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삘받음


영웅은 퇴고따윈 안한다네




결전의 서막이 오르고 패색이 짙어지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질적으로 밀린다 해도 반 제국 동맹군이 이번 대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믿었다.

 

부우 - 부우우 -

 

퇴각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전장을 가로지르며 병사들의 등을 떠민다. 지휘부의 명령은 풍전등화 같던 사기를 가차 없이 난도질하고야 말았다. 대열은 흐트러지고 군기는 시시각각 기울어가는 전세에 짓밟혔다.

 

“에드가!”

 

나와 같이 우익을 맡고 있던 융에 (전)소대장. 그녀의 지쳐가는 목소리가 주의를 환기해 시선을 돌렸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날아드는 마법 폭격.

흩날리는 시체조각.

기세를 타고 돌격해오는 제국군까지.

 

전장 한가운데서 퇴각을 알리는 융에, 그녀의 실루엣만 홍채에 어렴풋이 흐릴 뿐이다.

 

사람은 죽을 위기에 처하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다고 했던가.

 

의식을 흘려보내는 중에도 다리 만큼은 제 주인을 살리겠다고 발버둥친다. 하반신과 합이 맞지 않아 순간 중심을 잃을 뻔했다.

 

꼴사납다.

 

분명히 각오를 하고 전투에 임했건만…

 

“우린 이제 좇됐어….”

“어머니….”

 

그럼에도 생의 의지는 구차함도 아랑곳 않으며 내 등허리에 채찍을 갈겼다. 하지만 찢어질 것 같은 다리도, 2차 후퇴지점에서 들려오는 절망의 통곡도 내 가슴을 쑤시는 쓰라림을 파묻지는 못했다.

 

“에드가 대장님….”

 

부상자들 사이를 비비적거리며 다가온 융에의 얼굴은 피로와 걱정으로 절어 있었다. 모든 것이 이제 끝이라고, 마지막 보루마저 함락되면 전 대륙이 제국의 압제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다행히도 제국군 또한 언덕 아래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 지금 스러져가는 희망을 가다듬으면 지형의 우세를 안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반 제국 독립군이 가장 잘 하는 것. 버티고 버텨서 적의 심장에 비수를 찔러 넣는 끈기는 이정도로 꺾일 것이 아니다.

 

“제 3보병대는 들어라!”

 

각혈이 끓고 쓰라린 목구멍에서 고함을 토해내자 모두의 이목이 나를 향해 꽂혔다.

 

“우리는 오래도록 제국의 횡포에 시달려왔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무기를 들었다!”

 

사뭇 강조해 말한 두번째 ‘우리’.

 

점증적으로 고조되어가는 내 목소리에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한다. 방패를 다시 들고, 검을 집고, 독립군기를 바로잡았다.

 

“우리 독립군은 괴멸당할 수도 있다. 당장 옆에 있는 친구가 세계를 달리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운다.”

 

제국군의 정비 속도를 확인하기 위해 언덕 아래로 시선을 슬쩍 던지고는 다시 연설을 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친구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울 것이다! 제 3 보병대 전열 재정비!”

 

 - 부우우우웅

 

때맞춰 울린 긴 호흡의 나팔 소리. 낮고도 깊은 음색이 맞닿은 어깨 사이로 스며들며 쓰러져가는 정신을 맑게 물들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왼발 옆에 왼발. 오와 열을 맞춰서 다가오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성령에게 홀린 듯, 혹은 전사자의 영혼에 홀린 듯, 모두가 숙연한 얼굴로 전장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아군 좌익과 우익은 이미 패퇴하여 고립된 상황. 하지만 어쩌겠는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반원 형태로 방진을 구축하는 것이 최선이다.

 

“제국 오합지졸이 몰려온다! 방패 앞으로!”

 

50미터.

 

20미터.

 

두 번째 접전의 시작이다.

아니, 시작이었을 터였다.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평원을 뒤흔드는 것도 잠시, 기이한 소리가 양측의 무력행동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 바아아아~. 바아아~.

