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하고 딱딱한 돌바닥이 시렵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발목을 묶고 있는 구속구가 내는 쇳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한다.

입에서는 뿌연 입김이 올라오고, 피부 위에는 차게 식은 피가 검붉은 색으로 굳어있다.


"후우..."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왕을 토벌한 용사 일행이 갑자기 내 영지에 쳐들어 와서는, 가문의 사병들을 제압하고, 나를 이런 곳에 구금할 줄이야...


확실한 건 아니지만, 내가 왜 감금 되었는지 짐작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의문인 점은 왜 용사가, 인류의 영웅이나 다름없는 용사가 직접 나를 감금한 것일까. 그리고 더욱이 의문스러운 건, 날 감시하는 병사같은 것도 없고,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무려...


그리고 그 순간,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저벅저벅 하는 발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다. 내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 그리고... 나를 이곳에 가둔 사람. 

...용사, 세이라 아리스테아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을 내게 보내며, 말없이 음식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작은 빵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수프, 죄인의 식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호화로운, 내가 이곳에 갇힌 이후 계속해서 먹어온 식단이다.


"저녁이에요."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감옥에 울려퍼진다. 그리고 그녀의 입이 열리는 건 이게 끝이었다. 식사를 가져올 때마다 아침, 점심, 저녁이라고만 얘기할 뿐,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녀가 음식을 들고 들어올 때마다 그녀에게 질문도 해보고, 소리도 질러보고, 사정도 해봤지만 그녀는 그저 의자에 앉아 묵묵부답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저 내가 음식을 전부 먹을 때까지 지긋이 나를 바라보다, 음식을 다 먹으면 식기를 들고 나갈 뿐, 내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빵을 수프에 적셔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예쁘긴 정말 예쁘군.'


음식을 가져다 주면서 계속 봐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미모는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고, 피부는 전장에서 활약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백옥같이 고왔다. 입술은 코스모스잎 같이 분홍빛으로 귀엽게 물들어 있었으며, 코는 오똑했다.

그녀의 옷차림은 화려하지 않은, 오히려 용사의 옷차림이라기에는 이질감이 들 정도로 수수한 평민계층이나 입을 법한 옷차림이었으나, 그럼에도 아름답게 굴곡진 그녀의 몸매와 터질 듯이 커다란 흉부를 감추지는 못했다.


다만 그녀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조금 이질적이었다. 분명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는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값비싼 장신구의 일부분을 싸구려 보석으로 떼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후르릅..."


수프까지 전부 먹고 난 뒤, 나는 숟가락을 접시 위에 올렸다. 얼마 전만 해도 왜 나를 감금한 것이냐 그녀에게 따졌었지만, 계속해서 묵묵부답인 그녀에게 나도 지친 것일까, 이제는 나도 그녀처럼 입을 열지 않고 그녀가 식기를 가지고 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식기를 치우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식사를 끝맞추었음에도 움직이지 않고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왜, 왜 그러는 겁니까? 혹시 드디어 이야기 해줄 마음이 든 겁니까?"


그러자 그녀는 작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몸짓에 '갑자기 왜?'라는 의문이 순간 들었지만, 내가 구금된 이유와 가문 사람들의 안부, 그리고 잘 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그 의문을 밀어냈다.


"왜 저를 감금한거죠?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저질렀..."


"반역 모의"


마치 사형선고와 같이 서늘하게 내뱉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기대감에 입꼬리가 올라간 얼굴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네?"


"카일 그레트헴 백작님, 당신을 비롯한 몇몇 귀족들이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는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순간 뜨거웠던 피가 차게 식어가는 느낌이다. 어떻게 안 거지? 분명 계획은 믿을 만한 자들 위주로 철저하게...


"아니야!! 그건 음해..."


"메이나스 백작님께서 고발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들같은 자들을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한 것일 뿐, 황제 폐하의 충신이십니다. 증거품또한 모아놓으셨기에 빠르게 죄인들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메이나스 백작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메이나스 백작이 그럴 리가! 그는...!


