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의 천호(天狐)를 꿈꾸는 구미호였다.

 

200년전엔 그래도 호랑이 친구도 있고 산속을 거닐던 꼬리 여럿 달린 야호(野狐)들도 잔뜩 있었고, 그랬었지.

 

200년이란 세월은 나를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기 충분한 인고의 시간이었고.

 

나는 그렇게 인간사회에 녹아들었다.

 

물론, 도시에서 사는 건 여우로써 뭔가 지는 느낌이라 서울 관악산에서 허가도 받고 꽤 멋있는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지만…. 가끔은 사람 구경도 하고 싶은 법이다.

 

내가 사는 산 주변은 퇴근 시간만 되면, 사람들은 부산하게 어디론가 떠난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는 사람.

 

피곤한 표정으로 종점에서 나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친구와 만날 생각으로 행복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가는 사람.

 

이런저런 사람들이 길가를 가득 메운다.

 

조금 어지럽다. 

 

천호 준비생으로서 인간과 너무 엮이는 건 좋지 않다고 배웠다.

 

하지만, 여우의 삶에는 가끔은 일탈도 필요한법이다.

 

그래 떡볶이집에서 순대와 간, 그리고 떡볶이 1인분 정도의 간소한 일탈 정도는 괜찮겠지.

 

그런 생각으로 나는 떠돌던 중 한 떡볶이집에 들어갔다.

 

"저기요~!"

 

따뜻한 오뎅 국물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꽃샘추위라는 이름의 겨울 한기를 따뜻하게 녹여준다.

 

"아이구 뭘로 드릴까?"

 

"여기 떡볶이 1인분이랑 순대 1인분이요. 간 많이 주세요~"

그렇게 주문을 하곤 맛있는 순대. 특히 간이 나오길 기다렸다.

 

떡볶이는 먼저 나왔지만, 메인은 순대다.

사실 나는 순대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순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간.

 

그래 간!

 

인간들이 여우, 특히 구미호 설화 이야기만 했다. 하면 나오는 그 '간'.

 

종이컵에 오뎅국물을 따라 따뜻한 국물을 목구멍으로 천천히 넘기면서 내가 주문한 간 많이 넣어달라고 한 순대를 기다렸다.

 

 

식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먹기 좋은 크기로 썰린 간이 몹시 탐스러워 보였다.

 

입안에 침이 고인다. 

 

'안돼 이러면 여우인 게 들킬 거야!'

 

마음속으로 산신의 업무 사항에 대한 시험문제들을 잔뜩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번뇌를 머릿속에서 내쫓으려 했다.

 

아니 그랬었다.

 

내 간이 다른 남성에게 전달이 되는 순간을 보기 전까지.

 

아니 언제부터 여기있었지?

 

"어…?"

 

"아 아가씨껀 다음 꺼야~ 좀만 기다려줘요~ 미안해요~"

 

떡볶이집 주인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내 심정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일주일에 단 한 번! 

내가 산에서 내려와서 사치를 부리는 이날에!

 

웬 남정네 하나가! 내 행복을 뺏어가는 거야!

 

그러면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피로가 가득한 표정에 발치에는 큰 책가방이 있었다.

 

살짝 열린 지퍼에는 20xx 년도 공무원시험 예상 이런 단어가 보이는 거로 보아 공시생인 것 같았다.

 

'나랑 비슷한 처지네, 나는 신계의 9급 공무원인 선호로서의 득선(得仙)의 길을 위한 수행이나 하고 있고, 쟤는 공무원이 되려고 공부를 하고 있구나.'

 

나는 빤히 그 남성을 쳐다봤다.

 

남성은 허겁지겁 순대를 먹는 걸 보니 배가 어지간히 고팠나 보다.

 

"으음~."

나는 떡볶이를 이쑤시개로 콕 집어먹으면서 참 기구한 인연이네~ 이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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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주,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주문을 했다.

 

옆을 보니 그 남성 역시 똑같이 순대를 시키고 있는걸 보니, 이 남성도 나같이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인 사치를 즐기는 거리라….

