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7일,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키드모가 갑작스럽게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잠적했다.


야짤 일러스트레이터로 데뷔해 인지도를 쌓으며 막 시작한 유튜브는 얼마 안 되어 10만을 넘기는 등,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로 자리매김하던 그였기에 그의 실종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헬조선 딸통법 때문에 끌려갔다느니, 야짤계 손 털고 양지로 넘어가려 한다는 둥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으나, 


2022년에 밝혀진 사실은 그가 고작 웹하드 하나에 올라간 자기 그림의 저작권을 주장한 일로 고발을 당해 조사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키드모는 엄연히 성인 일러스트레이터였고, 대한민국은 법률상 음란물 제작과 배포를 엄연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체포되었다.


더군다나 이 일로 키드모가 과거 했던 탈세 의혹과 취준생 비하 발언은 2030세대에게, 


즉 그의 주 고객층이 그에게 갖는 감정에 상당한 악영향을 주었고, 그가 복귀한다 한들 이런 발언으로 인해 그를 향한 시선은 고울 수 없다.


2030 세대 중에서 취업으로 고민하고, 월급의 절반 가까이가 세금으로 날아간 것을 보며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해골좌와 NDGD같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선례를 안다. 


이들 모두 주 고객층을 비난하다 뭇매를 맞고 잠깐이지만 큰 손해를 보았으나, 


지금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이름을 날리며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다.


사회화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사회에 복종하도록 가르친다는 점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웃을 사랑해라, 사람들에게 잘 보여라, 남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 법을 지켜라.. 


이런 가르침들 전부 니미개잡부랄씹소리다. 


현실은 개새끼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축구선수들이 지금도 축구판에서 수십억대 주급을 벌어들이고, 


노동자를 가축처럼 다루었던 기업가들은 가문 단위로 부를 쌓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재산을 축적했다. 


수십억대 사기를 친 사람들은 3년 미만의 형을 받고 출소해 번화가에 건물을 사고 한 달에 1억이 넘는 임대료를 받으며 떵떵거린다. 


멀리 갈 것 없이, 친일파들의 후손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보면 감이 온다. 


평판은 사회적으로 플러스요인이 될 순 있겠으나, 개인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빌 게이츠의 경우에도 그렇다. 그는 뛰어난 개발자이긴 했으나, 코딩만으로 천재라고 불리긴 어려웠다. 


그도 그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주제를 알고 포기하는 대신 천재적인 개발자들의 아이디어를 모방했다.


 모방이라고 하기도 어폐가 있는 게, 그냥 대놓고 배꼈다. 


게이츠의 IBM과 계약을 맺어 탄생한 MS DOS는 킬달의 CP/M을 거의 그대로 배낀 채로 출시됬고, 


게이츠는 이 일로 IT계의 거물로 급부상했으나 킬달은 내리막을 걷다 불우한 말년을 끝으로 1994년 싸구려 술집에서 뒤로 넘어지면서 생긴 출혈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이후로도 게이츠를 향한 온갖 악평과 비난이 폭주했지만 그의 마이크로소프트는 그가 은퇴할 때 까지,


 은퇴하고 난 후인 지금도 업계 부동의 1위를 지키면서 가늠하기 어려운 수익을 내고 있으며 


은퇴 이후 게이츠는 자선사업가로 변신하여 그간 쌓았던 악평을 천천히 지워나가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캬루의 예를 들어보자.


캬루는 배신자다. 


그런데 왜 배신자는 욕을 먹을까?


 배신자란 국가의 통치에 반하고 원그룹과 적대 관계의 그룹에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여 궁극적으로 원그룹에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종자다.


캬루 자신은 그룹에 중요한 위치면서(미식전 창립인사) 성공하는 순간 적대 그룹에서 두터운 이익을 볼 수 있는 데다 


캬루의 선례를 보고 다른 이들도 덩달아 배신하면 원그룹은 적대 그룹에게 패배하거나 먹힐 가능성이 커지는, 말하자면 사회의 위험 분자인 셈이다.


사회는 자신에게 거스르는 위험 분자를 좋아하지 않고, 


그렇기에 사람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내보이는 대신 복종하도록 교육한다. 


만약 어느 사람이 군중을 호도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면, 그가 그것을 사용할 경우 국가 전체가 분열될 가능성이 있고,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사례처럼 국가가 극단주의로 향하게 될 것이다.


교육은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 존재하고, 그러므로 민족주의와 더불어 통치의 기술 중 가장 기초에 속한다. 


