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많은 이야기에서 용사들은 범해진다. 무려 대놓고 '범해지는 용사'라는 전설조차 있을 정도지.

레벨 1짜리 슬라임의 정액 디스펜서, 데몬의 노예계약 상대, 드래곤의 종복,

여우의 새신랑, 그 외 각종 마물들의 한 끼 식사 등.

이런 표현들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면 일리아스님께 물어보자.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범해질 염려가 없는 용사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어떤 마물의 유혹에도 걸려들 일이 없고,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으며,

몸과 마음 속에는 오직 분노와 적의, 독기, 살기만이 들어찬 최강의 용사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 이야기의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인간계와 마계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마도력 13기의 문헌을 찾아보았다.

당시 인간계의 황제도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주신에게 신탁을 구했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용사를 만들 수 있는지를 물었다.


"용사의 몸과 마음에서 마물을 도륙내기 위한 역할을 하지 않는 모든 것을 도려내 없애도록 하라. 어설픈 무기로는 그 몸을 범접하지 못하도록 근육과 뼈는 지옥 변경의 용광로에서 담금질해 강인하게 만들고, 피부는 사악한 용의 비늘과 뼈를 갈아 넣어 드래곤 스케일 아머를 내장시키고, 심장과 뇌는 정자와 난자를 뽑아낸 혈육과 구족의 피와 살로 절여 동정심과 사랑, 공포가 들어갈 여지를 모조리 막을 지어다."


황제는 신탁을 충실히 따랐어. 가장 강인한 남성과 여성 전사를 차출해 정자와 난자를 뽑고, 인큐베이터에서 육신을 만들기 시작했지.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기 시작할 때 용사에게는 검술과 파괴마법이 주입되었고, 뼈와 피부, 근육은 분리되어 재처리된 다음 다시 조립되었어. 그게 태어나기 직전에 자신의 부모와 구족은 모조리 살해당했고, 눈을 뜨고 세상을 눈에 담기 직전에 모든 것을 죽이겠다는 몰살의 각인을 심장과 뇌에 새기게 되었지.


용사의 실체와 키워낸 방법이 인간 세계에 알려지면 세상이 발칵 뒤집힐 게 분명했고, 그 용사가 인간을 상대로 칼을 겨누는 날에는 어떤 끔찍한 일이 발생할 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그 용사가 인큐베이터를 깨부수고 태어나게 되는 때, 인큐베이터를 통째로 마계의 심부에 보내버렸어.


용사는 이전 역사에 기록되어 있던 어떠한 용사보다도 용맹했어. 1레벨 슬라임이나 임프 3자매에게 농락당해 여정을 끝내버리는 방심쟁이도 아니었고, 자신보다 5배는 큰 덩치의 기간테스를 상대로 겁먹지도 않았으며, 인간의 몸으로 들어갔다가는 온몸이 삭아 없어져버릴 정도의 독기의 늪조차 에너지를 충당하는 보급고가 되었어. 눈에 보이는 마물이란 마물은 대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린 용사는 마왕성에서 마왕과 마주하게 되었지. 당시의 마왕은 아마 타락천사 르수펠하임이었을 거야.


"그대는 내가 알고 있는 용사들 중에서도 가장 용감하고, 강인하고, 아니...... 무언가 크게 잘못됐구나."

"......"


용사는 말을 할 줄 몰랐어. 그런 건 마물을 죽일 때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르수펠하임은 고위 천사였기 때문에 용사를 어떻게 만들었는 지 그의 기억을 통해 더듬어 나갔고, 그것만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어.


"이것 참, 곤란하게 됐네. 인간 놈들은 자기가 최강의 용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목적지를 잃은 폭력이 어디로 향하게 될 지, 제대로 생각하고 나서 만든 걸까?"

"......"


어떤 말을 해도 용사가 대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르수펠하임은 그를 쓰러뜨리는 데 집중하려고 했지. 그 순간......


'푸솩!'


마왕조차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빠르게, 파괴마법이 담긴 마검이 르수펠하임을 꿰뚫었어. 마왕은 그 자리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마검의 먹이가 되어 분쇄육처럼 바스라졌어. 그리고 마왕이 쓰러지자, 용사의 몸을 이루는 조직들이 붕괴되기 시작했지. 황제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더 이상 살아 숨쉬어 봐야 이 세상에 해악만을 끼칠 게 분명하니까, 목적을 이룬 다음에는 가차없이 버리려고 미리 준비해뒀던 거야.


하지만 용사의 몸은 무너지기를 멈추고, 원래대로 재생하면서 마왕의 힘을 흡수하여 이전보다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어. 그는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의 심장에 박혀 있는 '생존본능', 마물을 쓰러뜨리기 위해 필요하였기에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둔 그것을 기반으로 세포 사멸 마법을 깨버렸지.


그리고 증오의 칼날은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토사구팽하려고 한 인간계를 향했지. 이미 초토화된 마계만이 아니라, 인간계까지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갔어. 저항하든, 저항하지 않든, 그의 앞에 있던 인간들은 모조리 시체가 되어버렸고, 마지막으로 황제까지 칼날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어. 불행 중 다행으로 그에게 신계를 넘어설 정도의 권능은 없었기에, 모든 생명을 파멸시킨 후 마검을 자신의 몸에 꽂고 신체 기능이 정지되는 순간까지 그의 영혼, 아니 그렇게 부를 수 있을까조차 의심스러운 무언가는 붉게 끓어넘치는 분노의 도가니였지.


잠시 술에 취해 꽐라가 되어 한숨 자고 났더니 주신은 개판이 나버린 하계를 보고 아연실색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게 되었지만, 너무 늦어버렸지. 0에서부터 새로 생명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일은 참으로 피곤하고 성가신 일이었어. 13기를 통째로 날려먹은 주신은 천천히 인간계와 마계를 재건하며 마도력 14기를 시작했어.


그리하여 주신이든 왕이든 용사를 키우게 될 때, 그 당시에 데인 게 워낙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에

범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임을 포기하고 살륙만을 생각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용사는 만들지 않기로 했지.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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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용사와 유마 이야기'는 최근에 일이 너무 빡세서 못 쓰고 있다가 간만에 주말에 좀 쓰고 있다......

이거는 숨돌릴 겸 그냥 짤막하게 써봤어.

그러니까 결론은 용사들이 범해지더라도 너무 한심하게 보지 말자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