 

산양의 울음소리를 상기시키는 이상한 소리에 양 측 모두 소리의 근원지에 주목했다.

 

일개 대대가 늘어설 수 있는 평야의 어귀. 양 끝단에 울창한 숲이 자라나 흡사 거대한 문처럼 보이는 곳에 먼지가 일어나고 있다.

 

“이건 제국군 나팔 소리가 아니야.”

 

주변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 것도 이어지는 괴성에 끊겼다.

 

 - 구워어어어!

 

먼지가 걷히기 무섭게 뚫고 나온 폭음.

 

선두에 선 붉은 곰의 포효를 시작으로 털코트를 입은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나타난 군중의 중진에는 충격군 역할을 맡은 붉은 곰 기수 무리가, 그 양익에는 산양기병들이 속속들이 발굽을 맞추었다.

 

“오오오오! 원군이다!”

“와아아! 이젠 살았어!”

 

기쁨에 겨워 서로를 마주보고 함성을 지르는 병사들이 눈 앞을 메웠다. 그리고 그 시야 끝에 미소짓고 있는 융에의 얼굴이 살갑다. 상처는 물론, 피범벅인 얼굴에 피어오른 환희.

 

“안톤 세르게예비치. 개자식…. 왜 이렇게 늦었어.”

 

이윽고 늦봄 아침의 바람처럼 희미하던 미소가 모두에게 번진다. 더 크게. 어느새 모두의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야 말았다. 잘 들리진 않지만 안톤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이 있을리가 있나.

 

[… 짜리나 달 쁘리까쓰! … 스트룔끼 … 아고인!]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가 평원을 구르는 것도 잠시, 더 큰 우레소리가 덮쳤다.

 

“아아악!”

“어억!”

“양면전선이다! 재정비해!”

 

반전된 상황에 내려진 새 명령을 들어먹을 리가 있나. 장교의 다급한 외침은 제국군 방진이 연주하는 비명소리에 묻혔다. 

 

이윽고 그 원인이 기병대 양익의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선지를 상기하는 희뿌연 안개가 유유히 숲속에서 피어오른다.

 

북부 여제의 정예 화승총병들의 일제사격이 만들어낸 장관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북방의 전사들과 함께 마수토벌을 한 뒤로 겨울이 여러 번 지났었다. 죽기 전에 다시 한번 그 위용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일제사격이 끝나고 뒤이어 이어진 함성이 기병대의 돌격을 지시했다.

 

[그바르디야! 아따-구! 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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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의 구르는 천둥이 제국군의 방진을 덮치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패주해 달아났던 아군 좌익과 중군도 스멀스멀 기어와 합세해 제국군에 맞섰다.

 

“에드가 대장님! 좌익으로부터 전서구가 왔습니다.”

 

융에가 한쪽만 남은 팔로 비둘기를 품에 안고 달려왔다. 비둘기의 다리에 매어 놓은 작은 쪽지. 그녀가 헐떡이는 사이 쪽지를 빼 들어 폈다.

 

[좌익 위험.]

 

아직도 부족한가.

 

쉽사리 풀리지 않는 전황에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분명히 북부 여제의 군대도 가세했고 아군도 합류했건만 전력차가 좁혀지지 않는다.

 

제국의 정예 중에 정예들만 모여 있다는 황제 직속군이다.

 

애초에 잘해도 분전, 패배하면 괴멸인 전투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힘들다. 좌익은 다시 붕괴 위기에 나머지는 어거지로 전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전부.

 

 - 바아아아~.

 

저 소리는 후퇴를 알리는 양뿔피리 소리다.

 

“북부군도 이제 한계인건가….”

 

맥없이 떨어지는 내 목소리에 융에 마저도 눈을 아래로 떨구었다. 좋은 수가 없을까 궁리하면서 전선을 살펴보다가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뇌를 절이는 감각이 들었다.

 

“아니야. 아직 늦지 않았다. 융에. 정예 머스킷티어들을 차출해.”

“그러면 아군 중진은….”

 

상관의 명령이니 따르긴 하겠지만 의문을 지울 수 없다는 표정.