 

 

오늘은 내가 늦게 왔으니, 저 남자의 순대가 먼저 나오겠지 싶어 평소와 같은 루틴으로 오뎅 국물을 마시면서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저기요."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

 

"그…. 저번에 빤히 쳐다보시던 그분 맞죠?"

 

뭐지?

날 알아보는 건가?

 

설마 요호라고 착각해서 사냥하는 요괴 사냥꾼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요즘 같은 시대에 요괴 사냥꾼이 어디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마음속의 평정을 어떻게든 찾은 후 대답했다.

 

"네? 무슨 소리세요?"

 

"아닌가? 죄송합니다~"

 

자세히 보니 좀 잘생겼네, 눈에 다크서클이 있는 거 빼면 코도 오뚝하고, 선이 굵은 게 미남 상이다.

 

내가 뭐, 득선 하겠다고 수련하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꼬셔서 하룻밤 한번 질펀하게 때려주고, 당신의 정기, 나의 요력으로 대체되었다! 

이래 줄 수 있는 충분한 외모의 남성이었다.

 

물론, 나는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

 

애초에 득선 하겠다는 구미호가 남자에 관심을 가져서 뭔 부귀영화를 보겠는가?

 

득선을 목표로 수행한 지 어느새 200년이다.

 

말이 200년이지 50년쯤은 그냥 야호(野狐)로 살았고 150년쯤 사람의 몸으로 수행을 쌓았다는 거다.

 

150년.

 

그래 그 빌어 처먹을 150년.

신선 한 번 돼서 꿀 빨면서 살겠다고 결심한 지가 벌써 150년이 되었다고.

 

근데 득선은커녕 꼬리털만 푸석해지는 기분이라 기분이 조금 울적해졌다.

 

"하아. 망할 시험."

 

그래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어느샌가 신통력이니, 도력이니 그딴 옛 문물은 뒷전이고 요즘은 선호 시험 특히 신선의 마음가짐과 능력을 보니, 마음가짐을 보니, 어쩌고 해서….

 

신선이 되려면 매년 있는 시험에 먼저 합격을 해야한다.

 

오늘이 3월 22일이니…. 앞으로 딱 4달 남았다.

 

"..그쪽도 시험 봐요?"

 

남성이 나에게 친한 척 말을 걸었다.

 

"네, 4달 남았네요."

 

"저도…. 4달 남았네요."

 

공무원시험도 그날 보는 건가?

 

나는 속세의 문물인 스마트폰을 꺼내 달력 앱을 켜봤다.

 

[7월 22일. 단기 4356년 선호 득선 시험날]

 

일정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그놈의 신선 한번 된다는 게 뭐 그리 깐깐하게 외워야 하는 게 많은지….

 

산은 어떻게 생겼니, 길을 잃은 행인을 보면 어떻게 해줘야 하니, 뭐니 그런 거로만 문제가 수십 개가 나오는 그 시험을 볼 생각을 하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쪽도 공무원 준비해요?"

 

내가 좀 복잡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고 있자, 남성이 나에게 물었다.

 

"공무원은 아닌데 비슷한 거 있어요."

 

"하하…."

 

남성은 멋쩍게 웃으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도도하게 고개를 돌려 순대의 간을 이쑤시개로 콕. 찍어서 입안에 넣었다.

 

역시 간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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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3월이 지나고, 4월이 되었다.

 

4월이 되자, 따뜻한 봄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온다. 

 

어느새 벚꽃도 피고, 목련도 하얀 자태를 뽐내고 있고, 산에서 내려가서 순대 간 먹기 딱 좋은 날씨다.

 

오늘은 떡볶이도 필요 없다.

 

너무 기분 좋은 봄 날씨니까 하루 정도는 일탈해도 괜찮잖아?

 

나는 어차피 구미호인데!

 

닳고 닳은 책이나 읽는 것보단, 내려가서 오랜만에 순대나 먹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아이구 아가씨 오랜만에 왔네! 그려 뭐줄까?"

"순대 간 많이요!"

"떡볶이는 안 먹게?" 

"요즘 살 빼요!"

 

나는 대충 둘러댔다.

 

"아가씨 혹시 남자 만나? 그 전에 공시 준비하던 그 총각."

 

'내가 걔를? 왜?'

