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이거 실홥니까.”


사내가 손에 쥔 버스표가 허망하게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바람이 멎었고, 표는 쓰레기 마냥 바닥을 뒹굴었다.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사내, 김진우가 느꼈던 격렬한 감정 곡선을, 이 버스표가 전부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잃은 충신 마냥 허탈한 심정으로 눈을 데굴 굴렸다.


오후 12시 08분. 딱 2분 차이로 버스를 놓쳤다. 표를 뽑자마자 붐비는 복도를 제쳐 미친듯이 달렸려왔는데도 이 꼬라지다. 아직도 쿵쾅거리며 가라앉지 않은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 그가 힘없이 웃었다.


“망했네.”


왼손에 들린 봉지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님아 제발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아, 끝내 건너고 말았구려.


저기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는 나만의 작은 버스. 버스 기사는 어찌 빈 좌석을 신경 쓰지 않았단 말인가!


마음 같아선 괴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여기는 공공장소. 결국, 그는 몸을 굽혀 갈 데 없는 분노를 속으로 삭히는 수밖에 없었다.


“끄으읍! 이 븅신같은 새끼! 괜히 순대 냄새에 홀려서! 이 드러운 돼지새끼!”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보았으나 진우는 끊임없이 자신을 탓하며 뺨을 두드렸다. 얼마나 자비가 없었는지 남자치고 하얀 볼살이 순식간에 빨갛게 부어올랐다.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느긋하게 식사나 하고 올 걸 그랬다.


진우는 두 주먹으로 유혹에 패배한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한탄했다. 괜히 약속 시간에 늦을까 노심초사하며 밥까지 굶고 나온 결과가 지각이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다음 버스까지 몇 시간 남았더라….”


뭐, 이미 떠난 버스다. 그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세 5년은 더 늙은 얼굴로, 방금 떨어뜨린 버스표를 손에 쥔 뒤 전광판에 걸린 버스 시간표를 확인한다.


“어디 보자. 지금이 12시 12분이니까...”


다음 버스는 13시 40분에 있었다. 일반이 아닌 우등이었지만, 진우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진우는 먼저 표의 환불 신청이 되나 물어보려고 매표소로 발을 돌렸다. 신의 마지막 자비인지 다행히 표는 환불할 수 있었다.


티켓을 지갑 안에 고이 넣어둔 뒤 인적 드문 터미널 구석을 찾았다.


마침 콘센트와 의자가 마련된 최적의 장소를 발견한 그는 헐레벌떡 그 자리에 앉아 순대부터 깠다.


“이거 하나 먹자고 1시간 30분을 날려먹었네.”


진짜 미련한 새끼가 따로 없군. 자책하면서도 일정한 속도로 순대를 집어 입 안으로 날랐다. 중간에 휴대폰으로 부모님께 조금 늦을 거 같다고 문자를 보낸 그는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고민했다.


피시방? 터미널 근처 피시방은 요금이 비싸고, 컴도 구렸다.


카페? 차라리 피시방을 가는 게 낫다.


그 외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하나둘 선택지를 쳐내고 나니 식당만 남았다.


마침 순대 1인분으로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배를 채우기 모자랐던 차다. 약간 아쉬운 포만감을 호소하며 더 달라고 보채는 배를 문지르던 그는 식당을 찾고자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속터미널은 예로부터 음식 천국이라 불러도 무방한 곳이고, 그가 버스를 놓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 진득한 음식의 향기로움에 홀렸기 때문이다.


터미널은 빈 속으로 달려온 사람한텐 매우 불친절한 곳이더라.


진우는 실로 새삼스럽게 웃으며 순대가 담겨 있던 검정색 비닐봉투를 쓰레기통 안에 던져넣었다.


“어째 1시간 30분짜리 치고는 많이 별론데.”


냄새는 미슐랭 급이었는데 맛은 쓰레기만도 못하다. 순대를 굽다 태우기라도 한 건지 쓴맛과 고무타이어 마냥 질긴 식감에 그가 혀를 내둘렀다.


‘내가 맛이 없다고 느낄 정도면 진짜 심각한 건데.’


조만간 가게 하나 사라지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미련없이 다음 음식을 찾으러 터미널을 둘러보았다.


터미널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음식점은 분식, 패스트푸드, 그리고 만두, 빵집이다.


“일단 분식은 패스하고….”


방금 먹은 순대가 떠오른 그는 제법 유명한 프렌차이즈 분식점을 바로 지나쳤다. 빵은 썩 좋아하질 않았고, 만두 역시 배를 채우기엔 적절한 음식이 아니기에 패스.


