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언제나 쓰잘데기 없는 걸 묻는군."


엘프는 칼로 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는 작업을 계속 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딱히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저 너희들이 미련하고, 멍청하고, 어리석고, 충동적이고, 오만하고, 열등하다고 생각할 뿐이지."


"그게 미워하는 거 아니야?"


"너는 땅을 기어가는 벌레를 보고 밉다는 마음이 드는가?"


"그 벌레가 뭐냐에 따라 다르겠지."


"우리도 마찬가지다.

너같이 쉴새 없이 까불거리고, 건방지고, 방정맞고, 경솔하고, 짜증나는 인간이라면 미워하겠지만, 대다수의 인간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가는 벌레처럼 여길 뿐이다."


"거 참 너무하네."


인간이 삐진 척 툴툴거렸다.

하지만 엘프는 인간이 진짜로 삐지거나 화가 난 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그에게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인간은 엘프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자 '안 통하네'라고 중얼거리고는 다른 나무를 깎기 시작한 엘프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왜 인간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묻지. 너희가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여길 요소가 하나라도 있나?

수명은 물론, 육체적인 힘도, 마법적인 능력도, 심지어 지적 능력도 전부 우리보다 부족하지 않나."


"숫자는 인간이 엘프보다 훨씬 많지."


"숫자가 많다고 우월하다면 이 세계의 최강 종족은 고블린이겠군."


"과학 기술은 우리가 더 발전하지 않았나?"


"그래서 그게 우리 엘프의 마법보다 최대치가 더 높거나 효율적인가?

그 잘난 비행정도 우리 엘프의 비행 망토보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나."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건 인간이지."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도 분쟁이 일어나는 땅을 진정 자신의 땅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럼, 용사는 어때?"


멈칫.

엘프의 손이 멈췄다.


"용사는 오직 인간에게서만 나오잖아. 성인도 그렇고."


"... 그건, 신의 힘이지 인간의 힘이 아니다."


엘프가 다시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그런게 어딨어. 어차피 인간이 쓸 수 있으면 인간의 힘이지."


"..."


엘프는 인간의 말을 무시하고 나무만 계속 깎았다.

그 모습을 본 인간이 한 방 먹였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봐봐, 너도 할 말 없지?"


"..."


팍, 팍!

엘프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나무가 파이는 소리가 더 크게 났다.


"야, 그러다 다치겠다."


"..."


팍! 팍! 팍!

엘프가 이를 악다물면서 그의 턱이 살짝 올라가고 목에 힘이 들어갔다.


짜증과 분노가 잔뜩 묻어나오는 엘프의 얼굴을 보며 인간이 머쓱하게 말했다.


"아니, 말싸움에서 질 수도 있지 뭘 그걸로 그렇게까지..."

"너희는 그게 문제다! 자신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알려고 하지도 않아!"


콱!

엘프가 버럭 화를 내며 깎던 나무를 땅에 꽂아 버렸다.


"언제까지고 신이 네놈들의 곁에 있을 줄 알지!

신의 가르침은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고 편하게 사는 주제에, 신이 주는 힘은 당연히 자기 건 줄 알고 있어!

기도하면 은총이 내려오고, 땅을 갈면 먹을 것이 나오고, 가죽과 고기를 부족함 없이 탐할 수 있는 걸 당연히 여긴다!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신의 능력을 탐하고, 자연을 발 아래 두길 원하며 해서는 안 될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지!

너희의 신이 관대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너희 종족은 몇 번은 절멸당했을 거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엘프는 격한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마에서부터 뒤로 쓸어 넘겼다.

인간은 감정을 삭이는 엘프를 보며 무언가 생각하다가 물었다.


"... 엘프 용사를 말하는 거야?"


숨을 고르던 엘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어쩌다보니. 여기저기 집도 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전설 같은 걸 많이 듣기 마련이거든."


"전설... 너희들은 그걸 전설로 알고 있나.

하긴. 인간은 수명이 짧으니 무엇이든 금방 잊어버리곤 하지.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던지 간에."


엘프는 무언가 쓸쓸한 말투로 혼잣말을 했다.


"그래, 맞다. 우리의 피에 흐르는 씻을 수 없는 과오지."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


인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엘프들이 용사를 중심으로 신에게 도전했다가 천벌을 받았다는 것 뿐이야."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그 천벌이 뭐였는지, 그 이후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하나도 몰라."


엘프는 자신이 아는 내용을 말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땅에 꽂은 나무를 보았다.


"... 그래, 많은 사람이 아는게 더 낫겠지."


엘프는 조만간 있을지도 모르는 마물의 침공을 대비하여 나무창을 만들고 있던 것처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재앙을 미리 경고 해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엘프들도 과거엔 너희 인간들처럼 오만했고 어리석었다.

그래서 분수에 맞지 않는 걸 탐했고, 그 결과 신에게 버림받아 지금까지 용서받지 못하고 있지.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제는 그 반역의 결과물인 세계수가 아니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세계수가 반역의 결과라고?"


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는 신의 힘을 억지로 가두어 기른 나무다.

원래는 그 세계수를 통해 신의 힘을 빼앗아 원할 때마다 그 힘을 사용하려고 했었지.


그러나 충분한 숫자의 세계수가 만들어지기 전에 신이 우리를 버렸다.

그리고 그때서야 우리는 세계수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신이 우리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지.

