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롭스키 저, <고종, 군밤의 왕> 19화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으로 삼다(1)'의 작가의 말에서 발췌함





오늘날에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각종 ‘주의’를 위해 남용되다시피 하는 적기는, 

19세기 노동운동과 자유주의·사회주의 운동에서 다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연상하는 그 적기가 본격적으로 널리 사용된 것은 파리 코뮌 때부터라고 하지요.


파리 코뮌의 기원은 1870년 보불전쟁에서의 충격적인 패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크마옹이 이끄는 주력군이 스당 요새에서 포위되자, 결국 나폴레옹 3세는 항복을 결정합니다. 

파리 시민들은 이에 불복하고 국민방위정부-제3공화국의 전신-를 수립하였지만, 

프로이센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4개월 간의 포위 끝에 마찬가지로 항복하게 됩니다.


프로이센군이 파리에서 개선식을 벌이고 베르사유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제2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는 등의 굴욕으로 높아가던

파리 시민의 불만은, 급히 소집한 의용군인 국민위병을 무장해제하려던 제3공화국의 시도로 인해 폭발하게 됩니다. 

결국 1871년 3월, 국민위병의 봉기로 정부가 급히 보르도로 탈출하게 되면서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인 파리 코뮌이 등장하게 됩니다.


1830년 가정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루이즈 미셸은 북프랑스에서 자라, 교사자격증을 취득하고 파리에 사립학교를 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아동인권을 존중하고 근대적인 학습체계를 도입하여 일약 유명인이 되었지요. 

1869년에는 여성인권촉구회(Société pour la Revendication du Droits Civils de la Femme)라는 모임을 열기도 했고, 

이후 파리 코뮌에서는 몽마르트르 자경위원회(Comité de Vigilance de Montmartre) 여군부대장을 맡아 여군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후 파리 공방전에서는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했고, 

5월 23일 몽마르트르 전투에서는 부상을 입은 채 방치되었지만 끝내 살아나와 공화군에게 항복합니다.


이후 남태평양의 누벨칼레도니 섬으로 유배되었는데, 거기서도 원주민 카낙 족, 

그리고 1878년 반란에 참여했다가 추방된 베르베르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등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좌익 여성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지요.


의외로 대부분의 군대 용어와 달리 수하(誰何)는 그 용례를 실록에서도 볼 수 있는 오래된 단어입니다. 뜻도 얼추 비슷하고요.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은 오늘날에는 보불전쟁의 패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전에는 크림 전쟁과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의 활약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굳건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패전의 뒷수습을 하느라 인기가 떨어진 아돌프 티에르를 대신해 대통령까지 올라갑니다. 적십자사 운동, 

특히 부상병과 포로에 대한 인도적 처우에 관심이 있어 프랑스 적십자사의 창설에 의외로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프레데릭 파시는 1860년대부터 평화주의 운동으로 두각을 드러냈지만, 글 중에 나온 것처럼 보불전쟁 시기에는 

자신의 운동이 전혀 도움이 못 되었다고 여겨 좌절감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다시 희망을 가지고 평화주의 운동을 재개, 

훗날 초대 노벨평화상을 뒤낭과 공동으로 수상하게 되지요.


쥘 파브르는 국민방위정부에서 외무장관을 맡았고, 뒤이은 티에르 행정부에서도 잠시 그 역할을 이어서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적 식견이 전무해, 정전협상에서 실수를 연발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군이 패잔병을 수습해 프랑스 깊이 들어온 프로이센군에게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기껏 공세를 취하려던 동부군이 고스란히 철수하게 만든 일이 있습니다. 

이후 한 치의 영토도 내어주지 않겠다고 장담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알자스·로렌의 할양에 동의하는 등, 

망신을 당한 끝에 사임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0년대 내내 국회의 거물로 활동하였습니다.







참고로 작가의 별명은 교수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