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카노사의 굴욕을 아는가? 이름은 한번이라도 들어봤을 것이다. 카노사의 굴욕을 나타내는 당시의 그림을 보도록 하자.



황제가 무릎 꿇은 상대는 교황이 아니다. 교황은 그 옆에서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럼 도대체 저 인물은 누구란 말인가? 놀랍게도 황제 앞의 인물은 바로 여자이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마틸다 디 카노사’



 카노사 가문 최후의 불꽃이자, 후일 ‘토스카나의 마틸다’로 불리는 복수의 여전사인 그녀이다.



마틸다는 토스카나의 백작 보니파치오의 큰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보니파치오는 레지오, 모데나, 만토바, 브레시아, 페라라에 영지를 가진 대영주였다.



그러나 그는 대영주로써 이색적인 행보를 보였다. 부패한 기득권에 동참하는 대신, 썩은 교회를 쇄신하는 운동에 앞장섰다. 카노사 가문은 개혁파 수도사들을 암살의 위협에서 보호하고,개혁의지가 있는 성직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보니파치오가 개혁파 수도사들을 보호했지만, 그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 부패한 보수주의자들이 이 개혁적 대영주를 암살해 버린 것이다. 카노사 가문의 후계인 마틸다와 아들, 둘째 딸은 모두 핏덩어리였다. 어머니 베아트리체는 광대한 영지를 탐내는 영주들의 위협에 직면했다. 베아트리체는 가족과 영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의 친척인 남 로렌 지방의 공작 ‘고트프리트 3세’와 재혼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고트프리트 공작은 지나치게 야심만만한 사내였던 것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에 반기를 들고, 자신이 이탈리아의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고트프리트가 북 이탈리아 일대를 장악하자, 황제 하인리히 3세는 진노했다. 1055년, 역적을 벌하고자 황제는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고트프리트 역시 황제의 이탈리아 남하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 즉시 아내 베아트리체와 마틸다 등을 버리고, 자신의 영지 로렌으로 도망쳤다. 휘하 가신들도 황제의 대군 앞에 줄행랑쳤다.



카노사 성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가족이 몰살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 베아트리체는 행동에 나섰다. 도망쳐 버린 남편 대신 황제의 용서를 빌기 위해, 죄인의 복장을 하고 찾아갔던 것이다.



카노사 가문의 공주 취급받으며 자란 10살 마틸다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언제나 화려하고 화사한 의상을 입은 백작부인인 어머니가 누추하기 짝이 없는 찢어진 베옷을 입고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이 부당하게 정복한 영지의 반환을 맹세했다. 그리고 황제가 부디 자비를 베풀어 아이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영지를 남겨줄 것을 구걸했다.



그러나 황제의 눈빛은 냉담했다.



코웃음을 치더니, 모녀를 그 자리에서 체포하라 명했다. 베아트리체는 절규하며 간청했지만,  병사들은 그녀와 마틸다를 거칠게 잡아 감금했다.



그렇게 모녀가 독일로 끌려가는 와중에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카노사 성에 남겨 두고 온 어린 아들과 어린 딸이 모두 급사했다는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들을 수 없었다. 허나 모녀는 직감했다. 건강했던 자식들이 급사할 리가 없다.  황제의 손에 처참하게 살육되었다고 말이다.



베아트리체는 그 순간 자지러지며 비명을 질렀지만, 옆의 10살 난 마틸다를 보고 기적적으로 정신줄을 잡았다. 그녀는 두 손이 닳도록 빌고 굴욕적으로 마틸다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황제는 예쁘장한 어린 아기 하나는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여 감춰진 여자 아이의 눈을 보았다면, 황제는 필시 후회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비참하게 죽은 형제와 절규하는 어머니를 보며 마틸다는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반드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쳐 넣을거라고..



마틸다, 그 처절하고 장엄한 복수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악문 소녀는 잃어버린 토스카나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4개국어를 비롯한 다양한 지식을 습득했다.



 앞으로 다가올 왕좌의 게임을 위해서.



몰락한 집안의 그녀는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공주님의 드레스를 집어던졌다. 대신 남자들 틈에서 기사 훈련을 받았다. 검을 들고, 활을 쏘고, 말을 몰았다. 손바닥이 벗겨지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도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어느새 백마를 타고 전장을 질주하는 기사가 되어 있었다. 그녀를 따르는 용맹한 병사들도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마틸다가 검을 든 여전사로 성장 한 후 일 년 뒤인 서기 1077년,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사망했다.