신이 우리를 버린 후에는 단 한 그루의 세계수도 기를 수 없었으니까.


그 뿐만 아니라, 세계수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수를 써도 식물과 가축을 기를 수 없었다.

이미 있는 것들을 채집하고 사냥할 수는 있었지만, 원래 우리가 먹던 것에 비하면 맛도 영양도 형편없었어.


가장 심각했던 건, 신의 가호 없이는 마물과 마족들의 침입을 막을 수 없었다.

성벽을 쌓고 마법과 강철로 그것들을 죽인다고 한들, 그 시체에서 나오는 마기가 계속해서 쌓였으니까."


"마기가 쌓인다고? 그런게 가능해?"


"그래서 너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다.

마기는 따로 해주하지 않으면 쌓이는 게 기본이다.

그것 때문에 아직도 마족들의 영토가 남아있는 거고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지.

그럼에도 너희 인간들이 그 사실을 모르는 건, 너희의 신이 계속해서 그 마기를 지워주기 때문이다."


"그럼 드워프들은? 드워프들도 그들의 신이 계속 마기를 지워주는 거야?

그렇다기엔 드워프 용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드워프들 역시 우리와 함께 신에게 반역했었으니 용사가 나올 수가 없지.

우리가 신성력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려는 욕심으로 반역을 일으킨 것처럼, 드워프들은 궁극의 금속과 제련술에 대한 욕심으로 반역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리가 신에게 버림받았을 때, 그들은 마법을 빼앗기고 마기를 피해 땅속 깊숙이 숨게 되었지.

그들이 땅속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마기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있기에 그런 선택을 했을 거다.


우리 엘프와 드워프의 사이도 나빠진 것도 그때부터다.

엘프는 드워프에게, 드워프는 엘프에게 실패의 책임이 있다고 여겼거든.

우리가 먼저 드워프에게 제안한 건지, 드워프측에서 우리에게 알아서 온 건지는 모르지만."


"모른다고? 왜?"


"주모자들은 신이 우리를 버릴때 죽어버렸으니까."


간단하게 이유를 설명한 엘프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우리들은 이 세계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그런 일을 겪고도 정신을 못 차린 일부는 아예 악신을 섬기기 시작해서 너희가 말하는 다크 엘프나 셰이디 드워프가 되었지.


한편으로는 엘프와 드워프가 사라지고 나자 인간들이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마물과 마족이 활개치느니 차라리 너희가 영역을 넓히는 게 나았기에 너희를 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인간들은 지금보다도 훨씬 미개하고 보잘것 없어서 우리의 도움 없이는 마족과 마물을 이겨낼 수 없었으니까."


인간은 속으로 이 순간에도 엘프 특유의 선민의식을 숨기지 않는 상대가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뭐... 너희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겠어.

근데 그게 우리가 신의 은총을 당연하다 생각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우리가 너희를 도와주면서 수도 없이 많은 타락을 보았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신의 힘도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며 신의 능력을 빼앗으려고 하는 이들을 보았고

신이 자기에게 응답하지 않는다고, 혹은 더 큰 힘이 필요하다고 악신을 섬기는 무리가 생겨나는 것도 보았고

용사가 가진 힘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된다 생각하여 용사를 죽여버리는 위정자들도 보았고

심지어 신보다 마족이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하여 신을 배신하고 마족의 편에 붙어버리는 용사도 보았다.

우리는 그때마다 인간도 곧 우리처럼 신에게 버림받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틀렸다.

너희의 신은 그 어떤 순간에도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용사와, 더 많은 성인과, 더 많은 영웅들을 만들어줬지.

심지어 인간이 같은 잘못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더라도 다음 위기가 찾아오면 새로운 용사를 만들어줬다.

너희의 신전에는 늘 신성력이 존재했고, 가장 큰 신전부터 가장 작은 신전까지 같은 은총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너희에게 부러움과 한심함을 같이 느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버림받지 않는 너희가 부러웠고, 그 무한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알지 못하는 너희가 한심했다.

그리고 동시에... 두려워졌다."


"두려워?"


엘프가 인간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편을 들어주는 너희의 신이, 결국 인간을 버리는 순간이 온다면...

대체 그게 어떤 상황일지, 또 그땐 대체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상상해봤나?"


"..."


인간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또, 엘프가 느끼는 두려움을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그것은 신이 자신들을 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이제야 알게 된 한 명의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엘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나처럼 몇몇 동족들이 세계수의 영향력을 벗어난 땅에서 돌아다니는 거다.

혹시라도 위험의 징조가 보인다면 그 즉시 경고하고 대응해야 하니까."


"근데 왜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 이야기를 안 해준 거야?"


"했었다. 몇 번이고. 나도 했었고, 내 동족들도 했었지."


엘프가 다시 나무를 집어들며 말했다.


"하지만 너희는 금방 잊어버리더군.

몇 번 쓰고나면 부러지는 이 나무창처럼, 너희에게 경고를 해봤자 몇 년도 안 가서 전부 잊어버렸다.

우리도 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하는 것에 지쳐버려서 어느 순간부터 말하지 않게 되었다."


"... 그럴만 하네."


"이제 혼자 있고 싶군. 더 할 얘기가 없으면 가라."


"그래. 알겠어."


인간은 다시 작업을 시작한 엘프를 더이상 귀찮게 하지 않고 떠났다.













왜 맨날 용사는 인간일까 생각하다가 써 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