중국이 왜 왕조가 바뀔 때마다 이전 문화와 교육을 그렇게 탄압했는지(심지어 빨갱이들도 그랬다), 


정복자들은 왜 항상 피지배민의 문화를 탄압했는지, 일본이 왜 기를 쓰면서 한국어를 말살하려 했는지 이제는 알 수 있다.


한 나라의 교육은 결국 그 나라의 국민 통치를 수월히 하기 위함이고, 


문자와 문화는 그 교육이 밑바탕이 되어 만들어지는 민족주의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부족 단위에서 마을, 산업 혁명으로 진행된 도시화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국민을 더 수월히 통치할 수 있느냐는 지배층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그 방법 중 하나로 고안된 것이 평판이다.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을 할 것과 어떤 규범 양식에 속할 것을 요구한 다음에 그 틀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고립시켜 사실상 그 행동을 강제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사회가 무난히 존속될 수 있게 만들었다.


~인 사람은 ~~해야 된다/하면 안 된다. 


부자는 기부해야만 한다. 카스트에 맞는 사람들과 어울려야만 한다. 사회 신용 점수가 낮은 사람과는 어울리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평판의 기본이다.


평판이 가장 극단적으로 발전된 사례로 중국의 소셜 크레딧이 있다. 


사회에 좋은 행동을 하면, 소셜 크레딧이 증가한다. 


소셜 크레딧이 증가하면 취업과 여행 등에 각종 혜택이 증가하고 공산당에 가입할 수도 있다. 


반면 사회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소셜 크레딧이 떨어지고, 소셜 크레딧이 일정 이상 떨어지면 각종 불이익은 물론이고 심하면 여행과 취업에서마저 불이익을 겪는다. 


평판은 이처럼 사회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틀로써 기능하고 있다.


굳이 중국을 사례로 들지 않아도 각종 SNS의 좋아요, 팔로우 수, 아카라이브의 악질적인 개추/비추 시스템도 우리가 얼마나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는 쉽게 보인다.


우리가 노피아에서 작품을 고를 때 각종 수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하꼬 작가들이 저조한 조회수와 박한 평가에 폐사하는 것도 평판이 얼마나 개인에게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뉴스에 올라오는 살인 사건과 부실 건축으로 인한 건물 붕괴, 범법 등의 '반사회적'행위에 우리는 분노한다. 범죄자를 사형해라, 촉법소년을 가둬라, 사기꾼에게 100년형을 내려라.


그러나 이러한 구호 모두 죄를 저지른 개인을 파멸시켜 똑같은 사람의 동일한 행위를 막을 순 있겠지만 다른 사람이 같은 종류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예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빈번한 사기와 촉법소년의 일탈 문제, 증가하는 범죄율은 사회 현상이자 흐름인데, 그 물결에 쓸려오는 굵직한 돌조각 몇 개를 걷어낸다고 해서 물결이 멈추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해병대에서 올라오는 믿기 어려운 사례들을 통칭해서 '해병 비문학'이라고 하는데, 해병대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에 근거하여 해병대 전체의 수준을 비난하는 단어다.


신병을 관물대에 '보관'하는 '해병 오도세자', 해병대 전설의 시작이자 아쎄이의 '악기'를 기르는 '악기바리',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해병 언더더씨' 등등...


무적 해병은 군대. 용사들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면 기열 싸제 평판은 신경쓰지 않고, 대신 국가 전투 역량 강화를 위한 특훈에 돌입한다.


'해병 오도세자'는 전시 시 적군의 고문(실제로 일본은 독립운동가들을 사각형 우리에 가두어 고문했다)에 연약한 아쎄이가 굴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훈련이고,


'악기바리'는 당장 내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전쟁에 대비하여 오도해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약한 아쎄이에게 떡 하나 더 챙겨주는 것에 가까우며,


'해병 언더더씨'는 다소 과격한 방법이었으나 원 목적은 포로로 잡힌 아쎄이들이 적의 언어고문에 함락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전장에서 등을 맞대는'이란 관용구가 있다. 이는 전쟁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전우를 신뢰한다는 뜻이고, 마찬가지로 해병대 또한 '전장에서 살을 맞대는'관계를 개발하기 위해 전우애를 실시하는 것이지, 절대로 사사로운 성욕 해소를 위해 벌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선임 해병들의 하해와 같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쎄이들과 기열 사회인들은 이를 '가혹행위'라는 부조리한 멸칭으로 지칭하면서 해병들의 전투력을 나날이 깎아가고 있다. 


나라를 위해 정예 해병을 양성하는 우리들을 이렇게 대우하는 이상 국가 방위와 안보의 수준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독자 제군들은 이를 잘 판단하여 기존 매체에서 소개된 해병대의 이미지 대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정예 군인으로써의 해병대를 기억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