 

그 말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든 의문이었다.

 

물론 잘생기긴 했어.

 

스마트폰으로 보는 너튜브의 공중파 채널에 나오는 연예인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생기긴 했어. 응 그렇지.

 

하지만 연애 상대로는 꽝이야.

 

처음 보는 여자한테 무드도 없이 아무렇게나 말을 걸고, 같은 시험 준비생이라고 제멋대로 같은 취급을 하는 그런 남자와 사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여느 때처럼 순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안녕하세요~"

"아이고 총각 오늘은 늦었네."

 

떡볶이집 주인이 전에 그 남자를 반갑게 반긴다.

 

"오늘 학원이 늦게 끝나서요…. 아 또 만나네요!"

 

남자가 멋쩍게 웃으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게요. 매일 오시는 거예요?"

 

나는 그래도 무려 3주 동안이나 얼굴을 마주친 사이라서 인사 정도는 받아주기로 했다.

 

"매일은 좀 힘들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오고 있어요."

 

그쪽도 나랑 같은 이유구나. 뭐 같은 처지로 생각할 만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온 순대를 먹고 있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연락처라도 교환하실래요?"

 

미친놈이 고백받으려고 하나?

 

나는 의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 남자를 쳐다봤다.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인연은 개뿔.

 

"싫어요."

 

나는 그의 번호교환 제안을 칼같이 거절했다.

 

'우린 그저 비즈니스, 아니 그냥 매주 마주치는 관계일 뿐이에요. 더 이상의 발전도,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알겠죠?'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냥 싫다고만 말해줬다.

 

아무리 내가 여우라지만, 남자에게 안될 일을 희망을 주고 싶진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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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또 한주가 지나 약속한 듯이 떡볶이집에서 만났다.

 

이번엔 내가 늦었다.

 

제길. 부지런한 남정네 같으니라고….

 

"둘이 사귀거나 그런 거 아니지?"

 

떡볶이집의 주인이 웃으면서 물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답했다.

 

역시나 내가 늦게 와서 그런지, 남자의 순대가 먼저 나왔다.

 

쳇. 

 

"먼저 먹어요."

 

"네?"

 

갑작스럽게 남자가 나에게 순대를 먼저 먹으라고 넘겼다.

 

남자의 주문 역시 나와 같이 간을 많이 시키는 사람이었다.

 

순대 내장은 간이 최고지 맛잘알이네. 나쁘지 않아 이 남자.

 

....잠깐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후. 하마터면 꼬리 튀어나올 뻔했네! 진짜!

이렇게 수작질을 한다고? 

 

그래 여우 앞에서 여우 짓을 하신다? 이거 이거 안 되겠어.

 

"어…. 왜 저한테 주는거에요?"

 

생각과 말이 따로 나오긴 했지만, 하여간 나는 기다릴 줄 모르는 그런 교양 없는 구미호가 아니다.

 

"늦게 오면 뭔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절 쳐다보길래요."

 

남자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 돌겠네.

요즘 힘들어서 그런가 표정관리가 안 되는 느낌이다.

 

지금도 내가 그런 눈으로 저 남자를 쳐다본 거야?

 

이거이거 내가 잘못했네! 아이고 세상에 구미호 하연호 이런 호생(狐生)의 실수를 하다니 아이고 맙소사 난 이제 신선 되기 글렀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망연자실해 있자, 남자가 말했다.

 

"싫어요?"

 

아 미친 새끼. 

진짜 미친놈인가? 

여우를 이렇게 꾀는 남자가 있다고?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여우를 꼬셔? 

목숨이 9개라도 되나? 난 꼬리 하나당 목숨 하나가 추가되는데!

 

근데 왜 부끄럽지?

어째서?

 

나는 멍하니 그 남자를 쳐다보다가, 순대 간에 눈이 갔다.

 

그래. 먹자.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먹으면 도리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얼굴 새빨개져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이 미치자, 분명 저번 주까지만 해도 없었던 그 남자에 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냐, 내가 그렇게 매몰차게 찼는데 내가 인제 와서 번호교환이라도 하자고 하는 건 좀 모양 빠지지….'

