 침음을 내며 옆얼굴을 긁는 남자를 향해, 샤오는 달려들었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엔 잔상처럼 남은 화염이 폭발하듯 퍼지며 이글거렸고, 훅 불어 사라지는 양초의 불꽃처럼 샤오는 그 작은 체구를 재빠르게 감췄다.



"이것 참."



팍!



"읏...?!"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대잎이 스치며 나는 바람소리 뿐.



다가오는 것도, 멀어지는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 홀로 남은 남자는 곤란한 한숨을 내쉬며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보였고,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불을 두른 샤오의 발차기를 손등으로 유려하게 흘려보내고는, 중심을 잃고 다가오는 샤오의 명치에 손가락 한 마디 되는 간격을 남기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하고싶지 않대도 굳이 이렇게."



콰앙!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만."



"커허억—!?"



몸의 축을 앞으로 기울이며 내뻗은 주먹 한번에 보랏빛의 충격파가 퍼져나가고, 자그마한 샤오는 쐑 하며 대나무 숲의 멀리까지 날아가버리고 만다.





***





쐐애애애액———쾅!



"—으흑!? 케흑...!"


남자의 반격에 기세좋게 날아간 샤오는 바윗돌을 부수며 의도치 않은 비행을 멈추었고, 이내 토해내듯 숨을 내뱉으며 눈을 크게 떴다.



맞은 부위가 명치였던 탓일까. 숨을 들이쉬고 싶어도 들이쉬어지지 않고, 내뱉고 싶어도 마음껏 내뱉어지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었지? 뭘 맞았지? 설마 촌경인가?'



"끅...!"



'말도 안돼. 어떻게 촌경으로 이런?'



당혹이 퍼진 샤오는 몸통을 쓸어만지며 직전의 공격을 되새겼다.



촌경. 상대와 내 주먹 간의 거리를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을 띄워두고 내지르는 발경의 응용기.



해 봐야 자세를 흐트러지게 할 뿐인 기술을 이렇게까지 강하게 때려박힐 것이라고, 샤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기술의 이름이나 위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일격...나는 보지 못했어. 비단 촌경 뿐만이 아니야. 내 발차기를 흘리는 것도 너무 빨라 보이지 않았어. 깨달은 건 맞고 난 직후였으니까.'



샤오는 남자의 강함에 전율하며 자신의 몸을 파묻은 바위를 부수며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전율하는 동시에 의아함을 가졌다.



어떻게 이토록 강한 사람이 이런 외딴 숲에 홀로 있는가. 이런 힘을 가지고서 대체 왜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않은 것인가.



왜 이제야 만난 것인가. 이토록 강한 힘을 가진 권법가를.



전율, 의아, 뒤를 잇는 투쟁심.



샤오는 손가락 마디까지 전해지는 짜릿한 감각에 미소를 띄워보이고, 팔다리의 불꽃을 피워내며 자신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디 계속 얕보고 있으라지. 어차피 이기는 건...."



"오오. 이것 참 대단하군. 거하게 날아가 바윗돌 하나를 부숴먹었는데도 멀쩡하다니."



"읏...?!"



양 주먹을 꽉 쥐고, 팔과 다리의 불길을 거세게 뿜어내며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딘 샤오는 흠칫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느 틈에 온 것인지, 남자는 샤오가 처박혀 부서진 바위를 바라보며 턱을 쓸어만지고 있었고, 빙그레 웃으며 샤오를 바라보았다.



"나름 실력은 되는 걸로 보이긴 하지만...글쎄. 나는 잘 모르겠군."



"그걸 쳐맞고 날아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싸우려 드는 그 모양새가 말이야."



" ...말 했을 텐데요. 당신이 내게 준 모욕은 당신의 패배로써 씻어내겠다고."



"허허. 정신을 못 차렸구만. 글러먹어도 단단히 글러먹은 아가씨구만."



"그러지 말고 그대로 돌아가는게 어때? 서로 시간 낭비 하지말고 말이야."



"...아직도 애 취급을...! 만만히 보는 것도 적당히 하라구요!"



남자는 헤실헤실 웃고, 턱짓을 하며 장난스럽게 충고 섞인 말을 늘어놓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샤오의 신경을 건드린 듯 팔다리의 불꽃을 더욱 강하게 뿜어냈다.



마치 꽃피우듯 뿜어진 불꽃을 바라보던 남자는 씁 하며 입맛을 다셨다.



실력의 차이는 확실하다. 그녀가 무슨 권을 배웠는지는 아직 잘 가늠하지는 못하겠으나, 자신에 비해 너무나도 굼떠 이기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기 나름대로 에두른 표현을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것 참."



빠지직...!



"하는 수 없구만, 하는 수 없어."



콰앙!



진뢰각. 땅을 때려부수는 전뢰의 내려찍기.