그 외에 손님이 너무 많거나 더러운 식탁 등 조건을 하나하나 따지면서 걷고 있자니 어느새 터미널 끝자락, 맥오날드와 칼국수집만 남았다.  


“든든하게 먹으려면 역시 국밥이지.”


진우는 망설임 없이 칼국수집을 택했다.


당연하게도, 칼국수집에는 국밥이 없었다.


“이모. 수제비 한 그릇 주세요.”

“네에! 여기 3번 테이블에 수제비 하나!”


진우는 자연스럽게 빈 테이블에 앉아 수제비를 시켰다. 단순히 창 밖으로 보인 가게 메뉴판에 수제비가 적힌 걸 보고 입맛이 돋았기 때문이다. 국물도 많고, 모자라면 공기밥 하나를 시켜서 말아먹으면 된다.


실로 국밥스런 메뉴가 아닐 수가 없다.


사실 수제비가 끌리는 것 외에도 그가 칼국수집을 택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맥오날드는 음식이 너무 빨리 나온다. 게다가 패스트푸드 특성상 배가 덜 찬다. 그렇다고 많이 시키면 그만큼 돈이 든다.


하지만 칼국수집은 주문이 적당한 시간이 걸려서 나오고, 천천히 먹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가격도 적당한데다가 배가 꽉 찬다.


요컨대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버스 탑승까지 1시간 30분이나 남은 진우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이 칼국수집, 맛집이었나보다. 가게 안을 찬찬히 살펴보니 상당수 연예인 싸인이 벽에 걸려 있었고, 티비 프로그램 출연 경력까지 있다.


일개 터미널 음식점치곤 사뭇 호화로운 인테리어에 진우가 내심 감탄했다. 


“네에. 여기 물이랑 반찬이요.”

“아, 감사합니다.”


김치, 단무지, 그리고 어묵 무침이 차례대로 테이블 위에 놓인다. 


진우는 곧장 젓가락으로 어묵 무침을 집어서 입가심을 한 뒤 스마트폰을 꺼냈다.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 어느새 300이 넘는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진짜 허구한 날 톡만 하네.”


그가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확인한 게 20분 전이었으니. 20분 사이 못해도 300 이상의 메시지가 쌓인 셈이다.


진우는 먼저 부모님에게 마저 안부 메시지를 전하고, 친구들에겐 순대를 사다가 버스를 놓쳤다고 넌지시 푸념했다.


그러자 끼리끼리 논다고. 친구라는 녀석들은 그의 톡을 보자마자 병신 새끼라고 그를 마구 비웃었다.


“그래. 순대에 넘어간 내가 병신이지.”


정작 본인도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딱히 반박할 수가 없더라. 진우는 묵묵히 친구들의 장난어린 폭언을 받아들였다.


물론, 속으론 이를 빠득 갈았다. 그는 이 시대의 젊은이답게 남이 당하는 꼴은 몰라도 자신이 당하는 꼴은 못 보고 사는 이기적인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어디 내려가기만 해봐라. 친구들의 숨기고 싶은 흑역사를 잔뜩 밝혀주리라.


“저기, 손님.”

“네?”


대놓고 복수를 다짐하며 겉으론 자책하는 듯한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던 그가 낯선 이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자리가 없어서 그런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다른 손님과 합석 가능하신가요?”

“합석이요?”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진우가 식당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당장 그가 주문할 때만 해도 널널했던 가게 안이 어느새 꽉 차 있었다. 그는 곤란한 표정의 아주머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관없어요.”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파하게 웃는 아주머니가 깡총깡총 식당 입구로 뛰어갔다. 진우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아주머니가 향한 곳으로 이동했고,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진짜 예쁘다.’


멀리서 척 보아도 무척 예쁘게 생긴 여성이었다. 어렸을 때 사귄 여자친구가 연예잍을 할 정도라 좀처럼 얼굴이 빼어난 이성을 봐도 시선을 안 주던 진우가 드물게 입을 떡 벌렸다.


옷차림은 추운 겨울인데도 요즘 세대답게 세련됐고, 화장도 티가 덜 나게 옅으면서 자연스러웠다.


‘연예인 지망생인가?’


진우는 그녀가 현역 연예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진짜로 연예인이라면 모자나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등 최소한의 변장이라도 했을 테니까. 그녀는 대놓고 얼굴을 드러낸 상태였고, 행동거지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드물게 진우의 시선이 좀처럼 상대를 떠나지 못했다.


