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붕, 그는 모솔아다무직백수로, 소설에 빙의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그는 신이 쓴 작품은 분명 심해에 존재할 것이라 믿고 심해를 탐사해왔다. 그는 그렇게 심해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작가로 위장한 신의 눈에 띄기 위해서 철저하게 매편마다 감상 댓글을 작성했다. 그의 냉철하고 잔혹한 리뷰댓글은 작가들의 창작욕을 거세해버렸고 그 결과 수많은 작가들이 연재중단을 선언하고 사라졌지만 장붕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오직 진짜 신이 쓴 글을 찾아서 관심을 끌고 빙의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벌써 5년 차, 소원이 약간 다른 형태로 달성되려고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난 장붕의 앞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미모를 가진 여인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장붕 씨. 저는 여신 루레트라고 해요. 장붕 씨의 소설에 빙의되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 확실히 받았어요."

 "어, 음... 여신이시라고요. 그, 작가들 중에 신이 숨어있던 것 아니었나요?"

 "소설을 너무 많이 보신 것 아니에요? 작가들은 그저 작가일 뿐이랍니다."


 잠깐 당황하던 장붕은 곧 미소를 지었다. 작가 중에 신이 없었다는 것은 의외였지만 결국 상황을 봤을 때 여신이 그를 소설 속으로 빙의시켜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저는 이왕이면 후피집 주인공으로 빙의되고 싶은데요."

 "아, 그건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예? 그럼..."

 "빙의는 이렇게 룰렛으로 정하는 거랍니다! 장붕 씨가 평생 봐온 소설들 중에서 말이죠."


 여신이 손짓하자 허공에 거대한 룰렛이 떠올랐다. 그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각 항목은 너무나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저기, 하나도 읽을 수가 없는데요? 아니, 그보다 진짜 평생 읽은 소설 중에서 무작위로 빙의한단 말입니까?"

 "장붕 씨가 평생 읽은 소설 1268편... 물론 이걸 전부 다 고려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무작위는 어쩔 수 없어요. 상부 지침인 걸요."

 "후, 여신님 알고 보니 말단이었군요? 처음엔 유일신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신도 뭐 별 거 없네요."

 "아, 예. 제가 말단이라고 무직백수가 비웃을 짬은 아닌 거 같긴 한데, 뭐 적당히 넘어갈까요."

 "아, 저. 농담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잠깐 선을 넘었던 장붕이 여신의 눈치를 보았다. 여신은 그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고는 손을 튕겼다. 그러자 빼곡하게 들어찼던 항목들이 이젠 집중하면 간신히 글자의 형태라는 것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한마디로 아직 잘 안 보였다는 뜻이다.


 "자, 이제 216편이군요."

 "예? 갑자기 이렇게 줄어든단 말입니까?"

 "아, 설명을 안 했군요. 작가가 쓴 소설은 곧 하나의 세계가 된답니다. 연재를 진행하며 서서히 형체를 갖춰가던 세계가 완결과 함께 완전한 세계로 태어나는 거죠. 그런데... 장붕 씨가 지금껏 정성스럽게 감상을 남겨 연재중단시킨 작품이 자그마치 1052편이나 되네요?"

 "아... 그 말은..."

 "세계가 붕괴됐으니 빙의할 수 없게 된 거죠. 간단한 거에요."


 장붕이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신의 작품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소설을 보고 수많은 감상을 남겼다. 일부러 신의 눈에 띄기 위해 단점만을 극단적으로 꼬집었고 그 결과 신이 아니었던 많은 작가들이 눈물을 흘리며 연재를 중단했었다.


 '다행이군. 내가 리뷰를 남기지 않았다면 1200개가 넘는 작품들 중에서 빙의해야 했을 테니까...'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여신은 다시 룰렛의 항목을 줄이고 있었다.


 "장붕 씨는 한국인이죠. 외국 작품은 뺄게요."

 "어째서입니까?"

 "흠, 대부분 라이트노벨이네요. 장붕 씨, 일본어는 좀 하나요?"

 "어, 아뇨."

 "그럼 가봤자 대화가 안 통해서 아무것도 못 할 거에요."

 "그, 일본 작품이어도 판타지 배경인 작품도 있는데..."

