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녀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은 사내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왕국의 기사이자 미래의 마스터 후보인 남자.

그리고, 황녀가 짝사랑하였고 청혼까지 했던 사람.

그런 황녀의 고백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매정하게 차버린 이.


"정말로 어이가 없네요. 제가 왜 부탁을 들어드려야하죠?"


사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 아무것도 모르던 가문의 아이들만큼은 살아남을 수 있기를,

자신의 앞에 있는 황녀가 연민을 느껴 자비를 베풀기를 바랄 뿐.


"하. 가주와 그 가문의 어른들의 죄는 아는 모양이라 다행이네요.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제게 뭘 해주실 수 있죠?"


"그 아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황녀는 옆에 있던 잔을 들어 그곳에 와인을 채웠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머리 위에 끼얹으며 말했다.


"매우 굴욕적이네요."


"..."


"사랑을 위해서 저를 차버렸던 당신이. 그렇게 쉽게 굽히다니."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그의 앞을 서성이며 말했다.


"당신의 그 고결함과 꿋꿋함, 강한 의지를 사랑했었는데.

당신의 사랑은 가문을 위해서라면 버릴 수 있는 그런 돌멩이 같은 거였다니!

그런 사내를 사랑했다는걸 알게 되서 역겨워요!"


"가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말대꾸를...!"


그를 걷어차기 위해 돌아본 황녀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녀가 사랑했던 그 모습이 담긴 눈동자.

그녀는 그것을 보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제 가문은 이제 대역죄인의 가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문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던 아이들.

그 아이들만큼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 잘나셨네요 정말로. 그게 사랑보다 중요한가요?"


"저는 가문의 어른들이 죄를 짓고 있는걸 막지 못한 죄인입니다.

그런 저는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도 없고, 제게 가문의 이름이 있는 이상...

그녀를 사랑하는 것조차 그녀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기했다... 뭐, 좋아요. 이해는 해드리죠.

하지만 그렇게 가치도 없는 당신의 부탁을 제가 왜 들어드려야하죠?

당신 말대로 당신은 죄인이고 더는 쓸모가 없...진 않군요.

좋아요, 당신의 소원대로 가문의 아이들은 황궁에서 시종으로 거두겠어요."


"황은이 망극합니다."


사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바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명령을 내리겠어요."


"예, 저하. 하명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은 마스터 후보. 가문이 없더라도 귀족에 준하는 직위입니다.

또한 그런 훌륭한 핏줄을 남기기 위해... '첩'을 둘 수 있죠."


황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떤 부탁인지 예상한 그의 표정에 절망이 드리워졌고,

그녀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저하, 그것은...."


"명령입니다. 제가 가문을 지정하면, 그 가문의 여식을 품에 안으세요.

그리고, 그녀들을 첩으로 삼아 새로운 가문을 여세요."


"...뜻대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그의 모습을 본 황녀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지만,

이미 고개를 숙인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황녀가 말했다.


"누굴 안아야할지는 내일 알려주겠습니다. 오늘은 쉬고 내일 찾아오세요.

쉴 곳은 시종장에게 물어보면 알려줄겁니다."


"네, 저하."


그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그녀는 탁자 위의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최근 세를 늘려가고 있던 두 가문에 대한 보고서였다.

원래는 '말살' 목표에 대한 보고서였던 그것은 이제 새로운 것이 되었다.


'저도 이젠 잘 모르겠네요....'


원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명령을 내려 말살시킬 생각이었다.

죽어가는 그의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는 가문도, 사랑도 잃어버린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고결함에 다시 사랑을 느끼고 말았다.


'그에게는 미안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자그마한 빈 종이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보고서에 있던 두 가문, 그곳에 있는 여식들의 이름.

그 밑에는 불에 비쳐야 보이는 잉크로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을.

그리고.


'됐다.'


조건을 달성해야 볼 수 있는 마력 잉크를 사용해 마지막 이름을 적었다.


'언젠간 이걸 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황녀이자,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