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관파에 밀려 점점 입지가 좁아지던 구관파 관리들은 새로 즉위한 함풍제마저 자신들을 탄압하고 내쫓자 마지막 발악으로 역모를 꾀했다.
이는 영록대부(永綠大夫)였던 구관파 관리 이장선(李長善)이 주도해 이장선의 난 이라 불리는데,
이장선과 구관파 관리들은 하북성(河北省)의 서북방어사였던 길림(蛣淋)을 꼬드겨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후 사병을 몰래 모아 집결한 후,
격문을 읽고 장가구(張家口)에서 병사 2만여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또한 지방의 또다른 구관파 세력들도 일부 합세하여 감숙성,요녕성,하남성 등지에서 소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함풍제는 증국번을 대장군에 재차 임명하고 반란군을 토벌토록 한다.
첫 전투는 북경 중심에서 벌어졌는데, 이장선의 반란군 선봉대 8000명과 증국번의 팔기군 3000명이 5시간 가량 북경 시내에서 접전을 벌인 결과
반란군은 1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다.
한편, 길림은 또다른 속셈이 있어 자기 군사 1만여명을 데리고 태원(太原)으로 향했는데, 도중 산서성 총독 기문사(基文師)의 진압군 1만 5천여명과 만나 전투를 벌이나, 이를 격파하고 태원에 입성한다.

이장선은 길림이 협조하지 않고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것을 깨닫자 길림의 지원을 포기하고 나머지 반란군 잔당세력 1만여명과 함께 북경을 향해 재차 진격하나 또다시 증원을 받은 증국번의 진압군 3만여명에게 대패하여 병력의 대부분을 잃자, 이장선은 자결하고 나머지 잔당들은 투항했다.

길림은 태원에 주둔하며 인근 석가장(石家莊)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스스로 태황(太皇)이라 칭하고는 위(衛)나라를 건국했다.
그러나 관군 10만여명이 석가장을 함락시키고 태원도 포위하자 도주하나 결국 관군에게 붙잡혀 능지처참 당한다.

한편 지방의 소규모 반란군들은 대부분 1주일 안에 지방군에게 진압되었으며,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길림마저 처형당하자 함풍제는 난을 진압했음을 선포한다.

또한 증국번,기문사,이홍장 등의 공을 치하하며 각각 벼슬을 2품씩 올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