황태자였던 당시 6살었던 하인리히 4세는 가신들에게 황제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로렌으로 도망쳤던 고트프리트3세의 야심이 다시 한 번 일어났다. 고트프리트는 로렌의 공작으로써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고 황제를 도울 것을 전했다. 대신 로렌과 토스카나에 대한 소유권을 어린 황제가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황제가 수락하자 고트프리트 3세는 이탈리아로 남하해, 예전에 하인리히 3세 편을 들었던 도시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교황이 사망하자, 고트프리트의 야망은 더욱 커졌다. 그는 차후를 대비한 왕좌의 게임을 시작했다.



치열한 정치 공작 끝에 자신의 동생을 교황 스테파누스 9세로 임명한 것이다. 향후 자신이 이탈리아의 왕좌에 올랐을 때 교회의 승인과 함께 대관식을 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모든 포석을 마치고 기반을 다지던 중 고트프리트 3세는 사망하고 만다.



운명의 장난인가, 주사위는 뜻하지 않게 몰락한 가문의 여인에게 흘러 들어왔다. 바로 베아트리체 그녀다. 그녀는 죽은 남편이 마지막으로 하고자 했던 일을 떠올렸다. 부패한 카톨릭 교회의 개혁. 그것이야말로 카노사 가문의 일념이었다.



또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기도 했다. 베아트리체는 교회 개혁운동을 시작하며, 가장 청렴한 수도사인 힐데브란트를 찾아갔다. 힐데브란트는 당시 매수와 혈연과 부정이 난무하던 교회에서 신앙에 대한 열정만으로 버텨온 깨끗한 성직자였다. 베아트리체의 지원 속에 마침내 힐데브란트는 교황에 오른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그레고리우스 7세이다.



교황은 바로 개혁에 돌입했다.



 첫째, 성직자의 풍기를 바로 세운다.



그레고리우스는 모든 성직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을 감수하고 당시 여자와 결혼했던 신부들을 모두 이혼시켰고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시켰다.



둘째, 이슬람에게서 성지를 탈환을 준비한다.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으므로, 후대 교황을 위해, 병참, 외교, 작전등 준비 작업만 진행 했다.



셋째, 황제의 성직자 서임권을 철폐하여, 정치에 종교가 휘둘리는 것을 막는다.



마지막 세 번째의 것이 큰 문제였다.



당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강력한 황제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6살 어린 나이에 황위를 이어 받았을 때, 제후들이 그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을 말이다.



서임권 문제는 황제가 전쟁을 불사할 수도 있었다. 교황은 어려운 시절, 자신을 비롯하여 청렴한 수도사들을 보호해준 카노사 가문을 잊지 않았다.



1076년, 마틸다의 어머니 베아트리체가 세상을 떠났다.



교황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카노사 가문의 본성인 카노사 성을 마틸다에게 수여했다.



핏덩어리 동생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절규하는 어머니가 질질 끌려가고 가문이 몰락한 그 곳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카노사 가문의 정당한 계승자의 귀환이 이루어졌다



“카노사여, 내가 돌아왔다!”



가신들이 다가와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두 가지 선택입니다, 주군. 이탈리아 북부 지방은 황제의 영토와 교황의 세력권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틸다의 머릿 속에, 엎드려 처절하게 애원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렿다. 피어나지 못한 어린 동생들의 처참한 죽음도 기억이 났다.



10살 소녀의 눈동자에서 일렁였던 복수의 칼날이, 지금은 거대한 대검이 되어 춤을 추었다.



마틸다는 검을 뽑아 말했다.



“나는 기꺼이 그리스도의 전사가 될 것이다.”



드디어, 신성로마제국을 향해 마틸다는 복수의 칼을 뽑았다. 그녀의 병사들은 전투에 앞서서 항상 이렇게 외쳤다.



“마틸다와 성 베드로를 위하여!”



그 무렵, 황제는 어렸을 적 자신을 무시했던 제후들과 분투 중이었다. 하인리히 4세는 차근차근 세력을 키워 나가며, 제후들을 찍어 누르거나 모략으로 제거하며 힘을 키워갔다.



그 때 그레고리우스 7세가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철폐하자, 황제는 분노했다. 아버지 하인리히 3세처럼 이탈리아로 군대를 이끌고 동원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왕좌의 게임을 할 수 있는 자는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토스카나의 백작, 마틸다도 그 즉시 게임을 시작했다. 황제가 남하하면 교황이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족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정보를 흘린 것이다.



