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간 벌어진 사건들의 흑막에 도달했다.

통칭 빌런 [인스트럭터]

빌런의 왕

갑자기 빌런들이 파워업한 원인.


'이제.. 곧이네..'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

그렇다. 

나는 이곳이 익숙하다.

어쩌면 집보다도.

그만큼 많이 왔던 장소.

그런 장소에 [인스트럭터]가 있다는 것은 그가 내가 잘 아는 인물이라는 뜻.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서 나는 충격감에 몸을 떨었다.

배신당해서?

분노 때문에?

아니다..

이 감정은..

그래.. 이 감정은


[환희] 다.


자동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남자의 미성.

처음 들어보는 말투.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말투는 아니다.

그가 빌런들에게 내린 지령서, 그가 우리를 조롱하기 위해 보내온 편지 등에서 수없이 봐 왔던 말투니까.


"드디어 먼 길을 돌아 진실에 도달했는가? 친구.."


내가 올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그는 그곳에 있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도망칠 수 없을 테니까.


영원히.


...


나는 현대 판타지 히어로물 세계에 빙의했다.

내가 빙의한 개체가 맡은 역할은 히어로연합 본부의 능력과장.

히어로의 능력을 증진시킬 방법을 찾고, 네임드 빌런의 능력을 분석하여 대응책을 찾는 것이 역할이다.

보통 이런 세계에서 이런 류의 연구직은 무능력자들이 맡는 법.

그러나 나는 빙의 특전인지 능력을 하나 각성할 수 있었다.


[능력 증폭과 안정화]


나는 능력자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었고, 증폭된 능력을 원하는 수준으로 안정화 시킬 수 있었다.

이 능력은 중요했다.

왜냐 하면 이 세계는 멸망이 예견되어 있으니까.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관.

주인공이 모든 것을 잃고 피폐해져 가다가 결국 마지막에도 패배하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이런 능력을 각성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었다.


'일단 주인공의 능력을 키워 줘야겠지.'


물론 단기간에 키워서는 안된다.

키를 키우겠다고 사람을 순간적으로 잡아늘려서는 안되는 것처럼..

적당한 훈련과 적당한 경험 등으로 여건을 만들어 준 후 그에 맞게 살짝씩 능력을 증폭시키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안정화 시키는 것을 반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련 상대를 준비해야겠지?'


주인공에게 붙여줄 대련 상대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분이 바로 빌런 [인스트럭터]

힘을 원하는 빌런에게 막대한 힘을 주는 뒷 세계의 지배자.

상세 불명의 범죄조직 [커버넌트]의 수장.


나는 빌런들에게 힘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만용을 심어줬다.

그들은 원래 힘이 부족한 자들..

그들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정면 승부로는 답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인질 납치와 살해, 주인공 집 테러, 주인공의 동료 살해 등 정면승부가 아닌 외도적인 길을 택해 주인공을 멘붕시키는 원인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들에게 힘을 주면 된다.

현재 주인공에게 살짝 못 미칠 정도의 힘을.

나는 그들에게 힘을 주며 주인공에게 정면으로 덤빌 것을 사주했고, 갑자기 막대한 힘을 얻은 그들은 당연히 그대로 주인공에게 꼴박했다.

물론 그런 빌런들은 주인공처럼 세심하게 관리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한번 쓰고 버릴 1회용품.

주인공을 향해 발사되고 나면 잊혀질 한 발의 탄환이다.


"힘을 줬으니 대가를 치러라. 히어로 [플라티나]를 죽여라. 그 과업만 달성한다면 지금 각성한 힘은 영원히 너의 것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다.

그들은 플라티나의 몸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는 내가 선별에 선별을 거듭한 최적의 대련 상대.

내가 그녀를 위해 짜둔 커리큘럼 속의 교보재다.

그들에게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약속.

그들은 나의 도움을 받고 몸의 한계를 무시한 최대치의 능력 증폭을 받았다.

그리고 그 능력이 최대치에서 안정화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에 잡아먹히겠지만 그런건 크게 상관이 없다.

어차피 그런 부작용이 나타나기 전에 소모되어 사라질 테니까.


"이제 네가 나설 차례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을 향해 날릴 탄환이 다 떨어졌다.

주인공을 피폐하게 만드는 싸이코가 전부 소모되어 사라진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싸이코가 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싸이코는 더이상 없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갱생하고 주인공의 편에 섰던 빌런들 뿐이었다.

나는 이들은 다른 빌런들처럼 한번 쓰고 버릴 잡몹처럼 다루지 않았다.

플라티나에게 하는 것처럼 시간을 두고 부작용이 없는 선에서 세심하게 능력을 키워 줬다.

이들은 이 세상에 나름의 선한 역할이 있는 자들..

죽이거나 폐인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커버넌트]


그런 자들..

내가 갱생할 운명이지만 아직 갱생하기 전인 빌런들을 모아 만든 범죄단체.

주인공에게 감화되어 나를 배신하게 될 자들.

주인공이 나라는 존재에 닿게 해 줄 열쇠가 될 자들.

진짜 위협에 맞서기 전에 주인공이 파티를 모으고 힘을 기르는 계기가 될..

내 자신작이자 원작에는 없던 수제 에피소드.