진우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 손님은 아주머니의 안내를 따라 맞은편까지 걸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부터 조신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합석해주셔서 감사해요.”

“아, 아닙니다.”


인사를 받은 진우 역시 황급히 표정을 고쳐 미소로 화답했다. 은은하게 웃는 여성의 미모는 가까이서 봐도 발군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 해보는 진우였으나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여성은 그런 진우를 보며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얼굴을 붉힌 진우는 고개를 숙인 뒤 곧장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거운 어색함이 테이블 주변을 맴돌았다. 허나 진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상대도 먼저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점차 그 어색했던 분위기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뭐 간단한 질문이라도 해볼까? 아니, 굳이 그래야 하나?’


쏟아지는 친구들의 메시지를 훑으며 진우의 고민이 깊어졌다.


헌팅. 문득 몇 년 전 그가 친구들과 함께 해운대에 놀러갔을 때 시도했다가 포기했던 일이 떠올랐다. 밤이 됐는데도 해변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질색한 그는 쉰다며 먼저 호텔로 돌아갔었다.


뒤늦게 푹 자고 일어나니 친구 몇 명이 여자를 낚는데 성공했더라. 아침 식사 때 여자를 끼고 나타난 모습을 보고 땅을 치며 후회한 기억이 진우를 자극했다.


어차피 잠깐에 불과하다. 아주 잠깐의 시간. 앞으로 더 볼 관계는 아니겠지만, 구태여 이상한 인식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눈앞에 앉은 여성은 매력적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진우 본인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여성이었다. 묘하게 과거 그가 사귄 여자친구를 닮은 느낌이 나서 그는 더더욱 초조해졌다. 그는 일단, 쉴 틈 없이 쏟아지는 톡을 읽는둥 마는둥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주문한 수제비가 나오길 기다렸다.


슬쩍.


언제 수제비가 나오나 부엌을 살피는 척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물론 속내는 여성이 무엇을 하나 살펴보기 위함이었고, 운이 좋으면 근거리에서 미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계산도 들어가 있었다.


허나 진우도 예상치 못한 게 있다면.


“아.”


마침 메뉴판을 보다 고개를 든 그녀와 눈이 마주칠 줄은 몰랐다는 점이다. 한동안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둘은 거의 동시에 시선을 회피했다. 바보처럼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움찔한 자신을 탓하며 진우는 자괴감을 느꼈다.


‘아 쪽팔려.’


얼굴이 화끈하다. 어떻게든 태연한 척 스마트폰을 쳐다봤지만, 내용물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초점을 잃은 채 보이지도 않는 여성을 향해 엄청난 집중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오늘따라 고속터미널에 자리잡은 칼국수집 특유의 소음이, 왠지 모르게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다.


그만큼 진우가 앉은 테이블의 분위기는 어색하고, 또 뻘쭘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올라가지도 않는 톡방 로그를 멍하니 쳐다보며 입 안의 살덩어리를 잘근질근 씹었다.


눈앞의 여성이 자신을 욕하거나 비웃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그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방금 전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까봐 두려웠다. 이게 대체 무슨 꼴불견이람. 전혀 남자답지 못하다며 자책하면서도 그는 천성이 낯을 가려 어쩔 수 없다고 책임을 전가했다.


다행히 얼마 안 가 다시 톡방이 활발해졌다. 진우는 이 기회를 놓칠소냐 황급히 그 흐름에 끼어들었다. 조용히 손가락만을 바삐 움빅이며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드디어! 생각보다 길었다.


실제론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 주문을 받았던 아주머니가 커다란 쟁반에 그릇을 한아름 담은 채 걸어왔다. 테이블 위로 수제비 두 그릇과 만두가 담긴 통이 차례대로 세팅됐다.


“어라? 수제비 두 개에 만두?”

“두 분 다 같은 걸 시키셔서 금방 나왔습니다요.”

“히힛! 감사합니다.”


다른 손님들에겐 비밀이라며 아줌마가 슬쩍 윙크했다. 그녀는 두 손을 합장하며 귀엽게 예를 표하고는 싱글벙글 숟가락을 집었다.


끝내 해탈한 진우는 뭐 어때, 하고 체념한 뒤 컵에 담긴 물을 들이켰다.