황제는 자신 밑의 주교들을 동원하여 교황을 폐위할 것을 선동했다. 황제가 주춤한 사이, 마틸다는 교황에게 주교 회의를 열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황제를 자극할 수 있는 자극적이고 대단한 문구를 발표한다.



“돈으로 성직자를 산 황제의 고문 주교들을 모두 파문한다. 또한 교황은 부정한 군주를 폐위시킬 수 있다. 그것이 황제라 할지라도!”



포고문을 들은 젊은 황제는 격분했다. 그리고 황제는 마틸다가 예상한 바와 같이, 아주 정확하게 반응 해주었다. 근거 없고, 유치하기 짝이 없이, 감정적으로 말이다



“교황은 그동안 부정과 악행을 저질러 왔다, 그는 교황으로써 자질이 없다. 교황은 토스카나의 마틸다에게 흑심을 품어, 더러운 관계에 있다. 따라서 가짜 수도사 힐데브란트를 폐위하노라.”



반박할 필요도 못 느끼는 유치한 포고문이었다. 그레고리우스7세는 부패 속에서 가장 청렴하기로 유명한 수도사였으며, 누가 봐도 부들부들 대며, 가장 쪼잔한 방법인 여자문제로 그것도 근거없는 내용으로 비방한 것이다.



교황은 포고문을 받은 그 즉시 황제를 파문했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햇던 신하들은 그 서약이 무효가 되었음을 알렸다.



황제 밑의 주교들은 그 소리를 듣고 겁을 먹고 일제히 교황편으로 돌아섰다. 하인리히 4세 반대파 제후들은 바로 교황 편으로 돌아섰다. 황제가 이기면 기득권이 침해받기 때문이다.



화가 난 황제는 군대로 교황을 치려했지만, 동조하는 제후들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마틸다와 교황의 계략에 완전히 빠진 것이다.



황제를 지지해 온 주교들마저 1077년 2월2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종교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황제가 그 때까지 파문을 해제 못하면, 후임 황제를 선출할 것이라는 통보와 함께.



통보를 받고 하인리히 4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결국 군사를 동원하는 대신 직접 교섭하기로 마음먹는다. 로마로 향하던 중, 교황은 이미 아우크스부르크로 떠나는 중이었다.



 황제는 교황이 도중에 카노사 성에서 머무른다는 소식을 접하고 카노사로 향한다.



<마틸다의 복수>



황제는 용서를 구하기 위해 누추한 털외투만 걸치고 성 밖에서 서 있었다. 그의 곁에 황후 베르타와 어린 아들이 서 있었다.



마틸다는 냉정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22년전의 황제가 그러했듯이. 마틸다의 종군 신부였던 도니초가 1115년 완성한 <Vita Mathildis>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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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4세는 마틸다에게 말했다.



“그대는 따지고 보면 나의 육촌 누나이다. 나의 육촌 누이여 그대가 나를 위해 변호를 좀 해주시오.”



황제는 마틸다에게 애걸했다. 물론 그 역시 속으로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성문 밖에서 금식하며 버티기를 3일,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문을 열고 황제를 만났다. 황제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자, 교황은 파문을 거두었다.



교황은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마틸다는 권력자가 다시 힘을 잡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복수를 품은 자가 얼마나 무서운가. 마틸다는 참된 뉘우침 따위를 믿지 않았다. 향후 수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황제가 무방비 상태로 우리 진영에 와 있다.



거기다 독일의 제후들은 황제가 떠나자 교황을 등에 업고 제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틸다는 황제를 용서하면 절대 안된다고 말했다. 오히려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황제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안된다면 영구적인 연금이라도!



그러나 교황은 너무 깨끗한 수도사였다. 전임 교황처럼 정치와 모략과 술수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독이었다. 교황은 사람을 믿었고 황제의 회개를 믿었다.교황은 황제를 용서했다. 그리고 파문을 거두었다.



마틸다는 그 순간 보았을 것이다.



파멸로 치달아가는 교황의 운명을.



그 소식은 즉각적으로 북방으로 퍼져나갔다.



<황제의 반격>



믿을 수 없는 소식에 황제에 반기를 든 영주들은 당황했다.



‘말도 안돼, 군대도 없이 제 발로  들어간 적을 놔주었다고? 그것도 아무 위해 없이?’