 "어차피 만든 창조자가 일본인이잖아요? 그럼 자연스럽게 소설의 세계 속에서도 일본어를 쓰게 된다고요. 작가가 아예 확실하게 등장인물의 국적과 사용 언어를 정해놓거나, 순수한 판타지 배경이라면 새로운 언어 체계를 만들어서 정해놓지 않은 이상은 무조건 그렇게 돼요. 작가의 머릿속에서부터 그 등장인물들은 모국어로 대화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아무튼 뺄게요? 이번에 남은 건, 187편."


 룰렛은 여전히 그 내용을 읽기 힘들었다. 장붕이 눈을 가늘게 뜨고 글자들을 훑어보는데, 다시 룰렛의 항목이 줄어들었다.


 "이번에는 뭡니까?"

 "아까 소설이 세계가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양산형이라면 어떨까요?"

 "양산형...?"

 "흔히 말하는 글먹, 그걸 목적으로 한 활자혼합물들 말이에요."


 여신이 장붕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다가온 장붕에게 여신은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둥근 구체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이건 장붕 씨가 본 양산형 소설 중 하나 [대충 만든 SSS급 스킬로 세계를 정복한 나, 갑자기 나타난 닌자 여고생에게...], 아니. 장붕 씨. 평소에 이런 거 보세요?"

 "아니, 그..."

 "아무튼 이게 [대충...] 어쩌고 하는 소설의 세계에요."

 "응?"


 구체 안에는 온통 하얀 풍경만이 비쳤다. 조금 더 집중해서 본 장붕은 그 안에서 조그마한 형체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저건... 주인공? 그런데 왜 자꾸 걸어다니기만 하는 거죠? 아니, 그보다 왜 세계 안에 길이랑 건물 밖에 안 보이는 겁니까."

 "그게 양산형 세계의 문제에요. 어느 정도 작가가 마음을 담아서 쓰는 세계에는 빈 곳이 있어도 작가의 심상이 영향을 미쳐서 알아서 빈 부분들이 채워진단 말이죠. 근데 정말 소설에 전혀 애정도 없이 활자혼합물만 만들어낸다? 그럼 이렇게 되는 거죠. 딱 생각한 부분만 구현된 거에요. 미완성 게임처럼."


 잠깐 [대충...] 주인공의 무의미한 걸음을 보던 장붕은 소설의 결말을 떠올렸다. 제목대로 대충 전개되다 마지막에 닌자 여고생에게 고백하러 걸어가는 장면에서 끝을 맺었는데, 그 때문인지 주인공은 계속 걷고 또 걷다가 길이 막히면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그럼, 저런 세계에 빙의하면..."

 "딱 소설에 적힌 만큼만 움직일 수 있어요. 아마 엑스트라로 빙의하면 잠깐 등장했다가 바로 죽을 걸요? 등장한 이후에는 아예 세계에서 삭제될 거니까."

 "세상에."

 "그래도 저 정도면 양호한 편이죠. 정말 심한 세계에는 공기도 자연현상도 없는 경우도 있어요. 얼마나 무념무상으로 타이핑만 했길래. 제 사수는 더 심해서 아예 세계에 공백 밖에 없는 경우도 봤다던데... 아니, 이런 건 됐고, 하여튼 이런 세계는 건들지 않는 게 좋아요, 알겠죠?"

 "예..."

 "그럼 이제, 154편. 어디 보자, 다음은..."


 잠깐 인상을 쓰던 여신이 손을 흔들었다.


 "아까는 세계가 너무 텅텅 비어서 뺀 거였죠. 이번에는 세계가 너무 꽉 차서 빼는 거에요."

 "음? 그건 무슨 말입니까?"

 "세세한 설정이 정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그러면서 동시에 설정 오류도 다수 존재하는 그런 세계에요."

 "어, 음... 잘 감이 안 잡힙니다."

 "아까 미구현 게임이라는 예시를 들었죠. 이번에는 완성된 게임인데 버그가 더럽게 많은 거라고 생각해봐요. 스킬을 찍었는데 사용이 안 된다거나 힐을 썼는데 체력이 깎이거나...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보면 돼요."