[커버넌트의 몰락] 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원하던 대로..

에피소드는 최종장에 도달했다.

그간 나는 그녀의 몸을 관리하며 그녀와 유대감을 꽤 쌓았다.

그녀는 나를 꽤 신뢰할 만한 동료로 생각하고 있었겠지..

어쩌면 그녀의 마음이 다소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원래의 세계에서보다는 나은 결말이다.

그런 피폐함까지 주지는 않을 테니까.


-치이익


자동문이 열렸다.

그녀일 것이다.

이제 내가 그녀에게 체포되는 것으로 커버넌트의 준동은 끝난다.

나는 아마 최중요 빌런들을 잡아 가두는 슈퍼맥스급 교도소로 이송되게 되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빌런을 하나 세뇌해서 나의 모습으로 성형수술을 하고 더미로 만들어 뒀으니까.

바꿔쳐진 그가 곧 내가 될 것이고, 나는 신분을 세탁하여 세상 속에 녹아들 것이다.

이걸로 내가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은 끝난다.


그래야 했다..


...


"드디어 먼 길을 돌아 진실에 도달했는가? 친구.."


그래 진실에 도달했다.


"그대가 이겼노라. 패배자인 나는 승자인 그대에게 상찬을 내리며 나의 신변을 위임하도록 하겠다. 내게 그대와 싸울 힘은 없으니까."


그래 내가 이겼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져줬을 뿐이라는 것을.


"그 웃기는 말투는 그만두면 안될까?"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김장붕.. 히어로연합 능력과장이자 빌런 인스트럭터.. 그리고 범죄자단체 커버넌트의 수장.

나는 이 상황에 너무나도 감사한다.

그가 범죄자라는 사실은 이 암울한 세상이 내게 내려준 축복.

그러니 이제는 참지 않아도 되겠지.


"너는 빌런이 아니야. 정말 빌런이었다면.. 너의 그 능력을 사용해서 나를 파멸시켰겠지."


"무슨 소리냐?"


"내가 모를 줄 알아? 빌런인 너의 능력에 오래 전부터 노출되어 온 나는 당연히 이 곳에 오기 전에 정밀 검사를 받았어. 결과는 최상이었고. 현재 단계에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수준의 최고 능력이 각성되어 있다나?"


"그건.. 단순한 유희였을 뿐이다. 그대가 쉽게 당하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도 이상해. 네가 내게 보낸 빌런들 중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들은 나중에 검사해 보니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과한 능력을 받았는데, 정작 회유가 가능했던 애들은 세심하게 관리되어 있더라?"


"그들은 커버넌트의 정규 일원이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그 흑막이라는 범죄조직 커버넌트의 일원들은 하나같이 빠짐없이 이쪽으로 전향했는데? 애초에 그런 사람들만 모아서 만든 조직 아냐?"


"억측이 지나치군. 그대가 충격받은 것은 잘 알겠다. 이 결과를 믿고싶지 않겠지. 하지만 지금 그대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이다. 나는 범죄자며, 그대의 적이며, 이제는 패배자다."


"글쎄.. 내가 보기엔 넌 좀 많이 어수룩한 면이 있어. 상식적으로 내가 찾아오기 전에 도망칠 생각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이렇게 널 변호해 주면 사실은 내 말이 맞다고 뭔가 오해가 있었던게 분명하다고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게 아니야?"


"..."


"뭐 상관없어. 석연찮은 구석이 많긴 하지만 믿어줄게. 네가 빌런이라는 걸. 나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니까."


...


뭔가..

그래 뭔가뭔가였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플라티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넌 언제나 그랬어. 머리는 써줄 만 했지만 늘 연기는 못했지. 나한테 체포되길 바라는 거지? 그래 체포해 줄게. 넌 빌런이니까."


"그.. 그래.. 그거면 된 거다."


"하지만 널 절대로 교정국에 넘기지 않아. 이건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어."


"...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최악의 위협중 하나로 평가되었다지만 정작 네가 벌인 사건들의 피해는 내가 다 봤지. 너는 그 위험성 때문에 고평가 되었을 뿐, 정작 사회에 미친 해악은 미미하고. 그래서 넘겨받을 수 있었어. 너를 처분할 권리를."


"... 응?"


그녀가 내게 다가와 목줄을 채웠다.

... 목줄?


"특별히 만든 거야. 신체능력이 일반인인 넌 절대 풀 수 없을걸? 애초에 능력을 봉쇄하는 기능이 달린 물건이기도 하고."


"뭘.. 하려는 거지?"


"빌런이 아닌 줄 알았는데 스스로 빌런이라고 극구 주장하니 어떡하겠어? 믿어 줘야지. 넌 앞으로 내 소유물이야. 옆에 두고 길러줄게."


어..

이게 아닌데?

아니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가 목줄을 잡아 끌었다.


-휙


"켘켘.."


그녀는 나를 끌어당긴 후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저... 저기.. 플라티나씨.. 얼굴이 너무 가까운데요? 무서운데요? 살려주세요?"


"슈퍼맥스 교도소로 가는 것보다는 내 애완동물이 되는게 낫지 않겠어?"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슈퍼맥스 교도소가 나을 것 같은데?

살려줘..

이건 아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