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신가, 하북사정주이다.


분명히 지난 시간에 고람전을 올리면서 하북사정주에 관한 잡설을 모두 끝냈다.


그러면 왜 뜬금없이 돌아왔느냐? 


원소 휘하의 맹장은 하북사정주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조조한테 진 루저라서 그런지 삼국지 게임을 보면 원소 휘하의 장수들은 대부분 능력치가 한심하다. 앞서 소개한 하북사정주들을 빼면 진짜 써먹을 놈이 없는 수준. 덕분에 원소로 플레이할 때마다 조조 이기는 게 넘모 힘들다 ㅂㄷㅂㄷ 


솔직히 옛날부터 이런 졸렬한 능력치 배분이 불만이었다. 정사 기록대로라면 충분히 쓸 만한 장수인데도 대폭 너프를 먹은 인간이 너무 많기 때문. 


그래서 오늘은 그 저평가된 맹장 중 한 명인 순우경을 다뤄보고자 돌아왔다.






순우경(淳于瓊)


후한 말 군벌인 원소 휘하의 장수로, 예주 영천군 출신이며 자는 중간(仲簡). 


참고로 순 씨가 아니라 순우 씨다. 황보, 공손, 제갈 등과 비슷한 복성이라 보면 되겠다.


솔직히 '순우경'하면 삼국지를 좀 아는 사람들은 대개 코웃음을 친다. 막사에서 술 먹고 흥청망청 놀다가 오소를 태워먹은 졸장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한심한 놈이 맹장이라니, 지금 농담하냐 싶겠지.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일단 정사의 순우경을 세세히 살펴보자. 생각 외로 배경이 빵빵한 녀석이다.


본격적으로 삼국지가 시작되기 이전인 188년, 십상시와 더불어 띵가띵가 놀던 영제가 자신의 직속 부대인 서원군을 창설한다. 그 지휘관으로 여덟 교위가 임명되는데, 이를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라고 부른다.


그리고 순우경은 조조, 원소와 함께 이 서원팔교위의 일원으로 임명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름 둘과 동렬이었던 셈.


정확히 언제부터 원소 막하로 들어갔는지는 불명이지만, 대체로는 동탁이 집권해 실각한 원소가 하북으로 도주할 때 그를 따랐으리라 추정한다.


이후 동탁이 사망하고 이각과 곽사의 행패로 헌제가 위태로워지자, 헌제를 모시느냐 마느냐를 두고 원소 진영에서 찬반이 치열하게 갈리는데 순우경은 곽도 등과 더불어 반대파에 속했다. 결국 원소는 이들의 손을 들어 협천자를 거부하는데, 이미 원소 진영 내에서 순우경의 입지가 꽤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도대전 이전의 군공은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이런 점을 보면 공손찬과의 싸움에서 순우경도 나름대로 크게 활약했던 것 같다. 일단 우수한 성과를 냈으니 입지를 다진 것 아니겠는가?


하여튼 공손찬을 정리한 원소는 평소 눈엣가시였던 조조를 없애기 위해 본격적으로 남진을 시행, 이른바 관도대전의 막이 오른다.


관도대전 직전, 원소의 모사 곽도감군 직책을 맡고 있던 저수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하다고 비방하며 권력 분할을 요구했는데, 이를 수긍한 원소가 감군 직을 폐하고 이를 삼군도독으로 나누어 저수, 곽도, 순우경에게 배분한다.


이것만 봐도 당시 원소 진영 내에서 순우경은 굉장히 신뢰받는 장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소의 부하였던 허유가 탈주해 1급 기밀인 군량 창고의 위치를 조조한테 불면서 일이 대차게 꼬인다.


군량은 곧 군대의 생명줄. 배고픈 군인은 싸우지 못하는 게 동서고금의 진리다. 때문에 대부분의 군대는 군량 창고를 철통처럼 방비하기 마련인데, 이때 원소군의 군량 창고는 오소라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오소의 수비를 책임지던 지휘관이 바로 순우경이었다.