엄연히 따져보면 그녀의 주문이 가장 늦게 나와야 했지만, 진우는 차라리 이게 낫다며 속으로 아주머니의 배려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남녀가 따로 식사하는 모양새는 이상하니까. 주로 먼저 식사를 하고 있을 진우의 모습이. 아무리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라지만 눈앞에 이런 미녀가 떡하니 앉아 있는데 시선이 집중되지 않길 바라는 건 사치였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아주머니가 등을 돌리자 진우도 수저를 손에 쥐었다. 이게 코로 넘어갈지 입으로 넘어갈지 모르겠지만, 일단 먹고 보자.


그리 생각한 진우는 먼저 수제비 국물을 떠서 천천히 입으로 옮겼다. 후우후우 입김을 불어 뜨거운 국물을 식힌 뒤 조심스럽게 입술을 국물에 댔다. 뜨거웠으나 혀가 데일 정도는 아녔다. 진우는 곧장 국물을 후르릅 들이켰다.


‘맛있다!’


별도로 후추나 조미료를 더 첨가하지도 않았는데 간이 완벽했다. 눈이 절로 동그래진 그는 이번엔 수제비를 한 숟갈 푼 뒤 한 점 입으로 날랐다.


간이 잘 벤 수제비의 쫀득한 식감이 씹는 맛을 더해 방금 전 먹은 순대의 쓰라림을 말끔히 지워낸다.


‘수제비도 맛있네?’


본디 수제비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인상이 강한 편이다.


허나 맛깔나는 국물이 스며든 수제비는 달랐다.


진우는 왜 텅 빈 칼국수집이 삽시간에 손님으로 가득 찼는지 납득했다.


‘졸라 맛있어.’


메인 메뉴가 아닌 수제비가 이럴진데 과연 칼국수는 얼마나 맛있을까?


진우는 자신의 선택을 살짝 후회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만큼 수제비가 그의 취향에 딱 맞았다. 그와 합석한 여성도 마찬가지. 그녀도 진우와 마찬가지로 국물과 수제비를 한 점 맛을 본 뒤 무척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맛있는 수제비에 빠질 수 없는 반찬이 있다. 바로 김치였다. 진우는 수제비를 몇 점 더 맛본 뒤 젓가락을 집었다. 이윽고 김치를 향한 두 젓가락의 부딪침에, 두 남녀의 눈이 마주쳤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 괜찮으시면 만두도 한 번 드셔보세요.”


무척 맛있다며 여성이 만두가 담긴 찜통을 진우쪽으로 슬쩍 밀어냈다. 합석의 답례라며 첨언한 여성이 수줍게 웃자 진우는 넋을 잃고 허둥지둥 만두를 받았다.


‘진짜 예쁘네.’

 

혹시 진짜 연예인 아냐? 그녀의 정체에 의구심을 품는 것도 잠시. 진우는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낸 뒤 얌전히 식사를 재개했다.


어차피 버스를 놓친 바람에 생긴 인연이다. 인연이라고 칭했으나 스쳐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했다.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우습다. 지금은 그냥 이 행운을 만끽하자. 진우는 들이대보라고 자신을 보채는 내면의 악마를 쫓아낸 뒤 만두를 한 입 베어물었다.


“오옴!”

“맛있죠?”


입 안을 만두로 꽉 채운 진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성이 키득키득 웃었다.

 

“반응을 보니 여기 처음이시구나. 이 가게, 터미널에서 꽤 유명한 맛집이에요.”

“그렇구나. 진짜 몰랐어요.”


여인의 속삭임에 입 안에 가득 찼던 만두를 꿀꺽 삼킨 진우가 감탄했다.


어디 연예인의 싸인이나 TV프로그램에 나온 맛집이라고 믿고 갔다가 속은 게 한두 번이어야지. 진우는 반쯤 남은 만두를 마저 입 안에 우겨넣었다.


“그리고 맛집답게 모든 메뉴가 맛있는데 진짜 핵심은 바로 이거죠.”


여성은 아무것도 모르는 진우에게 한 수 가르쳐주겠다며 젓가락으로 김치를 쭉 찢었다. 그녀의 젓가락은 자연스럽게 세로로 길게 찢어진 김치를 호박과 수제비를 얹은 수저 위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자, 드셔보세요.”


그리고는 진우에게 자신의 수저를 내밀었다.


‘어라?’


진우의 머릿속에서 그린라이트가 번쩍였다.



. . .



“어때요? 맛있죠? 그쵸?”


네. 입 안 가득한 음식물 때매 차마 말하진 못하고, 진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성은 희희낙락 웃으면서 음식이 맛있는 게 마치 자기 일인 것 마냥 기뻐했다.