당황하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는 조금 씁쓸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당황하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설마 메이나스 백작님이 마족과의 화평 정책을 추진하는 황제 폐하의 편을 들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셨겠죠. 메이나스 백작님은 마족의 손에 가족들을 잃으셨으니까요. 당신처럼요."


그녀의 말에 순간 눈이 부릅 떠진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하지만 메이나스 백작님은 당신과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화평을 추진하고자 하는 대상은 마왕의 편에 서서 인류를 침공한 마족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왕에게 반기를 들어 인류와 힘을 합쳐 싸운 자들 입니다. 메이나스 백작님은 그들은 원한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닥쳐!!!"


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 소리질렀다.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인류의 영웅인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당신은 용사잖아! 신의 축복을 받아 인류를 위해 싸우고 마족들을 전부 도륙내는 용사!!!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마족과의 화평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야? 마족, 그 간악한 것들이 정말 인간과 공존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천만에! 그것들은 분명 뒤에서 칼을 갈고 있을거야! 그것들을 받아들이면 인류는 분명 또 위기에 빠질 거라고! 왜 용사면서 그런 것도 모르는 거야!?"


분노에 찬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부어진다. 한 번 터진 댐은 담아두었던 모든 것들을 동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속사포처럼 속에 있는 감정을 쏟아낸 나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용사를 노려보았다. 용사는 내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윽고 눈을 천천히 뜨더니, 이윽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렇군요. 그게 당신의 본심인 건가요."


"...뭐?"


그녀의 영문을 모르겠는 말에 의문을 표했지만, 그녀는 내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무시하고는 말했다.


"그레트헴 백작님, 당신이 왜 이곳에 갇힌 건지 아시겠습니까?"


"방금 역모 모의 혐의라고..."


"그 이유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역모를 모의한 다른 귀족들은 전부 수도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수도가 아닙니다. 오직 당신만이 이곳에 갇힌 겁니다. 왜 당신이 이곳에 갇힌 건지 아시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분노에 가려져 있던 의문이 재차 떠오름을 느꼈다. 그래, 역모에 가담한 죄목으로 구금 했다기에는 이상한 점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건 바로 내 눈 앞의 용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사와 내가 단둘이 마주보고 있는 이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지?"


나의 의문에 용사, 그녀는 이질적인 푸른 눈동자를 나에게 가까이하며 대답했다.


"단순합니다. 당신이 여기 갇힌 이유는 역모 모의뿐만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제 개인적인 이유이죠."


"개인적인... 이유라고?"


그녀의 대답에 나는 멍청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이유라니, 나는 용사가 나를 감금하기 전까지 용사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나를 감금한 이유가 개인적인 이유라고?


"그게 무슨..."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제가 누구인 것 같습니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더더욱 황당했다. 갑자기 자기가 누구냐니?

나는 황당한 그녀의 질문에 멍하니 그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읊조렸다.


"용사..."


"아뇨, 그런 의미로 한 질문이 아닙니다. 질문을 조금 고쳐야 할 것 같군요.

 제 현재의 이름은 세이라 아리스테아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을 갖기 전에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녀는 내 대답을 독촉하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용사가 아리스테아가의 양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원래 이름이 세이라가 아니었다는 것은 알지도 못했다. 그런 내가 어떻게 그녀의 원래 이름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묵묵부답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하아... 정말, 정말 기억이 안 나시나 보군요.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면... 힌트를 드리도록 하죠. 이 모습을 보시고도 정말 기억이 나지 않을 지 확인해봅시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눈은 경악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가루가 날리듯 흩어지며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붉은 색의 눈동자만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마치 뱀처럼 세로로 길게 늘여진 동공을 가진 붉은 눈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의 머리와 어깨,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 뒤에서 검은 연기같은 것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더니, 이윽고 검은색 뿔과 날개, 꼬리로 형태를 갖추었다.

그녀의 모습은 빼도 박도 못할... 마족이었다.



***



카일 그레트헴, 그는 멍하니 용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상황파악이 완전히 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게 제 진정한 모습입니다."


"마... 족...?"


"정확히 말하면 하프입니다. 어머니 쪽이 마족이셨거든요. 서큐버스라는 종족이셨죠."


