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성인이 된 듯한 소녀가 알몸으로 누워있다. 다행히도 소녀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은 얇은 홑이불로 인해 세계와 단절이 되어 있었고, 쌕쌕이며 내쉬는 소녀의 호흡과 함께 움직임으로 인해 소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해내고 있었다. 


"정신이 드느냐?"


긴 백발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의 노인이 소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곤히 자고 있던 소녀는 평온한 꿈에서 깨어나는지 흠칫 놀라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여... 여기는 어디인가요...? 그리고 당신은...?"


흑발의 단발머리와 매끈한 흰 피부의 소녀는 정신이 드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복장을 자각했는지, 홑이불을 끌어안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죠...?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요?"


소녀의 얼굴에는 점점 당황한 기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백발의 노인은 다소 무덤덤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죽어버린 네 목숨을 살려낸 드라코 공(公)이다. 나도 네 이름은 알지 못한다. 네가 나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소녀는 노인의 말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불안한 마음에 홑이불을 바짝 끌어안았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어막이었으니. 


자신을 드라코 공이라 밝힌 노인은 어안이 벙벙해진 소녀를 뒤로 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을 향해 몸을 옮겼다. 드라코 공은 솥에서 수프를 덜어 소녀에게 가져왔다. 대단한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고기가 잔뜩 들어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한 모습이었다.


"몸이 많이 허한 상태일테니, 어서 먹어두도록 해라."


드라코 공은 소녀의 곁에 수프 그릇을 두었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은 홑이불을 꽉 쥔 소녀의 손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미 너희와는 종족 자체가 다를 뿐더러, 그렇게 짐승같은 사람은 아니니까."


수프의 냄새와 드라코 공의 말에 소녀는 잠시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소녀는 수프 그릇을 들어 한술 입에 떠넣기 시작했다. 어떤 고기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굉장히 육즙이 풍부하고 기름진 식감의 고기였다. 소녀는 수프 맛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금세 그릇을 비우고 말았다. 너무 허겁지겁 먹어버린 것은 아닌지, 민망한 마음이 들어 소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릇을 내려놓았다. 


"저기... 드라코님...? 그나저나 제 목숨을 살려주셨다는게 무슨 뜻이시죠...? 전 지금 전혀 기억이 없어요...."


소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 전의 상황이 어땠는지 기억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소녀는 자신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굳은살이 박혀있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잣집 여인의 손처럼 잘 관리된 손톱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햇빛을 많이 쪼인 그을리고 거친 피부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기름을 먹인듯 번들거리는 규수의 피부도 아니었다. 전혀 자신의 배경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도 알지 못한다. 그저 죽기 전 삶이 어땠는지는 나도 들은바가 없으니. 다만 '더 이전'의 삶이 어땠는지 기억해 낼수 있느냐?"
소녀는 드라코 공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전'의 삶이란 무엇인지? 소녀의 당황스런 표정을 보았는지, 드라코 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전의 네 영혼은 이미 죽은 것이다. 다만 그 자리를 채우려 다른 세계, 다른 차원에서 목숨을 다하지 못한 영혼을 불러와 네 영과 결합을 시킨 것이지. 그러니 이 세계의 너의 자아는 죽어버렸고, 다른 세계의 자아가 네게 머무는 것이다. 그러니 잘 떠올려 보거라."
소녀는 더욱 더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지고 있었다. 드라코 공의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드라코 공 역시 그런 소녀의 눈빛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자, 그럼 이러면 도움이 되겠느냐?"


드라코 공은 이것 저것 여러 병기들을 가져와 소녀의 앞에 펼쳐보았다. 할버드, 날이 곧은 바스터드 소드, 창, 거의 사람 키만한 길이의 양손검 등. 소녀는 시퍼렇게 날이 선 무기들의 반사광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시선은 옆으로 삐져나온 곡도의 칼날에 머무르고 있었다. 


"잠시만... 이것은...."


소녀는 무엇에 이끌리는 듯 손을 뻗어 곡도의 손잡이를 쥐어 들어보았다. 8인치 정도의 칼 손잡이와 25인치 정도의 칼날. 균형잡힌 무게감과 적절히 아름답게 휜 오각형의 단면을 가진 칼날. 소녀는 알지 못하는 익숙함이 손끝으로 찾아오는 것과 동시에 온 몸에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소녀는 꼭 쥐고 있던 홑이불에서 손을 놓고는 칼을 휘둘러 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 되었지만, 희열은 부끄러움을 이기고 있었다. 곧게 뻗은 소녀의 칼에는 힘이 실리고 있었다. 


소녀는 칼이 멈춘 자리에 시선을 두었다. 다시 한번 보폭을 힘차게 내딛고 허리에서 위로 칼을 올려그었다. 그리고는 소녀의 입에서 알지 못하는 언어의 시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소녀는 뒤를 돌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드라코 공과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새로운 발견한 것에 대해 넘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드라코 공에게 소리쳤다.


"내... 내 이름은... 남이라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