 

그런 생각을 해도, 저 남자를 조금만 더 알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 단칸방의 한켠을 장식했다.

 

나는 들리지 않도록 작은 한숨을 쉬고 순대의 간을 이쑤시개로 조심스럽게 찍고, 입안으로 가져갔다.

 

평소와 같은 순대 간이었지만, 오늘따라 뭔가 맛이 각별했다.

 

 

 

 

---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땐 염색한듯한, 금발에, 살짝 솟아오른 뾰족한 여우 귀, 그리고 내 자랑인 푹신푹신하고 보송보송한 금빛 털이 달린 꼬리를 보며 한 바퀴 돌아보았다.

 

어딜 가서도 꿀릴 외모는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평범한 사람보단 이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먼저 날 꼬시려 했지.

안 그래?

 

일단은 인간이 사는 곳으로 내려가야 했기에, 귀와 꼬리는 감췄다.

 

여느 때처럼, 나는 산 아래의 분식을 파는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아무일도 없을 거라고 자신하면서, 오랜만에 잔뜩 준비해서.

 

어째서인지 그 남자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경험을 한다.

마치 야호에서 이미호(二尾狐)가 되었을 때. 그 기분.

 

들에서 살던 여우가 사람이 되었을 때 사람을 동경하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떡볶이집에 들어서자 오늘은 그 남자가 없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늦나보다.

 

나는 발을 살짝 구르면서 의자에 앉아서 떡볶이와 간을 많이 달라 하며 순대를 주문했다.

 

떡볶이를 반쯤 먹어갈 쯔음. 그 남자가 떡볶이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오늘은 좀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에이 별건 아니고, 요즘 하도 부모님이 너 결혼은 언제 할 거냐! 하면서 타박해서, 맞선 좀 보고 왔어요."

 

'맞선을 보고 왔다고?'

 

청천벽력같은 소리다. 

 

'아직 제대로 알지도 못했는데,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랑 못만나게 되는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남자가 말을 이어서 했다.

 

"근데 솔직히 이 떡볶이집에서 만나는 아가씨가 더 좋아서 차고 왔어요."

 

내가 맘에든다고?

정말?

다행이네, 나도 어디서 꿀려본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인정해주면 고맙지!

암!

 

하, 내가 신선시험만 아니었어도 이미 저 남자 앞에서 꼬리 살랑이면서 아이고 낭군님~ 이러고 있었을….

 

미쳤나 봐, 200년 살더니만 드디어 돌았나 봐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물론 행복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200년 수행을 버리고 남자랑 행복하게 살고 싶진 않잖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괜찮아요?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본다.

 

착한 사람인가보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챙겨주려고 하는 거지?

 

난 구미호인데? 그렇게 아무나 막 그러면 안 돼 총각!

 

물론,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괜찮아요. 그냥 잠깐 어지러워서 그래요."

 

"정 힘들면 말해요, 상비약은 가방에 들고 다니니까!"

 

"챙겨줘서 고마워요…. 아 이름이 뭐예요?"

 

"아 시우에요. 이시우."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전 연호라고해요. 하연호. 사모할 연자에 여우 호."

 

이름을 밝혔으니까, 내 이름도 밝히는 게 예의지. 암 그래.

난 예의 바른 구미호니까.

 

어째서인지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하겠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이야기했다.

 

"독특한 이름이네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특히 여우가 남자에게 반한다고? 미친 소리다.

 

구미호는커녕, 꼬리 개수도 못 늘리는 여우들이나 그런 법이다.

 

몇십 년을 사는 야호조차 못 되는 그런 그냥 평범한 야생 여우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근데 시우란 남자는 뭔가 이상하게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내 마음을 간지럽힌다.

 

잘생긴 남자라서 그런 걸까?

 

아니다.

 

그럼 마음씨가 좋은 남자라서?

솔직히 요즘 세상에 마음씨 좋다고 좋아하기엔 너무 위험한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다.

 

도대체 왜?

 

머릿속에서 '왜?'라는 단어가 빙글빙글 돈다.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다.

