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이 손을 떠난 송신기가 무심하게 땅과 부딪혔다.


새파래진 안색과 떨리는 얼굴 앞에 선 것은 초라한 한 사내였음에도.


손가락짓 한 번으로 그를 죽일 수 있는 국가헌병대 선임하사 막스는 이지를 초월한 공포만을 느낄 뿐.


같은 피륙으로 이루어졌건만, 눈 앞의 남자가 지닌 그 악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오싹할만큼 생경한 탓이리라.


이미 프로토콜대로 전달을 마쳤으니 황도에 빽빽히 채워져 있는 그의 동료들이 구름같이 몰려올 것인데.


어째서 이 남자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나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일까?


모겐부르그 출신의 절름발이 목수 하나가 그 의문에 답을 내려주겠다는 듯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어이, 그걸로 되겠어? 친구들을 좀 더 불러오지 그래."


왕의 산맥 너머에서 선량한 신민들을 선동하고 황제의 군사들을 무참히 살해한 제국 특무부의 일급살해대상.


기만의 악마라 불리는 자, 프란츠 요들이었다.


목격담 하나라도 들어오는 날엔 근처 사단들이 총집결할법한 제국의 적들.


그럼에도 그 발아래 쌓아온 무수한 악명과는 너무나도 괴리되는 경박함이 역설적인 두려움을 불러오고 있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실망했다는 듯 남자의 어깨에 턱하니 손을 올린 요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쪽도 이 친구랑 비슷한 과구만. 요녀석도 제법 과묵해서 말이야."


그 뒤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다만 저 새빨간 혓바닥의 모략가가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만을 늘어놓았다는 사실 뿐.


영겁같은 찰나가 흐르고, 막스의 무전을 듣고 무통보 열차 징발을 통해 달려온 헌병대원들이 그 두사람을 에워쌌다.


그 중심에 선, 통솔자로 보이는 자가 확성기를 들었다.


"너희는 모두 포위됐다! '마왕(Erlkönig)' 루돌프 슈피겔, '악마의 하수인' 프란츠 요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아하, 이제 좀 재미있는 친구들이 왔구만."


심장을 겨눈 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총열의 숲을 바라보면서도 요들은 뭐가 즐거운지 웃어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포위라니, 잘못된 말이잖나. 이런 머저리들이 제국 최고의 군인이라니. 역시 망해도 싼 나라야."


숨쉬듯이 튀어나오는 이죽거림에 얼굴이 붉어진 대대장은 그 말의 저변에 깔린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요들이 손을 까딱였다.


"포위라는 건 말이야, 더 많은 수가 적은 쪽을 에워싸는 걸 말하는 걸세. 주위를 좀 둘러보게나."


그와 동시에 풍경의 그림자처럼 널부러져 있던 인영들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악공, 화가, 요리사, 무두장이, 상이군인, 사업가, 집배원, 농부, 서적상, 그리고... 어머니.


목숨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이 시커매진 눈가를 생명을 태워 빚어낸 불길로 비춰내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 이.... 이런 반역자 새끼들이 감히!"


천 명을 아우르는 특무대 진압병력의 수를 아득히 뛰어넘는 인간의 파도.


그것은 이미 숫자만으로 시각화된 하나의 폭력이었다.


떨어질 불씨만을 바라보는 그 준비된 도화선이 째깍이는 시계를 기다리는 동안, 마침내 남자의 입이 열렸다.


"압제자의 개들아, 듣거라."


이미 그와 독대한 순간부터 모든 의지를 상실한 막스의 눈동자에도 마침내 절망이 서렸다.


"강가에 나가본 적이 있느냐? 샘에는, 냇가에는, 그리고 바다에는 물이 존재하지."


두려움을 잊으려 온갖 욕설을 지껄이던 대대장마저 그 형언할 수 없는 기세에 식은땀을 흘렸다.


"너희는 배다. 나아가고자 하면 우리같은 물은 그저 비켜설 뿐이지. 허나 그것이 곧 전부일까?"


더이상 흘릴 눈물마저 남지 않은 자들의 품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물이 그 배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대대장이 입이 크게 벌어졌다.


"와라. 너희는 인민의 바다에 빠져 익사하리라."


억압받던 자들이 내지르는 분노의 함성이 총소리와 함께 광장을 메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