 

“저기 봐. 중진은 아직 살아있어. 우리 쪽에는 공세가 덜하니 북부군과 교전중인 적을 저격해서 와해하고 샌드위치를 만든다.”

 

척하면 척이다.

 

“하긴…. 우익은 방진 유지만 할 병력이면 되겠네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영영 못 볼 줄 알았던 부하를 다시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그녀만큼 믿음직스러운 부관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과거에 함께 싸웠을 때처럼 지금도 내 오른팔이 되어 싸워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맙다.

 

“융에!”

“네?”

 

갈색 머리카락이 노을을 받아 아름다운 빛을 흘린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더 내릴 명령이 있는지 살피는 그 눈이 사랑스럽다.

 

“아니야. 계속해. 우리는 우익 끝에 있는 숲으로 간다.”

 

간략한 경례를 하고 명령을 하달하러 그녀가 사람들 틈바구니로 사라지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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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시점)


 

머리가 어지럽다.

 

갑주를 입은 곰에서 떨어지는건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는데….

 

오랜 전투로 피로해진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나니 문득 드는 생각.

 

칼린카.

 

그녀의 이름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칼린카아-!”

 

“안톤!”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작지만 또렷이 들리는 소리.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는 함성에 메아리처럼 즉각 돌아온 목소리. 흙먼지와 피딱지가 들어찬 귓구멍에 그 목소리 만큼은 확실히 들린다.

 

상당히 멀리 떨어져버린 것인가.

 

“으그극. 커헉! 쑤카.”

 

일어서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한 손은 땅바닥에, 한 손은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넌 미샤의 어깨 위에.

 

못난 주인을 섬기게 해서 미안하구나.

 

북방에서는 누군가 죽으면 가장 친한 자의 심장에 깃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것인가.

 

상실감.

 

그리고 허탈함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미안한 감정이 실린 날숨이 귀를 타고 오른다. 전장에서 이게 무슨 꼬락서니란 말인가.

 

그리고 불현듯 시야에 손이 불쑥 나타났다.

 

“안톤 세르게예비치.”

 

그 팔을 타고 올라간 시선은 나를 짐짓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토바리쉬 에드가….”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의 손을 부여잡고 힘겨운 몸뚱어리를 일으켜 세울 뿐.

 

“도와주러 왔…다.”

 

감사의 말을 하려고 그를 바라보았으나, 말을 흘린 에드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노을 빛이 지고 반짝이는 별들이 수 놓인 밤하늘이 그의 주의를 붙들어 놓은 것이다.

 

그의 쳐올려진 시선을 따라 함께하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커다란 고깔모자.

몸매가 드러나는 남색 드레스.

그리고 대충 깎아내린 나무 빗자루.

 

선정적인 옷차림을 하고 빗자루에 걸터앉은 마녀가 날아와 사뿐히 착륙했다.

 

그리고 방금까지 쓰고 있던 고글을 벗은 그녀에게 에드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선생님….”

“왜, 나 보고싶었어?”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검지로 에드가의 턱을 끌어당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 바보제자.”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마녀에게 에드가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벙 찐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을 뿐. 그 둘의 재회를 보고 있으니 옆구리에 팔이 쑥 들어왔다.

 

“토바리쉬 안톤. 저한테 기대세요.”

 

칼린카의 숨결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묘한 분위기를 흘리는 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조금 더 일찍 오실 수 있었잖아요.”

“뭐 제국 마도사들 방공망에 벌집이 되라고?”

“저는…!”

 

갑작스러운 접문(接吻).

 

시끄럽다는 듯이 항변하는 에드가의 입을 막아버렸다.

 

하지만 놀란 것은 나와 에드가 둘 만은 아니었다. 그의 부관 여성이 입을 벌린 채 경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옆에서 들려온 달콤한 미음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저런거… 해줘? 안톤?”

 

칼린카의 유혹을 떨쳐내고 바로 섰다.

 

그리고 보았다.

 

하늘을 뒤덮은 고깔모자와 빗자루들이 밝게 빛나는 호박폭탄을 제국군 머리에 떨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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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I also 공.군.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