촌경을 버텨낸 그녀라면 조금 강하게 때리더라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무론, 기절은 하겠지만.



남자는 그런 생각을 하며 뛰어올랐고, 이내 뒷발꿈치로 샤오의 머리를 향해 자색 번개가 담긴 내려찍기를 날렸다.



...하지만.



"...허!"



화르윽...!



"흥...! 고작 이것 뿐인가요?!"



퍼버엉—!



샤오는 남자의 진뢰각을 불꽃이 둘러진 양 팔로 막아내고, 되려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그를 올려보았다.



남자는 그런 샤오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어보였고, 여전히 자신을 얕보고 있는 것 같아보이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샤오는 코웃음치며 불꽃이 들러붙은 체모를 부풀였다.



곧이어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불의 기류가 퍼져나가고, 불에 몸이 탈 위기를 느낀 남자는 황급히 몸을 빼 사뿐히 착지하며 샤오를 바라보았다.



"나 원 참.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여기 꽤 마음에 드는 장소였는데, 다 태워먹을 작정이야?"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가 참,"



화륵...!



"기대되네요!"



샤오는 진홍빛 눈동자를 더욱 붉게 물들이며 소리치고, 양 주먹을 맞부딪치며 세찬 불길을 만들어낸 뒤 몸에 둘러모았고, 남자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가볍게 달음질을 했다.



그녀는 토끼처럼 가볍게 한번 깡충 뛰어 거리를 좁힌 채 숨을 들이쉬며 자세를 취했고, 이내 눈을 부릅 뜨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음?"


남자는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과의 거리는 자그마치 약 20보. 주먹이 닿을래야 닿을 수 없는 거리. 그런데도 자세를 잡아 내뻗었다. 어째서?



찰나의 순간, 남자는 그것을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또한 찰나의 순간 그 의미를 깨달으며 몸을 흠칫 떨었다.



"...후으으읏!!"



후우우우우...!



"하앗!"



샤오의 주먹은 당연하게도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그렇다. 닿지 않았다. 적어도 주먹만은 그랬다.



"이런...!"



그녀의 온 몸에 휘감긴 불의 기류는 내뻗은 주먹을 토대로 공성추와도 같은 거대한 주먹의 형상이 되어 남자를 향해 날아들었고, 남자는 다급히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며 다가오는 공격을 대비했다.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샤오는 그와 20보는 떨어져 있었지만, 거인의 그것처럼 떠오른 불의 주먹은 그 20보의 차이를 완벽하게 메꾸고, 피할 수 없는 일격이 되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아앙——!



한 송이 거대한 불의 꽃이 남자를 촉매삼아 피어오르고, 뒤를 잇듯 충격파와 함께 지축이 흔들린다.



샤오는 자신이 만들어낸 후폭풍에 눈가를 가리며 승리를 직감했고, 받은 모욕을 씻어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진홍빛의 눈을 반짝였다.



"좋아...! 이겼다! 내가 이겼...!"



"후우—...! 이거 참...!"



승리의 달콤함을 느끼며 타오르는 불의 파도를 바라보고 있던 샤오는 소리치던 것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무던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짜증스러울 정도로 여유를 머금은 표정을 한 채 불길 속에서 걸어나왔다.



남자는 도복을 검게 그슬리고, 팔은 가벼운 화상을 입은 채 입맛을 다셨고, 보랏빛의 눈을 번득이며 샤오를 바라보았다.



"숲에 더해서 내 팔모가지 까지 태울 셈이야? 이건 진짜 아니다."



"어...어떻...!?"



"뭐, 상처가 좀 쓰라리긴 하지만...그래도, 이만하면."



빠지지직...!



"나름 싸워 볼 맛이 있는 상대라는건 충분히 안 것 같아서 좋네."



"...하! 하하하!...그래요?"



당황하던 샤오는 남자의 표정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고, 자신의 팔다리에 다시금 맹렬한 화염을 두르며 자세를 취해보였다.



불을 다루는 수인, 불쥐 샤오와 비슷하게, 남자는 자신의 팔다리에 보랏빛의 전뢰를 두른 채 보랏빛의 눈을 빛내보였고, 



드디어 자신을 인정한 듯 무인의 태도를 보인 샤오는 자신의 모든 불꽃을 태워내기라도 하겠다는듯 전력을 다해 남자를 향해 뛰쳐나갔다.



"하아아아아아————!!!"



"으랴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앙——!!



두 권법가의 포효가 잔불을 머금은 대나무 숲을 울리고, 번개와 불을 담은 주먹이 맞부딪쳤다.



곧이어 거센 빛줄기가 둘의 주먹에서부터 퍼져나가고, 붉은 불과 보랏빛 번개는 뒤엉킨 채 번득이고 불타올랐다.



모든 숲을 태우고, 하늘까지 닿을 기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