‘이거 그린라이트 맞지?’


음식을 씹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눈앞의 여성한테 고정되어 있었다. 몇 번을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외모다. 비유하자면 미의 여신. 그 여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한테 웃어주고 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상대가 들을까 겁나는 심장 박동. 초점이 안 맞는 동공. 그리고 패닉을 일으켜 작동을 중지한 뇌. 진즉 사멸한 진우의 연애세포가 무지막지한 오류를 신체 곳곳에서 일으키고 있었다.


평소 그가 알던 이성 친구들이라면 친근함에서 비롯된 장난일 테고, 낯선 여성이라면 그린라이트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과연 눈앞의 여신이 나한테? 진우는 회의적이었다.


진우의 머리가 냉각수를 들이부은 것처럼 급격히 차가워졌다. 남들에게 꿀리는 외모는 아니라고 자부하지만, 눈앞의 여성을 보고 있자니 많이 꿀린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옆에 나란히 서는 것만으로도 절로 황송해지는 수준.


음식을 꼴깍 삼킨 진우는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다,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여전히 보란듯이 진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진우는 본드라도 바른 것 마냥 딱 달라붙은 입술을 기어코 떼냈다.


“저….”



 # # #



“내가 미쳤지….”


비좁은 터미널 편의점 안에서, 사이다를 꺼낸 진우가 머리를 냉장고에 푹 박았다. 애매한 문짝의 냉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이마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뭐? ‘이름이 뭐에요?’ 미쳤냐, 김진우.”


사멸된 연애세포가 부른 참사를 되새긴 진우가 주먹으로 머리를 두들겼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꼴이 퍽 꼴사납다.


기껏 여성에게 건넨 질문이 관등성명이라니.


칼국수집에서 자신이 벌인 추태에 진우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여성은 순간이나마 어찌 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고, 김진우도 얼음이 되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는 황급히 수제비를 입으로 퍼날랐다. 입천장이 비명을 지르던 말던 국물이고 자시고 수제비만 황급히 뱃속에 쑤셔넣곤 계산대로 달려가 현금을 건넨 뒤, 허겁지겁 가게를 빠져나왔다.


“씨바아아알….”


간만에 찾아온 기회를 날려버린 그가 쿵쿵 소리를 내며 이마를 두 차례 더 박았다.


쪽팔렸다. 그냥 쪽팔린 게 아니라 너무 쪽팔렸다.


하필 그 많고 많은 질문 중 멍청하게 이름을 물어보다니….


다른 질문도 많았을 텐데!


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는 충신 마냥 끊임없이 자책하던 그는 계산대에서 지켜보던 아저씨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자 터덜터덜 걸어가 지갑을 꺼냈다.


“2200원입니다.”

“여기 카드요….”


점장으로 추정되는 아저씨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으며 편의점을 나온 진우는 가까운 의자에 대충 걸터앉은 뒤 뚜껑을 딴 사이다를 그대로 쭉 들이켰다.


“케흑! 케흑! 하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손목 시계를 보자 아직도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다. 본래 느긋하게 30분은 먹고 나올 예정이 10분으로 단축된 셈이다.


“설마 또 마주치진 않겠지.”


저 멀리 보이는 칼국수집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는다. 일부러 칼국수집에서 가장 멀리 있는 편의점을 이용했다. 조금이라도 그녀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행한 행동이었다.


허나 두근거리는 심장은 아직도 지칠줄 모르고 팔딱팔딱 뛰고 있었고, 쪽팔려 뒤지려는 진우의 이성과 달리 본능은 그녀와 다시 만나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대충 녀석들 앞에서 풀 썰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자.”


친구들한테 썸탈 기회를 날려먹은 걸로 비웃음당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통이 느껴지는 진우였다. 왠지 모르게 옆구리까지 아려오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니리라.


정말 놀랍게도.


이번 모임에 나오는 친구들은 죄다 결혼한 유부남이거나 애인이 있는 자들이다.


딱히 친구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그런 건 아니고. 한 명은 사고쳐서, 한 명은 집이 부자라서 결혼이 빨랐다.


나머지도 안 그런 척 페이스톡에서 커플인 걸 대놓고 자랑하던 걸 진우는 잊지 않았다.


결국, 솔로는 진우 혼자였다. 매번 축의금을 내는 측. 받는 상황은 결코 오질 않는 불운한 사내. 모임에선 이미 멸종 위기의 희귀 동물 취급을 받고 있다. 부부나 애인 동반 여행에서 당당히 불참 선언을 한 건 이미 전설이 되었다.


