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dogdrip/21583512

념글에 링크 있길래 보게 된 에타글

이미 념글에서 성매매에 대한 구조적 접근이 설명되었는데 이에 더해 에타글과 관련하여 다른 논점에서 보강하겠슴.

도덕적 관점은 다뤄지지 않아서 한번 써봄미다.


에타글 저자는 성매매 반대를 주장하며 세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그 중 도덕적 차원에서 제시되는 첫번째 논거만을 다루겠다. 요약하면 이렇다


1. 성매매는 인간을 대상화하기 때문에 나쁘다.

2. '대상화'란 인간을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수단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매매는 인간을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게 왜 수단으로 대하는 것과 양립불가능한지,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왜 나쁘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따로 해명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런 류의 주장이 흔히 그렇듯이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라는 칸트적 정식을 저자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한다면 저자의 논거는 개념의 선행적 이해를 결여한채로 그럴듯함만 가장한 것이다.


위 정식을 처음 명시한 것은 어렵기로 소문난 철학자 칸트이지만 오늘날 인권개념과 맞물려서 많은 이들에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칸트를 모르는 사람들도 "사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지"라고 말하곤 한다.

그에 따라서 이 정식에 대한 개념적 오해도 널리 퍼져있다. 여기서 나는 그 오해를 조금이나마 불식시키려 할 것인데 물론 칸트를 요약해서 설명해내는 것은 내 능력 밖이므로 엄청난 비약이 필연적이다. 가볍게만 보길 바람.


우리는 정말 타인을 수단으로 대해선 안되는 것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나는 점심에 찾아간 맥도날드에서 직원을 목적으로 대했는가? 반대로 직원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런 혼란은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칸트가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자.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윤리형이상학정초>, 아카넷, 176쪽- (굵게 강조는 내가 한 것임)


칸트는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한게 아니다.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을 것을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zugleich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목적'을 일상적 용법으로 받아들여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부분이다.  

칸트가 말한 '목적'은 어떤 목표같은 것이 아니다.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같은 책, 165쪽-


"의지란 어떤 법칙의 표상에 맞게 행위하게끔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능력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오직 이성적 존재자들에서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의지에게서 그것의 자기규정의 객관적 근거로 쓰이는 것이 목적이다. 

이 목적은, 그것이 순전한 이성에 의해 주어진다면,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똑같이 타당함에 틀림없다. 

이에 반해 그것의 결과가 목적인 행위의 가능 근거만을 함유하는 것은 수단이라 일컫는다."

-같은 책, 174쪽-


이와 같이 '목적'은 의지가 법칙에 비춰 행위를 규정할때 그 객관적 근거로 쓰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인격을 얘기한다.

따라서 "인격을 존중하라.",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상대방 또한 보편법칙의 입법자로써, 스스로의 준칙에 따라 행위할 능력을 가진다는 사실(자기결정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성적 존재자라면 갖고 있는 그러한 실천이성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칸트에게 이 자율성은 인간이 존엄한 근거가 된다.


나에게 맥도날드 직원은 햄버거를 사먹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나는 직원에게 생계의 수단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로를 목적으로 대하였다. 나의 행동은 햄버거를 제공받고 돈을 지불하는 정당한 계약관계를 바탕으로 수행된 것이고 우리는 '제공받은 서비스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라는 계약의 합당한 원리를 각자 자율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돈을 안내고 햄버거만 후딱 챙겨서 도망쳤다면 이는 목적으로 대하지 않은 것이다. '신의를 저버리고 기망하여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은 이성에 의해 지지될 수 없는 원리라서 직원은 물론이고 나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보편법칙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매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록 어떤 남성이 어떤 여성을 쾌락과 욕구 해소의 수단으로 대했다고 해서 그것이 목적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걸 의미하진 않는다. 별도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당한게 아니라면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적 오해는 상당히 자주 목격된다. 특히 주로 대상화 개념과 같이 엮인다. 그러나 '대상화'라는건 수단성만을 부각하는 그 용례에 비춰봤을때 목적으로 대하지 않음도 내포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칸트를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그들은 대상화가 나쁘단 주장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칸트에 기대지 않고서 그 부당함의 논증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