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4대 대마술사. 앙그란트의 밤이자 그랑트라의 공포. 일곱 악덕의 친구. 마법사 뇌 미식가. 

꺼려져 마땅한, 순리를 거스른 전생자. 

동방의 마왕 파라본.

같은 칭호는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

제아무리 강대한 군왕이라도, 콧잔등에 서커펀치를 적중당하는 순간만큼은 겸허해지기 마련이다. 줄줄 흐르는 코피와 눈앞을 떠도는 별 앞에선 개념적 힘 따윈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법. 권력이나 재력따윈 폭력 앞에 무용하다. 그 앞에 남는 것은 고작 한 마리 생물 뿐이다.

참으로 현명한 교사인 폭력은, 기만의 덮개를 벗겨내고 영혼에 직접 속삭인다.  자아의 위치는 세상의 꼭대기가 아니라 비강과 안와골 뒤의 고깃덩어리 속임을.


그게 방금 내게 벌어진 일이었다. 자아 인식.

좀 더 교양 없게 말하면, 쥐어터져 쓰러졌다. 전생 스무살. 현생 200살. 도합 220살이나 처먹고 참으로 창피한 일이었다.



나는 울고 싶을 만큼 아픈 코를 감싸쥐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니까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지금 떠오르는 생각보다 더 적절한 해석이 있을 것이다. 방금 들은 것이 말 그대로라면, 파라본이라는 남자의 삶에서 너무 많은 부분이 무의미해져버린다.

고작 그것 뿐이라면, 여태 피땀 흘려 마력을 키우고 세력을 키운 의미가 증발한다. 부하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언젠가 마왕성의 패권을 쥐겠다고 약속한 일은 유치한 장난이 된다. 누가 순혈 악마 아니랄까봐 쓰레기같은 짓만 골라 하던 아바마마의 학대를 버텨낸 것도. 그의 왕좌를 결국 찬탈한 것도 다 헛수고가 되어버린다...

 

"네 방학 숙제 때문이라고?"
'이 똘빡년아?'

 

멍한 눈의 여자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투쟁의 종족 '천귀' 특유의 더벅머리가 펄럭였다. 똘망한 눈이 인상에 더해지니 꼭 큰 강아지 같았다. 만약 나 파라본이 개껌이라면 그 비유가 알맞게 완성될 것이다.


이미 성립했는지도 모른다. 몇 번 씹힌 것처럼 멍들고 부러졌으니.

그래. 천귀겠지. 다른 어느 종족이 넷 밖에 없는 대마술사 중 하나를 주먹으로 다져서 돈가스를 만들겠냐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리지 않은가. 많이 쳐줘야 열여섯쯤 될까.

정말 저 순박한 시골아이가 마왕을 거꾸러트렸단 말인가. 


"네가 이겼어. 승리의 대가로 내가 엄청난 비밀을 알려줄게."

 

"뭔데?"

 

빈둥대다 느슨해질 학생의 본분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준답시고!

고작 두 달 기한의 숙제로 마왕 토벌을 쥐어주는 아카데미 같은 건!

세상에! 없어! 이 빡통! 대! 가리! 년! 아!


나는 생각한 바를 그대로 전달했다. 물론 거친 부분을 마음 속 사포로 열심히 문지른 다음. 고작 그 정도의 소신에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천귀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짓말 같은데."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니?"

 

"여기까지 오는데 보름이 걸렸어. 돌아가는 길도 보름이 걸리겠지. 그럼 방학이 끝나."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네가 방학숙제로 어울리는 사냥감이 아니면, 난 죄적을 당할거야. 너여야만 해."

 

죽이고 싶은데 졌으니까 참는다.

 

몸이 훌륭해 뇌가 편안한 종족다운 사고의 흐름이었다. 대체 어떻게 달래어 돌려보내야 할까. 200년 평생의 지혜를 짜내어야 하는 국면.

 

"첫 번째. 죄적이 아니라 제적이야."

 

"토야 놀랐어. 너 천재야?"


"...네 이름이 토야니?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못 해보고 쥐어터졌구나."

평생의 지혜까진 필요 없을지도.


"두 번째. 네 방학이 끝나고 말고는, 내가 적절한 방학숙제인지의 여부와 아무 관련이 없어."

