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도륙의 현장이다. 마족과 인간이 격돌한 계곡 방어선에는 끊임없이 흐르는 피가 강을 이루고 있었고, 비명소리가 귀를 먹게 만들 정도로 계곡을 가득 채워 메아리를 울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인간들이 이 곳을 쳐들어 왔단 말이냐! 그리고 도대체 이들은 누구란 말이냐!"


마족 지휘관이 외쳤다. 보병들과 나란히 서서 방어선을 유지하는데도 급급해 보이는 그의 주위엔 대답을 해 줄수 있는 마족은 없었다. 


마족들이 당황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족과 인간들은 천년간의 평화조약이 있을 뿐 더러, 마족은 인간 세계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대규모로 인간들과 무력충돌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한 적도 없었고, 그것도 조직적으로 이렇게 쳐들어 올 것이라 생각하는 마족은 지난 수백년간 단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중무장을 한 보병과 발 빠른 경기병을 적절히 조합한 전략적인 침투는 더욱이나.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왜 우리가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 것이냐!"


마족 지휘관은 인간 보병의 칼에 맞아 쓰러진 마족 병사를 후방으로 끌어내리고 스스로가 최전선에 서 빈 곳을 메꿨다. 마족 지휘관의 칼은 천년간 발전이 없는 구식 칼이었다. 70 cm 가량 되는 곧은 모양의 칼. 맨몸이나 가벼운 갑옷을 입은 적이라면 무리 없이 베어버릴 수 있는 칼이었지만 그의 앞에서 맹렬히 칼을 내지르는 판금 갑주를 입은 인간 중장보병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커어억....!"


인간 보병의 아밍소드가 마족 지휘관의 흉갑을 관통했다. 그가 입고 있던 얇은 흉갑은 마치 종이처럼 서걱 하고 쓸리고 말았다. 마족 지휘관은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쓰러진 후, 그의 주검은 인간 보병대의 군홧발에 밟히고 말았다.

***

"사단장님, 계곡 방어선이 뚫렸다고 합니다...."

"씨바알...."


전령의 소식을 들은 마족 사단장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빼어난 미모와 노출이 많은 복장이 무색하게, 온 몸은 긴장과 당혹함으로 빳빳히 굳어 있었다. 


"인간 군세 소속은 파악이 됐나...?"
"...아닙니다... 깃발도, 구호도 없을 뿐 더러 복장으로도 전혀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쳐버리겠네.... 후방에서 지원군은 얼마나 걸린다고 하나?"
"...3일... 정도 소요된다고 합니다...."
"죽으라는 얘기네.... 그냥...."


마족 사단장은 울상이 되어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계곡 방어선이 뚫리면 이곳까지는 느린 보폭으로도 한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전령이 소식을 전해온 것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인간들이 쳐들어왔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간이었다.


"사단장님...! 피하십쇼...!"


마족 사단장을 다급하게 찾은 경비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급한 외침과 동시에 그는 바닥에 고꾸라졌고, 그의 등에 꽂혀있는 화살은 짧고 굵은 쇠뇌용 화살이 드러났다. 당연하게도 기계장치를 잘 사용하는 인간의 무기이다. 


"...에이 씨팔 도망가긴 어딜 가! 죽더라도 여기서 죽겠어...!"


마족 사단장은 칼을 뽑아들었다. 구식 칼이긴 해도 꽤 긴 길이의 양손검이다. 게다가 스스로도 검술에는 자신이 있었다. 다만 천년간 지속되었던 평화로 인해 싸울 상황을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누가 보아도 검은 스타킹에 하이힐 구두, 팔꿈치를 덮는 장갑과 짧은 검은색의 미니드레스가 본격적으로 칼싸움을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여기가 사단장 지휘소인가? 꾸물대지 말고 어서 찾아!"


인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족 사단장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배에 힘을 주어 외쳤다.


"사단장을 찾는다면 무리할 것 없다...! 내가 바로 사단장이다...!"


사단장의 외침에 뒤이어 한 무리의 중무장을 한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칼에는 검붉은 마족의 피가 묻어 흐르고 있었고, 그들의 갑옷에는 미약한 생채기 정도의 흠집만 나 있을 뿐이었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군. 칼을 내려놓아라. 저항은 의미가 없다."