 

200년 동안이나 살아온 구미호인 나도 사람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매년 태산낭랑의 선호 득선 시험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데….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이 감정이 뭔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단순히 호감이 아닌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

 

그런 감정을 어떻게든 꾹꾹 마치 내가 외출하기 전 꼬리를 눌러 감추듯 눌러 담는다.

 

오늘의 간 맛은 뭔가 평소에 퍽퍽한 그런 맛이 아닌 살짝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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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샌가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산 밑으로 내려가는 날이 되면 옷도 고심해서 골라서 입고, 화장까지 하는 그런 평범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벌써 6월이다.

여름 날씨가 가끔씩 변덕을 부려 소나기를 뿌려대는 계절이 돌아왔다.

 

봄비의 보슬보슬함과 달리 여름의 비는 짓궂은 비인지라….

 

맞으면서 가긴 싫다.

 

그렇기에 우산을 사서 들고 나왔다.

 

오늘의 내 꼬리가 해주는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올 거라고 그랬거든.

 

내 꼬리는 인간들의 기상청 일기예보 따위와 다르게 정확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그 남자를 만나러 다시 그 떡볶이집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는 이젠 나를 보며 웃으면서 인사한다.

 

"연호 오늘은 좀 늦었네?"

"에이 늦을 수도 있지~ 그러는 시우도 방금 온 거면서."

 

나는 살짝 앙탈 부리는 척하면서 말해봤다. 

 

전에는 그렇게 유혹하더니만 요즘은 오히려 내가 시우를 유혹하는 꼴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 걱정이 자라났다.

 

'쟤가 내가 구미호인 걸 알게 되면 어쩌지…?'

 

처음에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던 걱정이 커지고 있었다.

 

-툭.툭…. 쏴아아아

 

갑자기 바깥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마철은 아직인데, 역시 내 꼬리 일기예보대로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어…. 비 오네 우산 안 가져왔는데…."

 

시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밖을 쳐다본다.

 

"난 가져왔는데 같이 쓰고 갈래?"

 

잘했어. 내 꼬리.

200년 헛산 건 아니구나, 이렇게 기특한 일도 하고, 이런 구실로 시우의 집이 어딘지 알 수 있겠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순대를 집어 먹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오늘의 간은 아주 맛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우랑 같이 한 우산 아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갈 생각에 들떠버렸다.

 

 

계산을 마친 후 시우와 함께 우산 아래서 걸어가고 있었다.

 

팔이 좀 아파서 우산은 시우가 들게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우의 집은 가까운 ㅁㅁ아파트였다.

 

내가 사는 산 앞쪽에 있는 그 아파트.

그 아파트에 산다니! 가까운 곳에 사는구나! 우리 잘생긴 시우가 가까이 살다니! 

좋네~.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시우의 집에 다다를 때쯤.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길에서 내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았다.

 

그 칭찬에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꼬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그래. '꼬리'가 튀어나올 정도.

 

"아."

 

시우가 내 꼬리를 봐버렸다.

 

'시발.'

 

200년 수행이 도루묵이 되는 절망감보다.

지금 시우한테 내가 구미호라는 걸 들킨 게 더 끔찍했다.

 

꼬리가 날 배신했다.

내 신체기관이 날 배신했다고. 

시발 다 틀렸어. 망했어.

 

시우는 분명 내가 구미호인 걸 보고 날 괴물이라고 생각할 거야.

 

간이나 빼먹는 괴물.

 

분명 아침까진 날 위해서 우산 챙기라고 일기예보까지 해줬는데.

 

이 행복해야 할 순간에 날…. 배신할 줄 몰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변을 돌아다니는 행인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눈가가 촉촉해지는 느낌이 났다.

 

어째서?

왜?

 

나는 왜 들킬 걸 대비하지 않은 걸까?

왜 나는 행복한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을 걸까?

 

그냥 대화하는 게 점점 즐거웠는데?

그냥 좀 더 시우란 남자를 알아가는 게 너무 좋았는데?

 

득선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어질 만큼.

궁금한 감정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는데 어째서?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인지 내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운 아홉 개의 꼬리는 힘을 잃고 바닥에 늘어졌다.

 

평소라면 비가 고여있는 바닥에 꼬리가 닿으려고만 하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인 내가.