"토야 어려워."

"...내 목을 기껏 가져갔는데, 선생들이 이건 적절한 방학숙제가 아니라고 하면? 헛고생이 되겠지?"

"허어어어억."

"우선 방학 숙제로 선생들이 뭘 가져오라고 했는지부터 들려줄래? 그래야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아, 도와줄 거야? 엎드려. 살살 칠게."

 

씨알도 먹히지 않다니.

소녀는 두 손에 침을 퉷 뱉더니, 키의 두 배는 될 참수검을 쥐고 들어 올렸다.

칼이 만든 그늘이 목 언저리를 스치자, 어쩔 수 없이 부들거리기 시작하는 몸. 

 

침착하자. 나는 살아나갈 수 있다. 방학숙제 따위의 명분에 이번 생을 마감할 순 없다.


"목을 내놓기 전에, 선생들이 뭘 가져오라고 했는지부터 들려줄래?"

“목.”
"...아하. 선생들이 목을 가져오라고 했구나. 하지만 네게 숙제의 내용을 알려주실 땐, 그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시지 않았을까?"

소녀는 머리를 칼자루로 긁었다. 참수 대검의 칼끝에 스친 어전의 천장이 돌가루를 흘렸다.

돌가루는 그대로 소녀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보는 이를 암담하게 하는 무한동력.


"왜 듣고 싶은데?"
 

살고 싶으니까.
“네가 빠트린 게 있으면 짚어주려고.”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고, 품에서 잉크가 바랜 종이를 꺼내 읽었다.
 
“힘써 단련한 강함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물. 일 대 일 결투에 굴복한 상대의 신체 일부.”

 

"그래도 쓰고 읽을 줄은 아는구나. 검술? 아니면 무술 교실이니?"

 

소녀 토야는 경악과 찬탄을 담아 나를 노려보았다.

 

"너 누구야? 날 감시하고 있었어?"

 

그럼 그런 흉흉한 방학숙제를 백마술 교실에서 내겠니. 신학 교실에서 내겠니.


“뒷조사같은 걸 따로 한 게 아니니 안심해. 아예고락스 아카데미 학생이니?”


소녀는 쩔그렁거리는 메달을 자랑스럽게 들어보였다. 메달엔 내가 튀긴 피가 점점이 묻어있었다.


그래. 자랑스럽겠구나.


"우선 나는 네 방학숙제가 되어줄 수 없어. 우리의 싸움은 일대 일이 아니었으니까."
 

나와 비슷한 몰골로 엎어진 근위병들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들이 뭘 잘했다고 끄덕이고 앉아있는 것인가.


소녀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대 일로 만들면 되잖아. 토야 똑똑해. 개수작을 간파했어."

"음?"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


두 대는 안된다. 두 대는 안 된다. 날 때려죽이는 한이 있어도 두 대는 안된다. 저절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모순적인 절규.


내일 진상품을 어전으로 끌고 온 용인들을 마주하는 것은, 마왕 파라본이 아니라 파라본 돈가스일 것이다. 참. 목이 없으니 알아보지도 못하겠군.

쥐새끼도 위기에 몰리면 천재가 된다고 했던가. 문득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그리고 일대 일이더라도, 학우는 사냥감이 아니야." 

"학우?"

"나도 아예고락스 아카데미 학생이야."



 

 

 

"그런 사유로 묻겠다. 필멸자 마법사. 그 토야라는 녀석. 몇 학년이냐?"


교수들은 대답 대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4학년 마술 교실의 에브라니 교수는, 한숨을 쉬며 먼저 입을 떼었다.
 
"그건 왜 묻니, '본'?"

"이미 말해줬는데. 나는 마지레코드가 아니다."


"물론 너는 마나로 작동하는 녹음장치가 아니지. 우리 학생이잖니."


"다시 말해주지 않겠다는 말이다. 에브라임."


"교수님의 직함을 생략하고 이름으로 부르는 학생이, 저학년 학생에게 무슨 짓을 할지 심히 걱정이 되는구나."


위대한 아예고락스 아카데미의 엄격한 선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엇나가는 아이는 생기기 마련이다.