인간 무리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의 목소리가 그의 투구를 통해 들려왔다. 사단장은 그의 말에 수긍하는 듯이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놓았다.


"말을 잘 듣는군. 자 그렇다면...."


인간 지휘관이 긴장을 늦추는 것이 보이자, 마족 사단장은 온 힘의 마력을 끌어모아 광역기를 준비했다. 


몽마 서큐버스. 


아무리 천년간 인간을 대상으로 쓸 일은 없었다 할지라도 종족 기본기는 충분히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사단장이었다. 인간들을 잠재워 꿈에 들어가 그들을 상대할 수 있다면 일대 다의 싸움이라도 승산이 있다.


"히야압...!"


서큐버스 사단장은 기합을 모아 인간 무리에게 마력을 집중했다. 마력이 닿는 동시에 인간들은 잠에 빠져들어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음? 뭐하는 거지?"
"...헤엑...?"


하지만 서큐버스 사단장의 기대와는 달리, 인간들은 전혀 동요조차 없었다. 서큐버스 사단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에 당황과 함께 정신이 붕괴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카페인을 발견했다는 것은 마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얏...!"


서큐버스 사단장은 잠시 멈칫하는 인간 지휘관을 노려 재빨리 칼을 뽑아 그를 베었다. 


챙!


하지만 칼은 그의 투구를 베어 들어가기엔 무리였는지 그대로 튕겨나가고 말았다.


"저항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했을텐데."


인간 지휘관을 칼도 뽑지 않은 상태로 건틀렛을 낀 손으로 서큐버스 사단장의 귓방망이를 날렸다. 서큐버스 사단장은 숨도 내뱉지 못할 만큼의 충격을 받아 휘청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손에서 놓쳐진 칼은 깽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예상대로 서큐버스가 맞나보군. 나를 똑바로 보시오."


인간 지휘관은 몸을 숙여 서큐버스 사단장의 얼굴을 잡아 자세히 보았다.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얼굴에는 손바닥만한 커다란 멍이 들어있었다.


"벗어."


인간 지휘관은 몸을 일으켜 서큐버스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서큐버스 사단장은 치욕감과 두려움으로 인해 덜덜 떨면서도 당당히 소리쳤다.


"차라리 죽여!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앙칼진 서큐버스 사단장의 외침은 인간 지휘관의 묵직한 귀싸대기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퍽!


"나는 인내심이 좋지 못하다. 그러니 어서 벗어라."


서큐버스 사단장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만큼 강력한 무력을 가진 자들의 앞에서 알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큐버스 사단장은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긴장감과 두려움이 오래되었는지 하이힐 속에 있던 발에서는 따스한 김이 오르고 있었다. 팔꿈치까지 장갑으로 덮혀 있던 손은 축축히 젖어 있었다. 드레스까지 벗고 스타킹을 벗으려고 했지만 인간 지휘관의 참을성은 한계에 다다랐다.


"인내심이 좋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꺄악!"


인간 지휘관은 막무가내로 서큐버스 사단장의 스타킹을 찢어발겼다. 서큐버스 사단장은 이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인간 지휘관 앞에 서게 되었다. 서큐버스 사단장은 어떻게든 몸을 가려보려고 손으로 몸을 감싸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서큐버스 사단장은 침을 삼키고 최악을 상상했다. 동포들을 죽이고, 그들의 피로 손을 적신 무뢰배들에게 능욕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다. 서큐버스 사단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입어라."


서큐버스 사단장은 눈을 살짝 떠 보았다. 인간 지휘관의 손에는 금으로 수놓은 흰색의 로브가 들려 있었다. 


"이게 도대체...."


서큐버스 사단장은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인간 무리들 뒤에서 인자한 늙은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많이 놀란게로구나."
"법황 성하, 늦게 처리하여 죄송합니다!"


서큐버스 사단장에게 로브를 건넸던 인간 지휘관은 고개를 깊이 숙여 법황이라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였다. 


"법황...?"


서큐버스 사단장은 의아심으로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식별도 없는 갑주로 무장한 무리들이 모두 법황을 향해 고개를 숙여 절하고 있었다.


"네가 바로 서큐버스로구나. 내가 늦어서 미안하구나."


인자한 미소로 서큐버스 사단장을 바라본 법황이 말했다.



"넌 이제부터 우리의 성녀다."



***


'성녀가 되어버린 서큐버스'를 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