 

꼬리가 빗물에 젖든 말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내가 구미호라는 사실이 갑자기 싫어졌다.

 

누구보다 여우답고, 언젠가는 꼭 신선이 되어 천호가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우 곁에 계속 있고 싶었다.

 

영화나, 짧은 영상에서 보인 사랑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아냐. 이건 사랑 같은 게 아니야. 이렇게 되뇌었다.

 

근데 어째서 내 가슴이 이렇게 찢어질 듯 아픈 걸까.

 

시우는 날 보면서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하지만 도저히 눈을 마주칠 용기가 들지 않는다.

 

우산은 시우가 들고 있었기에 어느새 나는 비를 맞고 있었다.

 

웃기네, 신선이 되겠다는 나는 어디를 가고 이렇게 처량한 여우가 된 걸까?

 

비 맞은 개 마냥.

추하고, 비루하고.

 

이런 나를 보면서 경멸하겠지? 내가 자기를 유혹해서 정기나 빼먹는 요호라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너무 한심했다.

 

이런 내가 신선이 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시우 곁에 있을 리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영겁과 같은 시간이 지나자 시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호야…."

 

시우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시우가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왜 미안한데?"

 

어떤 감정의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무엇을 말하든 그건 변명이니까.

 

무엇을 말하든 그건 시우에게 하는 거짓말일 테니까.

 

그러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우에게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

그리고 변명도 하기 싫어서.

 

"구미호구나, 실제로 있는 줄은 몰랐네."

 

갑자기 시우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몸을 찌르듯이 때렸던 빗방울들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시우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말했다.

 

"난 괜찮은데. 왜 그렇게 울려고하는거야?"

 

"아..?"

 

내가 그동안 고민한 게 뭔지 모르겠다.

 

구미호라는 그거 미움받는 존재잖아?

사람을 죽이고, 간을 빼먹고.

 

'그런 존재인데도 괜찮은 거야?'

 

입 밖으로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당연하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니까.

 

"괜찮아. 난 네가 뭔 모습이라도 좋으니까."

 

어느새 내 둔갑이 풀려, 귀까지 튀어나왔다.

 

부끄러운 모습인데.

 

"꼬리랑 귀 귀엽네."

 

미움받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날 경멸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귀엽다고 해줬다.

 

정말 착한 사람이다.

 

나랑 어울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난 신선 실격의 구미호인데….

 

"괜찮아. 울지마."

 

눈가가 뜨겁다.

 

시우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준다.

 

화장이 잔뜩 번진 추한 얼굴일 텐데도…. 밝은 미소를 띤 채.

나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연호야 너는 우는 얼굴보다. 순대 간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얼굴이 더 이뻐. 그러니까 울지마."

 

아. 진짜…. 너무 착한 사람이다.

이런 바보 같은 구미호라도 좋은 거야?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내 핸드폰에는 다른 구미호나 요호 친구가 아닌 사람 친구의 이름이 하나 등록되었다.

 

아니 이름이 아니라 호칭이지.

 

[낭군님]

 

그래. 이거면 된 거겠지.

 

 

그래.

구미호인 거 다 들켜서 이젠 어디 가서 신선이 되니 뭐니 이런 소리는 못하겠지만….

 

하…. 개 같은 호생이지만 그래도 행복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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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7월 22일.

 

시험날이 되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시우한테 꽈똑 하나를 보냈다.

 

[시험 잘 보고, 나도 시험 쳐야 해서 답장은 못 해줄 거 같아! 내일 보자.]

 

나는 솔직하게 시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놨다.

 

200살 먹은 구미호라는 거부터 태산낭랑의 득선 선호 시험까지. 전부다.

 

신선이라는 게 한국의 공무원 비슷한 거라고 말하니까 놀라는 건 좀 웃기긴 했다.

 

근데 맞잖아? 산 관리하면서 길 잃은 사람 집 좀 보내주고, 민원 들어오면 민원처리하고 그게 공무원이지.

 

하여간 그렇게 시험을 치고 나니까 이젠 후련했다.

 

내년부터는 안친다. 망할 놈의 태산낭랑년. 

