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림표--





적막만이 감도는 방 안에서 들리는것은 오직 빗소리 뿐이었다.


조용하지만, 차분하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빗소리와, 속으로는 부끄러워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는 두사람이 같은 침대에 누워 얼굴만을 붉히고 있다.


그저 서로에게 끌림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고, 두사람 모두 레티에라에 가게 되면 거기서 헤어지게 될지도 모를 사이라고 생각했다.


지혜로운 학자의 삶을 살아가는 카트리오나와, 제대로 배움을 받은 적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뜨기인 병사'로 전장에 나가 몇년을 살아온 니콜라이.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맞물릴 일이 없을 두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은, 알 수 없는 운명적인 끌림에 자꾸만 서로를 맞춰가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니콜라이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카트리오나."


"................"


카트리오나는 부끄러움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봐."


"............응."


니콜라이는 부끄러움을 애써 참아가며 말했다.


"......어제...혹시 내가 너를 덮치거나 하지는 않았지....?"


니콜라이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질문.


'........혹시, 마안때문에 기억을 못하나?'


자신이 니콜라이에게 했었던 그 부끄러운 일들과, 강압적인 명령들을 품에 안겨있는 이 남자의 의외의 반응에 카트리오나는 놀랐다.


".....혹시, 기억 안나?"


"....................."


'좆됐다.'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눈치를 보는 카트리오나의 반응. 이건 무언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네가 '마안'을 쓴것까지는 기억이 나. 근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전혀 없어."


니콜라이는 한숨을 쉬고, 솔직하게 자신이 기억하는 한도 내의 모든 진실을 말했다.


"......그래?"


"........어."


"...........흐음."


오묘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뭐지?"


니콜라이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그녀를 바라봤다.


"............."


카트리오나는 고개를 돌리며 날개로 얼굴을 가렸다.


'.....이거면 됐어. 이거면....내 추태를 모르는 이 상황이면 충분해.'


카트리오나는 눈을 질끈 감고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카트리오나?"


"......................"


그녀의 그 한결같은 침묵에, 니콜라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절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여자에게 강제로 손을 내미는 짓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


불타버린 자신의 고향에서, 누이와 어머니가 강간당하고 죽어버린 그 날.


마을에는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은 형들과 아버지들이 무기를 들고 나가 싸웠던 그날, 또래 친구들과 함께 대피소에 숨어있었던 니콜라이는, 마을을 습격했던 용병들이 차례차례로 여자들을 끌고나가서 강간하고, 친구들의 목을 베어버리던 3년 전의 그날이 니콜라이의 뇌리를 스쳤다.


숨어있던 대피소에서 강제로 끌려나오던 순간, 『검은 롱소드를 휘두르던 이름모를 기사』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분명 죽을 운명이었을 것이리라.


그 일로 인해 니콜라이는 가족도, 돌아갈 고향도 잃어버렸다. 그런 그의 마음 속에는 오갈데 없는 슬픔과 분노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날, 두가지 맹세를 했었다.


첫번째는 - 나는 절대로 여자에게 강제로 손을 들이밀지 않겠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두번째는 - 이 아트리아에 존재하는 수많은 용병집단, 그 짐승의 탈을 쓴 괴물놈들의 목을 모조리 떨궈버릴것이다.


니콜라이의 마음 속에는, 이 두가지의 맹세를, 바위에 새기듯이 박아넣었다.


이윽고 주변 영지에 주둔했었던 민병대가 마을에 왔고, 그 길로 니콜라이는 병사로써의 삶을 시작했었다.


-


니콜라이는 바로 바닥으로 내려와, 그녀에게 머리를 박고 사죄했다.


"정말 미안하다! 비록 마안을 썼다고 한들, 너를 인사불성으로 만든건 나였고, 너를 겁탈한것도 사실이야!"


카트리오나는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일으켰다.


"....뭐?! 무슨...."


"....너에게 호감이 없었던것은 아니야. 하지만, 레티에라로 가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헤어질 관계이니 먼저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자신의 마음에 죄의식과 자기혐오가 휩싸여오는것을 느꼈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손이 차가워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의 의중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너의 몸을 마음대로 탐해버렸어! 그리고 모른 체 하며 너에게 물어보기까지도 했지! 정말 미안하다!"


비록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반응에서 자신의 죄를 확실하고 있는 니콜라이.


카트리오나는 그 터무니없는 착각에 사로잡힌 니콜라이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어?"


"이 죄는 굉장히 무겁다는것을 안다. 그러니, 이 몸으로 책임을 지겠다! 그러니, 부디....부디 나를 용서해다오! 하라는건 뭐든 하겠어!"


그 떨리는 목소리에선, 절망감과 절박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카트리오나는 이 상황에 머리가 따라오질 못했다.


제아무리 숲의 현자라도, 이런 상황에는 전혀 면역이 없었던 탓이리라.