"말도 안... 용사가 마족...? 아니... 아니야 설마 그런..."


그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인류를 마족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낸 존재가 사실은 마족이었다는 사실은, 지독하게도 마족을 혐오하는 그에게 있어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당황하던 그는 잠시 후 눈을 부라리고는 용사를 노려보며 외쳤다.


"그, 그래! 넌 용사가 아니야! 이 간악한 마족 녀석! 용사로 변장하다니." 


"아뇨. 전 용사가 맞습니다."


"닥쳐! 네 년이 감히 용사를 사칭해!? 그렇지. 황제 폐하께서 그런 정책을 내린 것도 네 년이 폐하를 홀린 거지? 이제야 앞뒤가 맞는 군. 그렇지, 폐하께서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정책을 내리셨을리 없으니. 다 네 년이 꾸민 짓이었구나! 진짜 용사님은 어떻게 한 거냐!!!"


"진실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제 손등에 있는 용사의 문양이 보이지 않습니까? 용사가 아닌 자가 이 문양을 세기면 몸이 붕괴한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분명 마족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거겠지. 아니면 환상으로 내 눈을 속이고 있는 것 이거나!"


환상 마법은 인간이나 마족은 쓸 수 없는 종류의 마법이었으나, 그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그저 마족이 무언가 간악한 수작을 부렸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안쓰러워 보였다.


"좋습니다. 제가 용사인지 아닌지는 지금 상황에선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죠. 중요한 건 당신이 절 기억하느냐는 것이니까요. 절 잘 보십시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하, 몇 번을 말하게 하는거지? 나는 네 년같은 마족은 몰라! 내가 기억하는 마족들은 전부 죽었거든. 내 손으로 직접! 눈에 보이는 마족들은 전부 죽였단 말이야!"


"..."


"젠장... 이렇게 될 줄이야. 설마 내 최후가 용사를 사칭하는 마족에게 죽는 거라니... 큭큭큭... 한심하기 짝이 없군."

보아하니 네 년은 나에게 뭔가 원한이 있나보지? 날 이렇게 가두고 괴롭히고 싶었을 정도로 말이야. 친한 마족이 나에게 죽기라도 한 건가?


...죽여. 날 더이상 욕보이게 하지 말고 빨리 죽이란 말이다! 너같은 마족들에게 농락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정말 제가 기억이 안 나시나 보군요. 도련님."


"...뭐? 무슨... 도련님?"


도련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순간 카일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어렸을 적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던 여자아이, 귀여운 모습에 사람들의 귀여움을 듬뿍 받았었던 아이가...

그 아이가 카일을 부르던 목소리가 용사의 목소리와 겹쳐진다.


"도련님, 이제 기억이 나시나요?"


"설마... 레나?"


"네, 기억이 나셨나보군요. 맞습니다. 어렸을 적 도련님을 따라다니던 여자아이... 그 아이가 바로 접니다."


그리고 그 순간, 분노와 체념에 차있던 그의 눈동자는 당황과 불신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뭐? 네, 네가 레나라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레나는 분명 죽었다고!"


"죽었다고... 들으셨겠죠. 직접 보시지는 않았잖아요? 그 당시 절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 아저씨께서 저를 몰래 풀어주셨거든요."


"..."


"저는 어렸을 적, 도련님을 존경했어요. 항상 당차고, 평민이며 마족 하프인 저에게도 차별없는 호의를 보내주셨죠. 그 때의 도련님은... 정말 빛이 나는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나는..."


"마왕이 주도한 마족들의 인류 침공, 그 사건에서 도련님은 부모님을 잃으셨죠. 정말 참혹했어요. 백작님께서는 산 체로 갈기갈기 찢기셨고, 부인께서는 펄펄 끓는 기름에..."


"그, 그만!!!" 


카일, 그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부모의 참혹한 죽음.