 

그냥 시우랑 알콩달콩하면서 걜 내 기둥서방으로 쓰는 게 더 행복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냥 시험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편안해졌다.

 

작년까진 어떻게든 신선도 되고 천호도 되겠다고 아득바득 이 악물고 노력했는데.

 

그래도 뭐, 시우라도 남친으로 건졌으니 개이득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시우의 7급 공무원시험 결과나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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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드였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해피엔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8월이 지나갈수록 시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시우를 보살펴줬고, 시우도 나름대로 잘 견뎌냈다.

 

하지만 월말에 들려온 소식은 '불합격'

시우도 노력 많이 했지만,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다만.

 

집으로 여우 한 마리가 물고 온 소식은 달랐다.

 

[하연호. 당신은 이제부터, 선호로서 관악산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밑에는 어쩌고저쩌고 너 신선이니 처신 잘해라 뭐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야. 자기는 이제부터 구미호가 아니라 선호님 이렇게 불러야 해?"

 

"아니 쪽팔리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

 그렇게 부르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시우의 등짝을 치면서 말렸다.

 

하지만 좀 싫었다.

 

그토록 원하는 신선이 되었지만, 산에 들어가면 시우랑 못 만나잖아?

 

이게 너무 싫은데?

 

나는 신선직을 포기할까 고민했다.

왜냐면, 내 행복을 포기하면서 신선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뭐 정확히는 선호님 소리 듣는 거지만….

 

 

.

.

.

 

 

나와 시우의 사랑은 한쪽이 최후엔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각오한 거니까 괜찮은 거겠지. 이런 생각을 해도 시우가 불행할 수밖에 없고.

 

시우가 괜찮아도 내가 불행해질 수 있는 거니까.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 간의 사랑은 항상 이렇게 끝나더라.

 

특히 소설이든, 만화든, 영화든 다 똑같더라. 

 

거지 같네 진짜.

 

그렇게 생각했을 때. 태산낭랑이 특별전형으로 시우를 신선으로 채용한다고 들었다.

 

뭐 구미호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대한 사람이고, 그 반려자가 선호니까 괜찮다나? 이래도 괜찮은 건가?

 

누군 200년 동안이나 노력했는데 인간이 몇 년 동안 공부한 거로 그걸 통 쳐준다는데?

 

이런 생각도 조금 들었다.

 

 

 

근데 가장 중요한 건 뭐냐면.

 

우리들의 사랑이 동화에서나 나올 그 멘트로 끝났다는 게 중요하다.

 

'나와 시우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래. 그 멘트 물론 남들이 보기엔 나와 시우 사이가 행복하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

 

근데 나도 행복하다고 하고, 시우도 행복하다고 하는데 어쩌겠어? 

 

그렇지?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그리고 선호와 인간이 연애를 하는 건 많은 일도 아니고 흔한 일도 아니었다.

 

한동안 선계를 뒤흔들 파격적인 인사채용에 불만을 가진 야호들도 있었지만, 몇몇 야호들은 나랑 시우가 행복하게 사는 걸 보고선 "아 태산낭랑님은 다 생각이 있으셨구나~" 하면서 넘어갔다.

 

뭐 못 넘어간 애들은 어떻게 됐냐고?

그건 이 이야기를 읽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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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여우박이입니다.


예전에 소재로 올려보려던 천호를 꿈꾸는 구미호와 공시생의 이야기.

하지만, 소재로 쓰기엔 장편으로 끌고가긴 힘들어서 단편으로 이런 즐거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재미있었는진 모르겠습니다. 쓸땐 재미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적고나서 올리려니 좀 떨리네요.


제가 생각하는 순애란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소년, 소녀가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 참 좋더라고요.


물론 주인공쨩은 소녀라기엔 200살 구미호지만요.


그럼. 이번 이야기는 이걸로 끝 입니다. 

 


달달하고 행복한 이야기가 잔뜩 올라오길 빕니다!



ps. 결말 부분이 좀 개연성이 없게 느껴질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신선이 되는걸 택한다 한들, 시우는 불행하고, 신선이 되는걸 포기하면 결국 연호가 불행해지는 이야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한국 여우설화는 다 이렇게 불행하게 끝나는게 싫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