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를 열심히 읽은 장붕이라면 오이노네라는 등장인물이 기억날지도 모르겠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의 본처로, 양치기 시절의 그와 결혼해 아들 코리토스까지 낳고 행복하게 살았으나


파리스가 트로이 왕자임이 밝혀지고 궁정으로 들어가면서 그에게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심지어 헬레네라는 다른 여인과 재혼까지 하면서 홀로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후 아카이아 군의 맹장, 필록테테스의 독화살에 맞은 파리스가 돌아와 부디 해독을 해달라고 애걸하지만


이제 와서 이러는 게 가증스러웠던 오이노네는 단칼에 부탁을 거절하고, 파리스는 결국 맹독이 올라 사망


뒤늦게 후회하며 파리스를 치료해주려고 했던 오이노네도 절망해 목을 매달고 만다


전형적인 그리스 비극답게 참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런 비참한 스토리를 싫어하므로, 한번 해피 엔딩이 되도록 구성을 바꿔보자



원전대로 양치기 파리스와 만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던 오이노네


그런데 어느날, 도둑의 신 헤르메스가 찾아와 남편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긴다


"헤라/아테나/아프로디테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황금사과를 주라"는 심판역이 그것


본능적으로 좆됨각을 느낀 파리스는 심판이 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다녔고


위험을 직감한 오이노네도 남편을 숨겨주기 위해 혼신을 다했지만, 그래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그렇게 울며 겨자먹기로 심판을 맡은 파리스는 원전 스토리대로 아프로디테를 선택해 황금사과를 넘긴다



아프로디테는 감사의 뜻으로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선물하겠다'고 하는데


원작의 찌질이 파리스와는 달리, 이 버전의 파리스는 순정남이라 아프로디테의 선물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


자기 아내인 오이노네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


아프로디테는 기꺼이 오이노네의 아름다움을 한층 업그레이드 해주고, 더욱 사이가 돈독해진 파리스와 오이노네는 매일같이 뜨겁게 떡을 치며 끝나지 않는 신혼생활을 즐김


이후 파리스는 트로이 왕실에서 주관한 궁술 대회에 참가, 그러다 그를 알아본 국왕 부부가 파리스를 도로 궁정으로 데려가면서 오이노네도 함께 입궁하게 된다



문제는 그 다음에 터지게 되는데


어느날, 아버지 프리아모스의 명으로 스파르타 사절단을 인솔해 떠나게 된 파리스


원전대로 스파르타의 국왕 메넬라오스와 왕비 헬레네를 만나 인사를 나눈다


그리스 최고의 미녀인 헬레네를 보고 감탄한 파리스였지만, 이 버전의 파리스는 순정남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감정은 느끼지 않고 손님으로 정중하게 지내는데


이때 스파르타에는 이집트 국왕 프로테우스의 망나니 아들인 테오클리메노스가 함께 머물고 있었다


인성 파탄자였던 테오클리메노스는 자길 환대해 준 헬레네에게 역으로 흑심을 품었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은근슬쩍 가짜 이야기를 지어내서 똑똑한 파리스에게 꾀를 빌리는데


테오클리메노스의 속셈을 몰랐던 파리스는 별 생각 없이 기발한 계책을 하나 귀띔해준다. 


얼씨구나 싶었던 이집트 왕자는 곧장 헬레네를 납치해 이집트로 도주, 사태가 꼬이자 좆됨각이 씨게 선 파리스도 후다닥 트로이로 튀고 만다


아무리 모르고 도움을 주었다지만, 어쨌든 계책을 짜준 시점에 공범은 공범


이 사실이 들통나면 분노한 메넬라오스에 의해 파리스가 아니라 ㅍ/ㅏ/ㄹ/ㅣ/ㅅ/ㅡ가 될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기 때문



뒤늦게 헬레네의 납치 사실을 알아챈 메넬라오스는 재빨리 구출 작전을 준비하는데


목격자 증언을 교차 검증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파리스가 진범으로 몰리고 만다


황금 사과를 받지 못해 원한을 품은 헤라아테나가 몰래 술수를 쓴 것


그 탓에 그리스 원정군은 이집트를 놔두고 애꿎은 트로이를 조지러 출정


트로이 측에서 아무리 파리스의 결백을 주장해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여겨 콧방귀만 뀌었다