그는 더이상 듣기 싫다는 듯 소리지르며 두 귀를 막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어째서인지 귀를 막아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도련님은 그 일을 계기로 바뀌셨어요. 빛은 사라지고 어둠만이 가득 찼죠. 마족에 대한 증오심이 당신의 상냥함을 가려버렸어요. 그리고 마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하셨죠. 설령 아무런 죄가 없는 무고한 마족이라고 하더라도요. 제 부모님과 저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마족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제 눈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죠.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리고 세이라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짓는 미소는 분명 이질적이었고, 또 그만큼 섬뜩했다.


"하지만 저는 도련님을 미워하기만 할 수는 없었어요. 도련님이 빛나던 순간도 생생하게 기억나니까. 도련님의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때의 그 참상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카일은 부릅 뜬 눈으로 용사를 마주보았다. 귀를 막고 있던 손은 부들부들 떨리며 피가 세어 나올 만큼 꽉 쥐어져 있었고, 몸을 움츠리면서 용사를 노려보는 그 모습은, 마족에 대한 증오를 마구잡이로 발산하는 미치광이의 모습과 함께 두려움에 떠는 듯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그래서, 뭐, 내가 너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라도 빌길 원하는 건가? 머리를 바닥에 박거나, 발이라도 핥기를 원하는 거야? 웃기지 마라. 나는 절대 그런..."


"아니요. 그럴리가요."


"...뭐?"


레나에게 차가운 조소를 흘리며 비웃으려 하던 카일이었다. 하지만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카일의 예상을 빗나갔다.


"전 당신이 저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당신이 마족에 대한 증오를 지우고, 지금껏 해온 행동을 반성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요. 이미 당신의 본심은 전부 들었으니까요.

이상하지 않으셨나요? 평소보다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다... 그런 느낌이 들지 않으셨어요?"


"무... 슨..."


그리고 레나는 품 속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는 작은 병을 흔들며 말했다.


"제 동료인 연금술사가 만든 약이에요. 효능은... 섭취한 인간을 감정적으로 만들고, 본심을 토해내게 만들죠. 본인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 한

상태로요. 확실한 효과를 발휘하려면 며칠 동안 지속적으로 섭취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대신 어떠한 자백제 보다도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죠. 부작용도 없어요."


카일은 경악했다. 분명 비정상적인 분노였고,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자신의 본심을 왜 그녀에게 말한단 말인가? 자신의 본심이 그녀에게 낱낱이 밝혀진 지금에서야 자신의 행동이 비정상적이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언제 자백제를?


"설마, 지금까지 먹은 식사 안에..."


"네, 맞아요. 그러니까 이미 마족에 관한 것이든, 저에 관한 것이든, 당신의 본심을 전부 알고 있는 전 지금의 당신에게 그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당신의 거짓된 용서를 듣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은 건 바로... 복수죠."


복수, 카일에게 부모님을 잃은 그녀에게 있어선 당연한 선택일 지도 모른다. 카일 또한 고문 당하거나 죽을 지도 모른다는 각오는 끝마친 뒤였다.

하지만 카일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카일의 육감은 이유 모를 경종을 울려댔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련님, 저는 도련님이 미운 만큼... 안쓰러워요. 

만약 마족이 침공하지 않았다면, 

도련님의 부모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하다못해 도련님을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도련님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도련님이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지도 모르니까요."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카일의 질문에 레나는 처음으로 미소지었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도 아름다웠지만, 카일은 이유 모를 두려움에 그녀의 미모 같은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는 제 부모님을 죽인 당신에게 복수할 거에요. 그리고... 당신을 구원하고 싶어요."


구원이라니? 복수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카일은 의아함, 그리고 이유 모를 두려움이 더욱더 커지는 걸 느꼈다.


"저는 마족, 그 중에서도 서큐버스의 피가 흐르는 하프. 그리고 동시에 신탁을 받은 용사에요.

그래서인지 역대 용사들과는 다른... 저만의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됐어요."


그리고 레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카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점점 커져만 가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목에 걸려있는 쇠사슬에 걸려 그는 볼썽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레나는 넘어진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의 배 위에 천천히 올라타고 양 손으로 그의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제 능력은... 원하는 대상을 어린 시절로 되돌리는 능력. 단순히 신체 뿐만 아니라 몸에 깃들어 있는 마력, 그리고 기억까지 전부... 키스를 함으로써 제가 원하는 대상의 모든 것들을 어린 시절로 되돌리는 능력이에요."