교황은 이미 황제를 용서했다. 영주들은 반란의 명분을 잃었다. 오히려 반 황제파가 누구인지 황제에게 알려준 꼴만 된 셈이다. 이에 반대파 영주 중 일부가 황제파로 슬며시 붙는 등, 서로 뒷통수를 치며 내전이 일어났다. 황제는 자기들끼리 자멸해가는 것을 지켜보다 각개격파 하며, 내전을 진압했다. 반대파를 모두 숙청한 직후, 황제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파문을 선언했다. 교황이 뒤늦게 후회했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황제는 대립교황을 세우고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황제군 일부가 카노사로 침공했다. 용병대는 여자가 이끄는 카노사군을 비웃었다. 그러나 마틸다는 그녀가 왜 카노사의 불꽃인지 증명했다. 마틸다는 카노사 성 전투에서 황제군을 격퇴했다.



하지만 황제는 주력군을 이끌고, 교황이 도망간 베드로 성당에서 신성로마황제의 정식 대관식을 치루었다. 성 안젤로 요새로 피신한 교황은 남부 노르만족의 도움을 요청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오지만, 노르만족의 약탈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쫒겨난다. 남부 살레르노에서 교황은 다시 황제를 파문하지만, 아무 효력도 없었다. 교황의 머릿속에 카노사에서 황제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마틸다의 음성이 아른 거렸다. 결국 1085년 교황은 살레르노에서 사망한다.



황제는 결국 승리했다.



교황에게만.



마틸다에게는 아직 아니었다.



하인리히 4세는 이제 복수의 칼날을 마틸다에게로 향했다. 황제의 대군이 카노사를 연일 침공했다. 마틸다는 직접 말의 고삐를 쥐고 검을 뽑아, 병사들 앞으로 나아갔다.



병사들은 소리쳤다.



“마틸다를 위해! 성 베드로를 위해!”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마틸다와 그의 병사들은 용맹하게 싸워 이겼다. 그리고 마틸다는 단순히 싸움만 잘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교황이 사망하자, 황제와 교회 모두 혼란스러워 했다. 이 때 마틸다는 가장 청렴하고 개혁적인 주교, 우르바누스 2세를 선출했다. 로마 시민들은 이 청렴한 교황을 열렬히 지지했다.



게다가 후방의 제후들을 배후 조종하여, 황제의 보급로를 끊임없이 약탈했다. 마틸다는 황제의 본대를 무력으로 막아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책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욕망과 야심에 가득 찬 군주를 알아채는 눈이 탁월했다. 야심만만한 황제의 아들 ‘콘라드’가 그녀의 투망에 걸려들었다.



교황과 자신의 관계를 바탕으로 콘라드에게 이탈리아의 왕을 만들어 준다고 미끼를 준 것이다. 콘라트는 이탈리아 왕위에 눈이 멀어, 황제인 아버지를 공격했다. 마틸다는 또한 황제의 최측근들을 돈과 권력으로 유혹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황제의 부인인 프락세디스마저, 아들의 영광을 위해 남편을 배신하고 마틸다가 있는 카노사로 망명했다.



황제는 황당해 하면서 둘을 저주했다. 그는 차남을 황태자로 지목하고 자신의 복수를 부탁했다. 그러나 마틸다의 공작은 무시무시했다. 하인리히 5세마저도, 마틸다에게 넘어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교황에게 붙었다.



마틸다는 황제의 장남 콘라트에게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통합왕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어떠한 영지도, 신하도 없는 이름뿐인 황제 자리었다. 책략에 넘어간 것을 알아차린 콘라드는 후회하지만, 때는 늦었다. 홧병이 걸린 콘라드는 27살의 나이로 죽었다.



황제의 둘째 아들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를 납치한 다음, 압박해 강제로 황제가 됐다. 후일 하인리히 4세는 백성들의 도움으로 다시 황제로 복귀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말라죽어가듯 숨을 거두었다.



마침내, 기나긴 시간이 지나고, 신성로마제국과 마틸다의 싸움은 마틸다의 승리로 끝이 났다.



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맹세했던 10살 소녀의 여정은 베니스를 제외한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대영주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했던 마틸다에겐 남자가 없었던 관계로 카노사 가문은 그녀를 끝으로 대가 끊기게 된다. 어쩌면 중세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통일을 꿈꿀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토스카나 백작가였지만 마틸다 사후 그녀의 영토는 조각조각이 나 피렌체, 밀라노 공국 등 르네상스를 흔드는 도시국가가 된다.



그래도 그것은 먼 후대의 일.



복수의 눈물을 흘렸던 소녀가 택했던 길고 긴 여정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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