고오얀 놈들. 자괴감에 진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느긋하게 먹고 싶었는데.”


급하게 먹고 나와 더부룩한 배를 문지르며 페트병을 비운다. 시선은 줄곧 자신이 뛰쳐나온 칼국수집을 향한 채. 미련하게도 그는 혹여라도 그녀가 이쪽으로 오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경계심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어디 보자. 탑승 시간까지 대충 몇 분이나 남았지?’


시선을 고정시킨 채 슬쩍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도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초조한 듯 발 뒤꿈치는 아까부터 떨림이 멈추지 않았고, 그는 차라리 사람이 드문 바깥에서 대기할까 고민했다.


다행히 고민은 짧았다.


진우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실외 탑승 대기실로 향했다. 밖이 추워 대부분 승객이 뜨끈한 난방이 도는 실내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진우는 하얀 입김을 뱉어내며 자신이 탈 버스 승차홈 앞 의자에 앉았다. 그는 손끝부터 착실히 아려오는 냉기에 손을 비비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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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언제와ㅏㅏㅏㅏㅏ!

-아니. 스크린 야구 치는데 4번 타자가 없는 게 말이 되누!

-응 니네 4번타자 버스놓침ㅋㅋㅋㅋㅋ


이미 진우만 쏙 빼놓고 다 모인 그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스크린 야구를 치러 간 모양이다. 톡방에 엉뚱한 자세로 야구방망이를 든 사진과, 격차가 7점이나 되는 점수판의 사진이 차례대로 올라왔다.


“버스 안 놓쳤어도 빼먹고 놀 생각이었구만.”


고작 버스를 놓쳤다고 톡을 보내고 1시간도 안 된 시점이다. 버스를 탔어도 한창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윽 시간. 그의 친구들은 진작 놀기 바빴던 셈이다.


배신감을 느끼기엔 지각한 죄가 더 크니 진우는 얌전히 친구들에게 사죄를 박았다.


‘진짜 버스 놓쳐서 지각한 게 죄다.’


진우는 자신이 처한 처지를 한탄하며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너무 추워서 폰을 오래 잡고 있기 힘들었다. 그는 새빨갛게 얼어붙은 손에 뜨거운 입김을 훅훅 불어준 뒤 따뜻한 주머니에 꽂았다.


진우는 에어팟 너머로 시끄러운 일렉트로닉 리듬이 퉁퉁 고막을 간질이는 걸 만끽하는 자세로 눈을 감았다. 외출 시간이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했다. 이래서 친구들과 만나면 제대로 놀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버스에서 한숨이라도 자야겠는데….”


다만 진우는 흔들거리는 버스 위에선 잠들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그래도 우등인데 괜찮겠지?’


어렸을 때 몇 번 타본 우등 버스는 충분히 편안했던 걸 상기하며 진우는 전신을 훑는 냉기에 절로 몸을 움츠렸다. 바람이라도 안 통하는 통로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보다 추위에 강한 그도 한파가 부는 영하의 기온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진우는 주머니 안의 스마트폰을 검지로 툭툭 건드리며 대충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족히 4, 50분은 기다려야 한다.


평소라면 모를까. 한파가 들이닥친 추위를 4, 50분이나 버티는 건 너무 미련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친구들 만나기도 전에 얼어죽겠다.


이쯤 되니 그 여자를 피하는 게 그리 대순가 싶기도 했다.


고작 식당에서 한 번 보고 말 인연인데 이렇게까지 오버를 해야 하나?


추위에 벌벌 떨더니 생존 본능이라도 각성한 걸까? 없던 용기가 샘솟았다.


그래. 이렇게 쪼는 것도 멍청한 짓이지. 진우는 변명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설득하며 하는 수 없다는 식으로 다시 실내로 들어가기 위해 눈을 떴다.


고동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진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 ■■ ■ ■■■. ■■■■■. ■ ■■■.”


상대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도 시끄럽게 음악을 내뱉는 에어팟 때문에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 ■ ■■■■? ■■■? ■■■■■?”


진우가 멍청하게 이름을 물어봤던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귀엽게 진우를 아래서 위로 쳐다보며, 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확인하고자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진우는 반응이 없었고,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뒤 진우의 모습을 면밀히 살피다가, 귀에 꽂은 에어팟을 발견했다.