"그, 그건...! 우웁...!?"


그녀는 카일의 얼굴의 자신의 가슴에 파묻었다. 그리고 소중하다는 듯이 꼬옥 끌어안았다.

따뜻한 젖가슴이 카일의 안면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옷 위인데도 느껴지는 온기와 부드러운 중량감. 그리고 달콤한 향기가 카일을 간질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순간적으로 카일의 마음 속에 안심감이 싹틀 정도였다.


"이 능력으로 당신이 부모님을 잃기 전의 시절로 되돌려 줄 거에요. 누구보다 상냥했던 당신으로, 누구보다 빛나던 당신으로 되돌려 줄 거에요. 그 이후의 시절은 필요 없어요. 전부 없애버릴 거에요."


"우읍..."


"어려진 당신은 당황하겠죠. 부모님이 없는 건 똑같으니까요. 전 당신의 부모님이 마족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마찬가지로 마족의 피가 흐르는 제가 당신에게 사랑을 줄 거에요.

사랑을 듬뿍 담아서 보살필 거에요. 

누구보다 빛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할 거에요.

지금의 당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 거에요.


그게 지금의 당신에 대한 저의 복수이고,

어린 시절의 당신에 대한 저의 구원이에요."


카일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레나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카일의 인생을, 지금까지 카일이 걸어온 행보를 송두리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카일은 버둥거리며 레나의 품 속에서 빠져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용사, 힘의 차이는 역력했다.


레나는 카일의 머리를 가슴 위로 끌어올렸다. 거칠지 않고 조심스러운, 상냥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찬 카일의 눈동자와,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레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안녕히가세요. 그레트헴 백작님..."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레나는 천천히... 카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부드럽고 말랑한 그녀의 입술의 감촉과, 자신의 몸 속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이 빨려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카일의 의식은 점차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덜컹 덜컹...

덜컹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자 은은한 빛이 눈가를 간지럽혔다. 의식이 점차 수면위로 부상했다.


'어...? 내가 왜 자고 있었지? 나는 분명 친구들이랑 같이 놀고 있었는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며 의식이 점차 또렷해지자, 내 몸을 감싸 안고 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다정한 음색이 들려왔다.


"깼어? 피곤하면 좀 더 자도 되는데..."


흐릿한 시야가 점차 맑아지자, 날 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쁘다...'


정말 예쁜 누나였다. 살랑이는 은빛 머리카락은 정말 부드러워보였고, 피부는 따뜻함이 느껴지는 흰색이었으며, 작게 솟아있는 한 쌍의 뿔은 앙증맞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붉은색 눈, 그 눈은 자애가 가득 차 있어 바라보고만 있어도 따스한 자애에 마음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누구... 세요?"


아무래도 이 누나는 마족인 것 같았다. 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최근 들어서 마족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부모님께서 하시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누나가 나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누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나는 예전에 너희 부모님께 빚을 졌었던 사람이야. 너의 부모님께 부탁을 받고 너를 데리고 가는 중이야."


"네? 부모님이요? 그럼 부모님은 어디 계신 거에요? 제 친구들한테 인사도 해야 하는데... 레나라는 아이가 곧 생일이라 선물도 줘야 해요."


의문을 표하는 나를 누나는 살며시 껴안았다. 누나의 품 속은 너무 달콤해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자세한 건 도착해서 말해줄게. 괜찮아... 누나가 함께 있어줄 테니까..."


"..."


부모님의 안위가 어떤지, 누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말없이 사라져서 친구들이 슬퍼하진 않을지, 사실 걱정되는 것도 많았고, 혼란스러운 것도 맞았다. 

하지만 나를 껴안고 있는 누나의 따뜻한 품에,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의 따뜻함에...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내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싹트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사실 복수 대회 용으로 썼던 건데, 뭔가 복수라는 주제가 쓰면 쓸 수록 옅어지는 것 같아서 그냥 단편으로 올림.

부족함 많은 글이긴 하지만 좋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