 "그래도 진행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프리징은 어때요? 실제로 제 사수의 사수 때 한 명이 설정 오류가 많은 소설에 빙의된 경우가 있었는데, 그 사람 아직도 멈춰있어요."

 "아... 구하지도 못하는 겁니까?"

 "제 사수의 사수도 갇혀 있어요. 설명이 충분히 됐을까요?"

 "아..."

 "뭐... 그래서 이번에 남은 소설은, 135편이네요."

 "아직도 많네요."


 장붕의 말에 여신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이번엔 꽤 많이 줄어들 거에요."

 "정말입니까?"

 "이 빙의라는 게, 사실 원본을 복사한 세계에서 진행되는 거거든요. 근데 또 이 원본 세계를 한번 복사하면 복사된 세계가 완전히 진행되기 전까지는 엄청 불안정해져요."

 "음, 그럼 이번에 줄어드는 건 다른 사람이 빙의 중인 소설인 거군요."

 "그렇죠. 그래서 남은 소설은... 16편."

 "생각보다 빙의자 수가 많은가 보군요."

 "그래서 매일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중이에요... 장붕 씨 다음으로도 대기자가 쭉 줄을 서고 있다고요. 빙의하고 싶은 마음도 다들 어찌나 간절한지. 아, 장붕 씨. 이제 내용을 살펴보셔도 좋아요."

 "이제 끝인 겁니까?"

 "예, 이 중에서 룰렛을 돌릴 거에요."


 웃으며 룰렛의 항목을 읽어나가던 장붕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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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아니... 아니, 왜... 이딴 것밖에 없는 겁니까! 애초에 해병문학은 한 명이 쓴 소설도 아니잖아!"

 "다수의 작가가 동일한 심상을 가지고 엮어낸 소설이죠. 그럼 충분히 하나의 세계가 될만 하잖아요?"

 "아니,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다 왜 이따구냐고!"


 장붕이 다시 소리쳤지만 여신은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요, 장붕 씨. 아까 말했잖아요. 장붕 씨는 천 편이 넘는 소설을 연재중단시켰다고 말이에요."

 "그게 뭐 어쨌단 말입니까!"

 "그리고 소설은 곧 세계가 된다고도 말했죠."

 "어쩌란...! 아."


 장붕은 드디어 깨달았다.

 그가 천 명이 넘는 작가의 창작욕을 꺼뜨리고, 그에 따라 천 편이 넘는 소설을 연중시킨 것.

 그것은 곧 그가 천 개가 넘는 세계를 멸망시켰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이보세요, 장붕 씨. 당신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빼앗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기는요. 그냥 얌전히 받아들이세요. 그냥 당신의 업보가 이렇게 돌아온 것 뿐이니까요. 웹소설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그 인과율의 작용이랍니다. 이렇게 보니까 인과율도 별 거 없죠?"

 "나는, 몰랐단 말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아, 그래요? 제 알 바 아닌데요? 이게 제 알바도 아니긴 하고요. 여긴 제 직장이니까. 어, 안 웃어요? 이거 나름 회심의 개그였는데. 역시 인간들의 유머 감각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그렇게 투덜거리며 여신은 룰렛을 돌렸다. 룰렛은 애타는 장붕의 시선을 받고도 그저 무심하게 돌아갔다.


 "예, 아무튼 장붕 씨의 간절한 그 마음 다시금 잘 받았고요. 어떤 소설에 빙의되든 굳세게 잘 살아남길 바랄게요. 아참, 만약 살아서 엔딩까지 본다면 그 업보를 조금은 청산할 수 있을 거에요. 한 50번 정도만 반복하면 현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요? 물론 일부러 죽으면 남은 업보를 가지고 그대로 지옥행이니까 자살하지는 말고요."


 그렇게 말하던 여신이 천천히 멈추는 룰렛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와. 하필 저게 걸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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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늙어죽을 때까지만 열심히 버텨봐요. 그 뭐시냐, 어... 자진입대를 환영한다, 아쎄이! 이거 맞나?"

 '시발...'


 그런 목소리를 들으며, 장붕은 하얀 빛과 함께 소설 속으로 빙의했다.

 이후 장붕은 현생으로 돌아와 해병대로 재입대하게 되지만,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