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호산

죄다 호호성식 전략을 구사한 똥별 천지인 북한군에서

유일하게 기동전과 화력전을 이해한 인물이다.

방호산은 김일성의 낙동강 총공세, 일명 8월 공세를 병신이라고 봤는데

말이 총공세 운운이지 실제론 보병 스팸 꼴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산을 기점으로 미군과 UN군의 물자와 병력이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애초에 낙동강은 커녕 대구 하나도 못 뚫을 지경이었다.

이에 방호산은 두 가지의 계획을 내놓았는데

1: 기갑 끌어모아 충격군 만들고 마산-부산 루트에 집중하여 적들의 후미를 끊는다
(한타)

2: 전면적 후퇴

당연히 대부분 대대장 경험도 없는 북한 수뇌부는 1번을 택했고

이에 방호산은 북한의 몇 없는 기갑부대를 배치받아 마산 공격에 들어간다.

이때 조공 성격으로 진행된 공세가 다부동(칠곡) 전투, 실제로 병력 자체는 다부동에 동원된 북한군 숫자가 더 많았지만

전차부대와 모터사이클 부대를 운용한 방호산의 마산 공략군이 질적으론 훨씬 높았다.

실제로 이렇게 진행된 마산 전투는 미군의 신속한 기동이 아니었다면 방호산의 기동전에 마산 함락이 초일기로 들어갔지만

미군 특임대가 마산 주변 야산에서 죽기살기로 뻐팅기면서 방호산의 기동전 계획을 박살냈고

마산 주변 섬들에 주둔한 국군 해병대 병력이 방호산의 후미를 공략하자 북한군의 진격은 순식간에 돈좌된다. 뭣보다 미군의 항공 지원이 압도적이었고

하지만 이런 분투에도 불구 방호산이 신속하게 병력을 철수시키는 바람에 북한군은 장비들을 대거 상실했을 뿐 숙련병들을 상당수 보존하는데 성공한다.

참고로 원래 방호산은 마산 공략을 이틀 먼저 개시할 예정이었는데

김일성이 쓸데없이 목포 및 여수를 점령하라고 지시하는 덕분에 빈약한 북한 해군 전력상 전략적으로 별 쓸모없는 목포와 여수 공략에 이틀을 낭비해야했고

심지어 각각 1개 대대 병력 수준의주둔이 필요하여 병력 낭비도 있었다. 전쟁을 호이식으로 하는 근시안적 전략인 셈

마산 전투가 끝난 뒤 인천상륙이 개시되자 방호산도 별 수 없이 쭉 밀려났지만 다른 사단장들이 거의 홀몸으로 튄 것에 비해

숙련병 보존의 중요성을 인지한 방호산은 최대한 병력을 재편하면서 후퇴했고 덕분에 방호산이 살려낸 4사단과 6사단은 북한 최후의 전력으로서 톡톡히 활약했다.

물론 다른 나라였다면 구국 영웅 취급받았겠지만

연안파(중국 공산당에서 활약한 파벌) 소속이었기에 1958년에 숙청, 59년에 사망한다(추정, 정확한 연도는 불명이며 사인도 모름)



여담으로 한국에 주둔한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가 가장 위험했던 순간으로 뽑은 게 바로 이때의 마산 진군이다.

지금은 마산은 무슨 파주도 넘을까 말까지만

출처:https://m.dcinside.com/board/rome/768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