"............????????"


그저 당혹감을 드러내며 침묵하는 카트리오나. 그리고 머리를 박고 했던 그 진심의 사죄에 침묵으로 답해준 그녀의 모습에 니콜라이는 더더욱 절망했다.


".....받아주지 않는것도 이해해. 너도 너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록 내 의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내 멋대로 일을 저질러버렸으니까."


".....아, 아니...잠ㄲ"


".....차리리 나를 노예로 삼아도 된다! 그런 걸로 책임을 질수만 있다면, 뭐든 해주겠어! 어차피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눈물마저 흘리는 니콜라이.


"어어어어....."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카트리오나.


'.....일났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수정해줄 필요를 마음으로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리는 그렇지 못했다.


만약 여기서 그가 했던 이 오해를 전부 수습하게 된다면, 자신은 술에 몸을 맡기고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자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고 눕힌 상스러운 여자가 되버린다.


그렇게 생각하자 니콜라이의 경멸하는 상황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그려졌고, 카트리오나는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카트리오나는 지금 여기서 다물고만 있는다면 자신이 했었던 일은 모조리 없던 일이 되는것을 충분히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물쩍 넘겨버리게 된다면, 그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내버리고 만다. 사려깊은 카트리오나는 절대 그런 상황을 원치않는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두가지의 선택을 두고 악마의 날개를 단 자신과, 천사의 날개를 단 자신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


또다시, 정적이 방 안을 감돌았다. 바람이 불어오며 쏟아지는 빗방울이 깨진 창문을 타고 들어오며 엎드린 니콜라이의 등을 적셨다.


근육질의 등근육에는 크고 작은 전투의 흔적들이 잔뜩 남아있었다. 찔린 상처와 베인 상처, 그리고 조금씩 그을려진듯한 화상자국까지. 팔다리가 온전히 붙어있는것이 행운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 역전의 용사와도 같은 남자가,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초라하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의 머릿속의 천사가 악마에게 광선을 날려 소멸시키는 모습이 그려졌다.


결국, 그녀의 마음이 그런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것이다.


카트리오나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


니콜라이는 그녀의 말에 움찔하며, 고개를 올렸다.


아직까지도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카트리오나.


".....니콜라이?"


"........어....아..아니.....예, 주인님!"


"어느 틈에 노예가 된거니, 너는...."


"하...하지만..."


"그런 말투 집어 치워. 노예니 뭐니, 나는 그런거 싫거든?"


"그....그럼..."


"됐고, 일단 일어나서 여기 앉기나 해봐."


카트리오나는 자신의 옆자리를 날개로 팡팡 치며 말했다.


니콜라이는 우물쭈물거리며 일어나, 그녀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한뼘정도의 간격을 유지한 채로.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그럴수는 없어."


"아니 그니까..."


"나를 변호하지 않아도 돼. 죄는 죄일 뿐이야. 나는 죄인이야."


"...................."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이 고집불통에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카트리오나는 마저 입을 열었다.


".....뭐, 됐어.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니까."


카트리오나는 금빛의 시선을 그에게 향했다.


"너는 지금, 엄청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있어. 나에게도, 너 자신에게도."


"........어?"


".....그.....그러니까....."


카트리오나는 얼굴을 붉히며 부들부들 떨었다.


"......너...너는 잘못이 없다고!"


"......그럴리가 없어! 나는 너를..."


"일단 다물고 내 얘기부터 들어봐! 알았니?!"


그녀가 흥분하며 눈을 빛냈다.


".........응...."


니콜라이의 눈이 멍해졌다.


"그러니까.....얘기를 하자면...."


카트리오나는 순간 멈칫하며 니콜라이를 바라봤다.


"......................"


"아."


마안의 힘에, 그의 눈에 생기가 사라지고, 마치 최면에 걸린듯이 멍해져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아아.........."


전날 밤처럼, 그의 의식은 카트리오나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흥분해서 마안의 힘을 너무 써버린 탓이었다.


그냥 말만 들을수 있도록 몸을 경직시키고 싶을 뿐이었는데.


이 부끄러운 상황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어제와 같은 실수를 저질러 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술에 취한것도 아닌, 맨정신으로.


".........하아아아...."


카트리오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말했다.


"...지금 너는 좀 피곤한것 같으니까, 좀 더 자둬. 마안의 힘이 풀릴때까지 말야. 알았니?"


"........응....잘게."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는, 천천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쓰고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니콜라이는 이내 잠들어버렸다.


".....하아아아...."


잠들어버린 니콜라이를 보며 카트리오나는 간절히 빌었다.


제발 그가, 이걸로 일어나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기를.


카트리오나는, 살아 생전 처음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정오의 아트리아.


카트리오나는 몸을 추스리고 마법으로 로브를 만들어 입고는, 자고있는 그를 놔두고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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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