허유를 통해 오소의 존재를 알아챈 조조의 결사대가 오소를 급습하자 순우경은 휘하의 부장인 목원진, 한거자, 여위황, 조예 등을 거느리고 필사적으로 이들을 막아섰다(이름들만 보면 이쪽도 간지가 만만치 않다).



만약 원소가 정예군을 편성해 오소를 급습한 조조군을 공격했다면 역으로 이들을 쌈싸먹을 수도 있었다. 오소를 공격한 조조군의 숫자가 의외로 많지는 않았기 때문.


하지만 원소는 정반대의 결단을 내려 장합과 고람에게 정예군을 이끌고 조조 본영을 공격하도록 하고, 장기에게 경기병대을 인솔해 오소를 지원하도록 하는데


조조를 빠르게 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순우경이 충분히 버틸 것이라는 믿음이 뒷받침된 결과로 보인다. 사실 삼군도독을 맡을 정도의 장수였으니, 꼭 잘못된 믿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조조군의 결의를 과소평가했다는 것.


당시 결사대의 기세는 조조가 직접 참전해 전방에서 칼을 휘두를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군량 창고의 파괴였으므로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을 지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반면 순우경의 방어군은 군량을 지키면서 동시에 방어전을 수행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강풍마저 불어 화염이 급속히 번지니, 적군과 창고를 동시에 신경써야 했던 오소군은 그대로 붕괴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장기의 경기병대가 도착하기 전에 오소군이 먼저 GG를 치면서 오소 전투가 끝나고 만다.


 


조만전의 기록에 따르면, 조조는 순우경 휘하의 모든 장수들을 참했으나 순우경은 코만 자르고 죽이지 않았다.


이후 그는 순우경과 독대하면서 은근히 자기 부하가 되라고 꼬드겼으나, 순우경은 "승패는 하늘이 정한 것"이라고만 대꾸하며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내심 순우경의 능력이 아쉬웠는지 조조는 그를 죽이길 주저했는데, 이때 허유가 "순우경은 코가 잘린 원한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를 건넸고, 결국 조조는 어쩔 수 없이 순우경의 처형을 결정했다고 한다.


확실히 조조가 탐낼 정도의 인재였다면 순우경의 능력 자체는 굉장히 특출났던 모양이다. 


하지만 달리 조명하면 순우경을 등용하고 싶다면서 코를 잘라버린 조조의 괴팍한 품성이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니 ㅋㅋㅋ 부하로 삼고 싶다면서 코는 왜 자르냐고 ㅋㅋㅋ



정사에서는 이렇게 나름 대접받는 장수인 반면, 연의의 순우경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지랄맞아 만취한 상태로 오소의 방비를 게을리 했으며


결국 조조군한테 뚜까맞고 코와 귀가 잘린 채로 원소에게 돌려보내졌고, 이에 딥빡한 원소가 순우경의 목을 날려버린다.


장합도 그렇고, 이쯤 되면 나관중 씨의 머리 속을 좀 엿보고 싶다. 정사에서 대단하게 나온 무장들을 왜 자꾸 C급 졸장으로 바꾸시는지;;


덕분에 게임할 때마다 원소군은 쓸 만한 무장이 없다고!



여하간 이것으로 순우경전을 마치겠다.


어릴 적 처음 삼국지를 읽을 때만 해도 순우경은 그냥 한심한 잡장 1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그의 진가를 확인했을 때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순우경 정도면 오히려 연의에서 더 띄워줘도 괜찮을 인물이건만.


개인적으로는 고람보다 순우경 쪽이 더 하북사정주에 어울리지 않나 싶다. 정사에 달랑 한 줄 나온 고람과는 달리, 이쪽은 황제 직속군 지휘관에 전군을 통솔하는 도독까지 했던 장수가 아닌가? 게다가 조조가 친히 영입 제의까지 한 인물이거늘.


엉망인 글 읽어줘서 고맙고, 다음에는 고간전으로 돌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