게다가 파리스의 아내 오이노네는 아프로디테의 축복 덕에 아주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했는데


이 정보가 와전되어 트로이 안에 헬레네가 있다는 헛소문이 퍼지면서 더더욱 트로이의 주장을 믿지 않게 된다



트로이는 최대한 분전하면서 그리스 연합군을 막아내지만 역부족이었고


총사령관이자 파리스의 든든한 뒷배였던 왕자 헥토르마저 아킬레우스의 손에 전사한다


양치기 출신이라 전쟁을 몰랐고, 또 유약한 면모도 있어 종종 트롤링을 한 파리스였지만 이를 계기로 각성 


자신의 여동생 폴릭세네와 밀회를 갖고 있던 아킬레우스를 독화살로 쏴 죽여 복수를 하고(폴릭세네 설화)


형 헥토르의 뒤를 이어 트로이군을 지휘하다가 이번에는 역으로 필록테테스의 독화살을 오른쪽 허벅지에 맞고 만다


다른 독도 아니고 영웅 헤라클레스마저 죽음으로 몰고간 히드라의 맹독이 묻은 화살이었으나


헥토르의 죽음으로 인해 분노와 죄책감이 가득했던 파리스는 전장을 떠나지 않고 계속 군을 지휘


그리스 군을 패퇴시키는데는 성공하나, 그만 치료의 골든 타임을 놓치고 만다



남편의 부상을 본 오이노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약초를 구해와 해독 작업을 하지만


이미 파리스의 오른쪽 다리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되돌릴 수가 없는 상태였고


결국 파리스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다리를 자르고 총사령관 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동생 데이포보스가 군대를 지휘하는 동안 파리스는 실의에 빠져 방에서 움직이지 않는데


늘 다정하고 유쾌하던 서방이 우울증에 걸리자 오이노네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일부러 그와 더 자주 잠자리를 가지면서 파리스를 위로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거듭함


가령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배운 '남편을 기쁘게 하는 체위'라던가, 사내들이 흥분하는 섹시한 복장이라던가, 남편이 좋아하는 플레이와 코스프레를 해준다던가


처음에는 아내의 헌신도 무시하며 자포자기한 파리스였지만, 외다리가 되었어도 좆은 평소보다 훨씬 멀쩡했으니


결국 이 좆의 힘으로 파리스는 우울증을 극복하고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허나 이미 대세는 그리스 연합군 쪽으로 기운 후였고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통해 트로이는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


파리스와 오이노네는 노예가 되어 비굴하게 사느니 차라리 동반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이때 트로이의 맹장이자 후일 로마의 시조가 되는 영웅, 아이네이아스가 개입해 두 부부를 구출


살아남은 트로이 난민들을 데리고 겨우 전쟁터를 탈출하는데 성공함


그러나 수 년에 걸친 피난길은 고행과 괴로움의 연속이었고, 특히 한쪽 다리가 없는 파리스에게는 더더욱 고역이었으니


남편의 고생을 슬프게 바라보던 오이노네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파리스의 고통을 덜어달라고 신들에게 기도를 올린다


아이네이아스의 어머니이자 파리스에게 황금 사과를 받은 아프로디테는 이 기도에 마음이 움직였고


남편이자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를 꼬드겨 성능 좋은 의족을 제작해 파리스에게 선물한다


아내 덕분에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파리스는 매우 기뻐하며 오이노네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아이네이아스가 로마의 전신인 라비니움을 건국한 이후, 부유한 대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



쓰다 보니 오이노네 망상이 아니라 파리스 망상이 된 것 같기도 한데, 트로이 전쟁이 소재다 보니 어쩔 수가 없다


사실 파리스가 헬레네를 데려간 게 아니라는 썰은 예전부터 의외로 많이 있었고


역사가 헤로도토스도 "트로이에 헬레네가 있었으면 헥토르가 죽었을 때 휴전하자고 내줬을 것"이라며 파리스의 납치설을 부인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각색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의식의 흐름대로 주루룩 써보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