“뭐야. 음악 듣고 계셨어요? 왠지 반응이 없더라.”

“어...”


무례하게 멋대로 에어팟을 벗긴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는 간드러진 목소리. 진우는 여전히 정신이 반쯤 가출한 상태로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왜 꿀먹은 벙어리가 되셨어요? 방금은 막 대담하게 이름도 물어보시더니.”

“아니. 그러니까 그게...”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는 진우를 무시하며 그녀가 옆에 앉았다. 웅크리고 있어서 아프다며 조그마한 주먹으로 검정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수정이에요. 한수정.”

“네?”

“제 이름이요.”


물어보셨잖아요? 상체를 숙인 그녀가 팔로 턱을 받친 채 푸흐흐 웃었다.


“아, 아아! 저, 저는 김진우라고 합니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간신히 정지된 진우의 뇌가 재부팅을 끝냈다. 그는 당황하는 것도 잊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그녀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너무 웃겨. 그럼 저는 진우 씨라고 부를게요?”

“그, 네. 수정 씨.”


버스를 타려는 승객 말고는 아무도 없는 승차홈. 그 끝에서 방금 전 식당에서 마주한 여인과 재회. 진우의 머릿속은 과열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여자랑 처음 대화해보세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요.”


차마 연애세포가 사멸했다고 말할 순 없는 그였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딱 봐도 저보다 연상이신데.”

“네. 아니, 그… 응.”


수정의 배려에 조금씩 안정감을 되찾은 진우는 그제야 그녀를 차분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녀는 겨우 똑바로 눈을 쳐다본다며 칭찬의 뜻으로 주머니에서 뜨거운 캔커피를 꺼냈다.


“… 저 마시라고?”

“그럼 여기 진우 씨 말고 누가 있는데요?”

“수정 씨요.”

“에헤이. 제 몫은 당연히 따로 챙겨놨죠.”


그녀가 자신 몫의 캔커피를 반대쪽 손으로 짤랑짤랑 흔들었다. 그녀는 커피로 진우의 볼을 문대며 팔 아프니까 빨리 가져가라며 그를 보챘다. 면목이 없어 뒷목을 잡던 그는 순순히 그녀가 건넨 캔커피를 받았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건, 전부 그녀가 건넨 커피 때문이라고 애써 우기면서.


“그, 수정 씨가 여긴 어쩐 일로?”


산지 얼마 안 돼 따끈따끈한 캔커피로 차가워진 두 손을 녹이던 그가 물었다. 두 손으로 꼭 쥔 캔커피를 홀짝이던 수정은 얼굴부터 귀까지 새빨간 진우를 힐끗 쳐다보곤 푸흐흐 웃었다.


“보면 몰라요?”


그녀가 손에 들린 캔커피를 짤랑짤랑 흔들었다.


요컨대. 그녀가 진우를 찾으러 왔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진우의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너무 놀라서 그는 구태여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 저를…?”

“네.”

“왜 굳이?”

“음. 재밌어서?”


수정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형으로 답했다.


대체 왜? 영문을 알 수 없는 대답에 진우가 눈살을 찌푸리자 수정이 입가를 가리고 헤프게 웃었다. 그녀는 진우의 표정이 너무 다채로워서 재밌다고 덧붙였다.


‘내가 그랬나?’


진우는 추위 때문에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볼을 매만졌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재밌다는 평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수정은 자신더러 재밌다고 깔깔 웃어댄다.


대체 뭐가 그리 재밌는 걸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흘겨본 진우는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곧장 마른 세수를 하는 척 얼굴을 가렸다.


‘진짜 미쳐버리겠네.’


수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있었다.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 진우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앞의 여자는 천생 요물, 진우한테 있어선 천적 그 자체였다.


한편 진우가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는 걸 보던 수정은 내심 당황했다. 남자라면 질릴 정도로 많이 상대해봤고, 진우처럼 내성이 낮은 남자도 당연히 그녀의 메뉴얼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도 설마 반응이 이렇게 격할 줄은 몰랐는데.’


질색할 법도 하나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클럽이나 거리에서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시선을 보내는 것하곤 달랐다. 부끄러워 하면서도 정작 대화할 땐 나름대로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따박따박 내뱉는데서 수정은 묘한 기특함까지 느꼈다.


자신의 외모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순진한 남자. 썩 나쁜 기분은 아녔다.


수정은 자신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었다. 동성 친구나 동기, 그리고 선후배 사이에서 자신의 미모는 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었으니까.


