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있다.


악인이나 의인이나, 성품에 상관 없이 따스한 아침 햇살은 동등하게 주어지고.


바보나 현자나, 지식과는 별개로 동일한 하루 24시간이 흐르며.


거지나 왕, 그 모두에게 삶과 죽음은 반드시 찾아온다.


이러한 자칭 공평함 속에서도 나만이 겪고 있는 부조리가 하나 있는데.


"아니, 거기서 3번을 찍으면 어떻하냐. 이 새끼 공부 개못하네 ㅋㅋㅋ 아, 맞다 나였지."


내 뒤에서 입을 터는 저 새끼이다.


어느날부터 내 삶에 나타나 훈수를 두기 시작한 다른 시간대의 내 모습들은 다양한 외관, 옷차림, 기분으로 나를 찾아왔지만.


모두 하나 같이 나를 화풀이용으로만 보는 듯 했다.


"아니~! 문제 푸는데 좌우뇌중 하나 꺼놓냐? 그건 연립방정식을 먼저 풀어야지!"


참고로 모의고사를 보는 나에게 말을 올리는 저새끼는 대학에 간 나이다.


꼴에 노력했다고 인서울은 했지만 그래도 지잡인 주제에 나에게 입은 열심히 터는 모습이 꼴보기 싫어 죽을지경이다.


"앜ㅋㅋㅋ 6 곱하기 9가 74야? 이새끼 밤마다 직박구리만 애타게 찾더니 뇌가 썩었네 ㅋㅋㅋㅋ."


문제 하나를 틀릴때마다 자꾸 옆에서 깐족거리는데 이새끼를 때리면 과연 폭행일까 자해일까가 궁굼해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정말 역설적이게도 이 녀석의 훈수 덕에 문제들은 수월하게 풀렸다.


시험이 끝나고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반은 짜증과 반은 그나마 남아있는 고마움을 담아 인사를 건내려고 했지만.


이미 녀석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항상 이런식이다. 


어렸을때부터 항상 나란 새끼는 그래왔다.


***


"... 저, 민아야. 우리 만난지는 얼마 안됐지만, 혹시 괜찮다면 나랑 사귀-"


"어허, 스톱! 머리에 피도 안마른 자식이 그러는거 아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당시 초등학생이였던 내가 보기엔 그나마 적당한 키, 허나 덥수룩한 수염에 매서운 눈매를 지니고 있던 내 모습은 가히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처절했다.


"야, 임마. 그딴건 알거 없고, 너 쟤한테 지금 고백하려고 했지?"


"아이씨, 그걸 얘기하면 어떡해요!"


"괜찮아 짜식아, 쟤는 어짜피 내 말 안들려."


"저... 지철아, 지금 누구랑 대화하는거야?"


아씨, 지금 생각해봐도 쪽팔린다. 심지어 그때 내 대체가 더 최악이였다.


"어?! 어~ 혼자말을 좀 하고 있었어. 내가 헤리성 인격 장애라 내 안에 다른 좀 내가 많거든."


"푸흡!"


으아아아악! 개같은 나 새끼! 하필 이른 나이에 중2병이 도져서 다중인격이 멋지다고 생각한 내가 등신이였다.


덕분에 그일 이후로 민아랑은 사이가 멀어지고, 민아는 반에서 인기가 제일 많은 남자애랑 사귀어서 꽁냥대고...


그 이후로 나는 굳게 다짐했다. 다시 한번만 더 그 시간대의 내가 나타나면 난 그 녀석을 부셔버릴 것이라고.


***


"하아아..."


방에서 마저 공부하던 내 뒤에서 낮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엔 민머리에 피곤에 찌든 듯한 내가 지친듯 방안 침대에 자리잡고 누워있었다.


"추, 충성!"


"뒤질레?"


다른 부연 설명 없이도 어느 시간대에서 온 것인지 확실해 보이는 저 모습. 분명 생각하기도 끔찍한 스포일러일 것이다.


"오랫만에 왔네요? 요즘은 안 힘들어요?"


"힘들지, 뒤지게 힘들지. 근데 솔직히 니만 하겠냐. 몸이야 뭐 구를수록 적응을 한다지만, 너는 수험생 스트레스 장난 아닐꺼 아냐."


"하하... 안그래도 아까 대학생 시간대가 와서 모의고사 도와주더라고요. 물론 좀 깐죽대서 짜증났지만. 그래도 일단 대학교에 갔다는 것 하나만으로 위안이 돼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군인 시절의 나 자신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어깨를 몇번 토닥였다.


"새끼... 힘내라. 그리고 너무 미래에 의지하지는 말고. 네 앞길은 니가 만드는거야."


정말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저때의 내가 가장 어른스럽다는 생각이든다. 역시 군대라 그런가 생각이 많아져서 그러나?


어찌됐든, 오늘은 더 공부할 의욕이 없으니 이만 자도록할까...


-벌컥!


과격하게 열리는 문틈 사이로 귀를 찢을 듯한 괴성이 들려왔다.


"일어나 개새끼야!!!"


다급하게 나에게 달려오는 형체는 지금의 나와 굉장히 유사하게 생겼다. 아니, 그냥 똑같잖아?


"니가 지금 잠들면 내일 쪽지시험은 어쩌게!"


"내일 쪽지 시험이 있어?!"


"그래 이새끼야!!! 빨리 39 페이지 펴고 '기술발전의 역사' 그거부터 외워!"


시발. 아무래도 오늘도 편히 자기는 그른 것 같다.



미래의 내가 자꾸 훈수를 두는 불편한 생활, 허나 알고보면 꽤 쓸만 할지도?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