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크헉!"


 푸욱!


 검붉은 날이 내 머리를 꿰뚫는다. 뇌가 타들어가는 고통. 피가 들끓는 이 불쾌감. 그럼에도 내 정신은 무너지지 않는다. 내 몸은 다시 일어나 자세를 잡는다. 그게 약속이었으니.

 검을 붙들고 앞을 바라본다. 한 남자가 그곳에 서있다. 온통 검은 코트에 불길한 암적색 기운을 가득 머금은 검. 근 2시간 반동안 나를 120번 이상 꿰뚫은 검. 다리가 떨린다.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갈 것만 같다.


 "후우."


 이게 모두 꿈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 고통만큼은 진짜이기에,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일의 시작은 몇 달전,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 * * * *


 세상의 끝.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야 위를 가득 메운 녹슨 검들. 바닥을 타고 흐르는 피와 타오르는 불길. 검의 그림자에 비치는 사람들의 최후. 그리고 바라보는 것 만으로 정신이 무너져버릴 것 같은 하늘.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끝임을. 이 광경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면, 무엇이 세상의 끝일 수 있겠는가. 동시에, 나는 나를 바라보는 붉은 시선과 눈이 마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허억, 허억."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잠든 기숙사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이 모두 꿈이었음을. 나는 불쾌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일어나 세수를 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 오른쪽 눈동자는,


 "빨....간색...?"


 꿈에서 본 그 불길한 붉은 시선을 닮아있었다. 내가 눈의 변화를 인식한 그 순간 내 오른쪽 눈에 하나의 광경이 들어왔다. 그곳에는 온통 검게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것이 나와 그의 첫 만남이었다.


 [....사실이었군.]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말도 안되는 재능으로 어떻게 '관측'을?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 알 수가 없군.]


 그가 내 재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내가 본 꿈이 결코 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장 내 비루한 재능의 육체가. 오른쪽 눈의 '신비'를 견디지 못해 피눈물이 터져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소년. 잘 들어라. 네가 본 그 광경은 꿈이 아니다. 당장 이대로 가면 그 광경이 펼쳐질 거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네가 고생해줘야겠군.]

 "ㄴ, 네?"

 [네가 구원자가 되어줘야겠어.]


 다짜고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내게 늘어놓던 그는, 손을 뻗어 오른쪽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크, 으윽.... 끄아아아악!!!!!"


 엄청난 고통이 눈에서 느껴졌다. 검이 눈을 뚫고 나오는 듯한 고통.


 "아, 으아, 으그가각."


 온몸의 신경세포가 망가져버릴 듯한 고통이, 뇌가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고통이 끝나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비친 환영이 더이상 환영이 아니게 되었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흙의 감촉. 분명 나무판자였을 터인 그것이, 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바닥에 검을 꽂아넣고 그 위에 불을 피워올린 그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되살아나는 고통에 나는 뒷걸음질쳤다. 그는 그런 나를 신경쓰지 않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오늘부터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 이 세계의 명운이 너의 손에 달려있으니.]


 바로 앞에서 말함에도 울리는 듯 들려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그가 말하는 바를 흐트리는 것 같았다. 뭐? 내가 구원자?

 그는 한 자루의 검을 뽑아 내 앞에 던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검을 뽑아 내게 겨누었다.


 [확인해 본 바, 너의 재능은 내가 본 누구보다도 평범하다. 육체적 재능, 지적 재능, 마력에 대한 재능 마저도 평균. 하지만 마력의 양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것이 흠.]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의 구원자라는 말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애초에 이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당장 눈에서 느껴지던 고통마저도 사그라진 상태이니.


 [하지만 괜찮다. 오늘부터 너는 영웅이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터이니.]


 무슨 개소리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던 내가 검을 들어올리는 순간, 그가 내게 달려들었다.


 촤악!


 그가 들고 있던 검붉은 검이 내 목을 쳤고, 나는 시야가 빠르게 회전하며 내 몸의 목 위가 텅 빈 채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죽었다는 사실. 이 두 가지에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내게 누군가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앞으로 세계에 영향을 주는 거대한 사건들. 죽어서는 안될 사람들과 죽여야 할 사람들. 최종적으로 쓰러뜨려야 할 적과 세계에서 암약하는 무리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알 수 없을 지식들이, 마치 전지적 관점으로 이 세계를 돌아본 사람의 것처럼 해석된 지식들이 내 머릿속에 박혔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누군가는 굶주림에, 누군가는 추위에, 더위에, 악의에. 하나하나, 순간마다 반복되는 선택들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비극적인 결말들이. 아. 나는 깨달았다. 이 세계의 누구도 이런 지식을 가질 수 없고, 누구도 이 비극을 바꿀 수 없다. 오직 모든 것을 알게 된 나만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일'이 벌어졌을 때, 나는 자살하겠다고 생각했다. 내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 삶의 의미는, 오늘, 바로 이 순간, 이 사실을 알고 세상을 구하는 것이 되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눈을 떴다. 내 목은 아직 몸에 붙어있었다. 하지만 내 몸에서 흩뿌려진 피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죽었다가 살아난 거구나.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 사내의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자세를 잡았다. 그가 나를 죽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순한 기억의 전달이 아닌 수련.

 한 번 죽었다 살아나며 이 세계가 꿈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나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일천한 재능. 하지만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줄 환경.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스킬.


 '스러지지 않는'.


 세상 모두가 신에게 부여받는 이능인 스킬. 많은 스킬이 있지만 그 중 내 것은 특별하다.

 죽어도 일어날 수 있다. 내 정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망가지지 않는다.


 나는 생각했다. 태양은 커녕 장작조차 되지 못하는 미천한 잿불. 그렇기에 나는, 의미를 바란다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겠다면. 그 또한 좋은 방법이겠지. 나의 사명은 너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 그 뿐이니까.]


 그의 무릎이 굽혀지고, 몸이 앞으로 쏠린다. 그리고 발사되듯, 빠른 속도로 나에게 날아온다.

 재능이 없는 이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 그 과정은 간단하다. 그를 무수히 죽이고 죽여, 그 모든 대응책을 몸에 새긴다.


 그렇게 나의 70000하고 2400번의 죽음이 시작되었다.


 * * * * *


 그가 잠에서 깨어나면 사내는 혼자 남아 황야에 앉아있는다. 사내는 생각했다. 소년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스스로에게 의미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타인에게 넘길 수 없었을 뿐.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도, 그 과업을 타인에게 넘길 수 있을 만큼 그는 모질지 못했다.

 사내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너도, 그리고 나도. 끝이 머지 않았군."


 그의 죄에 마땅한 대가를 치르는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