반대로 이성한테는 얼마나 치명적인 무기로 작용하는지도 꿰차고 있었다.


연예인 업계의 밑바닥을 전전하길 수 년. 드디어 미련을 끊고 평범하게 살아가던 그녀한테 있어 순수하게 자신을 좋아해주던 팬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진우는 본인은 몰라도 꽤 높은 가산점을 받고 있었다.


물론, 말을 걸어놓고 도망친 것 때문에 다 까여버렸지만.


하여튼, 그녀는 칼국수집에서 주운 걸 상기하머 다시 한 번 싱긋 웃었다. 동시에 눈이 마주친 진우가 다시 한 번 고개를 홱 돌렸다. 추위 때문에 빨개진 수정과 달리 진우의 얼굴은 명백히 부끄러워서 빨개진 거다.


그녀는 운명론을 믿지 않지만, 이쯤 되면 한 번쯤은 그 운명이란 걸 믿어도 되지 않을까 속으로 되새겼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해요. 칼국수집에서 있던 일이라면 저,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어요?”


수정의 위로에 진우의 어깨가 무너져내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왜 찾아오신 거예요….”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에 반응해 그녀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어느덧 왼손은 주머니 안에 든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를 놀리는 건 재밌지만, 과하면 그가 또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정은 결국 비장의 무기를 빼들었다.


“제가 왜 진우 씨를 찾아왔냐면요.”


드디어, 진우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왔다.


수정은 주머니에서 꺼낸 걸 진우의 코끝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들이댔다.


“짜잔! 오늘의 첫번째 서프라이즈. 분실물의 주인을 찾으러 왔답니다.”


그녀가 진우 앞에서 티켓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설마, 하고 진우가 황급히 자신의 지갑을 확인해보자 티켓이 없었다.


대체 왜? 고민은 짧았다.


“아아! 설마! 칼국수집에서!”

“정답! 현금 내시면서 티켓까지 같이 내셨더라구요.”


그녀가 건넨 티켓을 받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불과 몇십 분 전에 그가 매표소에서 구매했던 좌석 티켓이었다.


진우는 벌어진 입을 다무는 것도 잊은 채 수정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는 장난을 성공시킨 악동 마냥 이를 드러내며 히힛 웃고 있었다. 두 손의 브이는 덤이다.


“처음엔 안내 데스크랑 매표소에 갈까도 생각했는데. 혹시 몰라서 이쪽 먼저 확인했죠.”


칼국수집에도 혹시 몰라 말은 해뒀어요. 고맙죠? 수정이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하며 들이댔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진우의 심장이 쿵쾅쿵쾅 미친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차마 은인의 시선을 회피할 수 없었다.


“그, 고마워요.”

“뭘요. 어차피 옆자리에 앉으실 분인데. 겸사겸사 가져온 거죠.”

“예? 옆자리라뇨?”


진우가 당황하자 수정은 태평하게 티켓을 한 장 더 진우한테 내보였다.


“짜잔! 오늘의 두 번째 서프라이즈!”


평이한 어조와 달리 손에 들린 티켓의 파괴력은 어마무시했다. 수정의 가느다란 두 손에 잡힌 보라색 티켓이 좌우로 흔들거리며 진우 앞에서 뻣뻣하게 춤을 췄다.


아니, 대체 이게 뭔 일이람? 입을 떡 벌린 진우는 멍청한 표정으로 티켓에 적힌 좌석 번호를 쳐다보았다.


K-19.


진우는 황급히 자신의 티켓을 재확인했다.


K-18. 진우는 티켓을 받을 때 1인석 자리는 꽉 차서 안 됐고, 대신 창가 자리라며 건네주던 매표소 직원을 떠올렸다. 우등 버스는 보통 좌석이 좌측 2석 우측 1석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좌측 창가 자리가 18번이라면 놀랍게도 복도는 19번이 된다.


즉 그녀의 버스 좌석은 진짜로 진우의 옆자리였다.


“앞으로 무려 3시간을 함께 보내게 됐네요. 잘 부탁드려요, 진우 씨.”


이건 진짜 그린라이트라고, 진우의 직감이 미친듯이 볼라이트를 깜빡였다.





이게 몇 년 전에 쓴 거더라.

하드 뒤지다가 나와서 아주 살짝 오타 등등이랑 문단만 조금 손 봄.

저런 풋풋한 거 쓸 때도 있었네요.


웃음소리 푸흐흐 하는 거 봐선 창염 볼 때 쓴 게 확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