교수진을 향해 튀어나온 쭉정이의 결말은 대개 정해져 있다. 불명예 퇴학. 아예고락스의 최대 후원자인 여섯 왕가의 직계가 아닌 한 피해갈 수 없는 처분.


그러니 지금 이 징계수위 재판은, 그런 최악의 경우를 코앞에 두고 되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분기점이었다.


그렇기에, 에브라니는 부디 눈 앞의 학생이 지금이라도 현명하게 굴길 바랬다.

출신불명의 소년이 아예고락스의 1학년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했어야만 하는 종류의 일이다. 왕자지재의 교육을 받은 경쟁자들이 즐비하니까.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불가능했어야' 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 자리에 있는 '본'이 그것을 해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은 지금 그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려 들고 있었다. 계속해서 독특함을 더해가는 방식으로.



본이 교무 재판장의 문을 손짓으로 닫았을 때, 마법학 교수들은 학파를 막론하고 건방지다며 고함을 질렀다.


본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나가는 문이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 마법학 교수들은 내심 감동했다.
'1학년이 저렇게 완벽한 환상을 다루는 건 처음 보네요. 맞습니다. 멋진 재능이군요. 교육자로서 원칙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 아쉬울 지경입니다...'


광명학파와 환상학파 교수들은 감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포에 질렸다.
'저거 환상 아닌데요.'

"천귀가 뭔지는 알고 있겠지. 쇳물로 엄마 젖을 대신하고, 태교를 포로의 비명으로 듣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종족. 아니. 몰라도 상관없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교수진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본은 오페라의 지휘자처럼 손을 휘저었다. 


"내 요구사항은 우선... 월반과 문서 위조. 천귀는 기만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내가 선배라고 말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벽이 뒤틀리고 바닥이 뒤집혔다. 바닥에 고정된 고풍스러운 재판석은, 이제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 무더기처럼 보였다. 


"내가 오래 전에 이 학원에 다니고 있었던 걸로 꾸미란 말이다. 다른 학생이나 교사들이 납득하고 말고는 내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야. 방법은 너희가 생각해라. 생각해내지 못하면..."

중력이 역전된 방. 바닥이 천장이 되었다면, 천장은 바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떨어질 경우 그들을 맞이해줄 것은 운동 에너지를 골통에 되돌려줄 대리석 부조가 아니라, 황천의 들끓는 틈새 속에서 아우성치는 붉은 촉수 무더기였다.

교수들은 속절없이 비명을 지르며 의자를 붙잡았다. 허공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사람 열매들을, 징계대상자 소년은 만족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교수들은 깨달았다. 이제 수인으로 주문을 그려 반격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소년이 이마 위로 손바닥을 스치자, 마왕을 상징하는 아름드리 붉은 뿔이 형상을 드러났다. 에브라니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본색을 드러낸 파라본이 입매를 구겼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자백할 시간 딱 십 초 주겠다. 어떤 새끼가 감히 천귀를 내 궁궐에 집어넣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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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대로 쓴 이후의 시나리오

월반과 문서위조로 고학년의 지위를 손에 넣은 파라본은
사실은 아무도 해치지 못하는 심성의 버려진 천귀 소녀 토야가
자신의 콧등을 내려앉힐 정도의 용기를 짜내서라도 인정받고 싶어했음을 알게 된다

파라본은 자신을 의심해 뒤를 캐는 학우를 역관광하고,
반격의 엄두도 못 내는 토야를 괴롭히는 여섯 왕국의 자손들을 참교육.
파견실습을 통해 왕국의 위기를 해결하거나,
방학을 틈탄 모험에서 토야의 부모를 되찾아주기도.
급기야 아카데미의 추천으로 용사 파티에 끼어 또다른 마왕의 부활을 저지하기까지.

대륙에 남은 유일한 천귀로서 뭇 왕국의 무기로 이용당할 뻔한 토야는 파라본의 도움으로 삶의 주권을 되찾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파라본은 험난한 반정의 삶 속에서 느껴보지 못한 소년다운 추억을 누린다.

5년 뒤 아카데미의 인맥으로 마왕성의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된 파라본은
아카데미를 훌륭하게 수료하고 성인이 된 토야에게 프로포즈를 받지만
친동생 같다고 거절했다가 개같이 따먹히고 외가로 납치되는데 그 후는 상상에 맡기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