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방불명

어떤 한 부류의 사람들이 우리의 일상에서 그 자취를 숨기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이상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요즘 시대의 인터넷에서 '블로거'라고 하는 존재들이 그 순의미적으로 거의 멸종에 이르러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우리는 정보를 소비하기 '바쁘다'. 

그러나 무엇인가로 바쁘다는 말은 보통 노동-생산의 활동에 대해 수식되어야 한다. 지금은 어디서 정보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2. 해부학

버츄얼-인간 또는 상상-인간을 수술대에서 해체해본다고 하면 어떤 장기와 체액 표본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나 분명 날것의 메스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상상-메스가 필요할 것이다.

의학의 예비학으로서 해부학의 최고 전제란 우리의 신체는 서로가 거의 동일한 기능 - 구조와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전제이다. 하지만 상상-인간이 우리와 다른 몸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는 반려 대상인 개나 고양이의 건강을 염려하듯이 상상-인간의 건강을 염려할 수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상황은 더욱 혼란스럽다. 이제 프레임 속 상상-인간의 울음이나 웃음이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지는가? 

하지만 그들의 몸이 돈(시장가치)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거나 하는 생각은 다소 지양해야 한다.


3. 서정시

글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과정에서 필요한 정신활동은 정말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꾸준히 읽는 것만큼이나 꾸준히 쓰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글을 읽으며 어떤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란 그런 감정들을 실어 글을 써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분명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감하는 그 감정들은 분명 기호와 의미의 체계 속에서 대응되는 것일 수는 있지만 그 대응이 확실히 전사적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텍스트-감수성이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영상 매체가 텍스트 매체에 분명히 뒤쳐지는 부분이다. 영상은 단지 감정을 편집할 뿐이다. 분노의 감정을 환희의 감정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영화에서는 폭격기의 장면을 해방의 장면으로 연결 시키지만 글에서는 전쟁 생존자의 회상 하나만으로 그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영상 컨텐츠가 범람하는 시대란 과거의 무언가를 버리고 있는 것이다. 


4. 서정시 II

글에 감정을 담아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상황적 묘사가 있고 서정적 제시의 방법이 있다. 전자는 화자가 처한 상황을 통해 화자의 정서를 환기시키고 후자는 화자의 시야 속에서 포착되는 것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분명 화자와 독자의 심리적 거리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전자를 위해서는 독자와 화자는 서로 거리를 두고 마주보게 되는데 그 교차점에는 대상이 있을 수 있다. 반면 후자를 위해서는 독자와 화자는 서로의 시야를 공유해야 하는데 시야 속 대상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조금 더 인지적인 부하가 동반될 수 있다. 

서정적 제시를 잘하려면 상황 재현보다는 이따금씩 불쑥 튀어나오는 그 감정적 투사 자체를 글에 제 새길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감정적인 수식어들을 수반한다. 그리고 '나','우리' 라고 하는 지칭어가 잘 끼어든다. 

이때 감정이 과잉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이 과잉된다는 것은 어떤 감정이 그에 맞는 감정-텍스트로 다 대응되지 못하고 있는 잉여 감정이 존재하는 경우인데 잉여 감정은 해당 글에다 작가가 무언의 싸인이나 워터마크를 남겨놓는 것과 같아서 사뭇 글에 다가가기 어렵게 할 수 있다. 시의 절제미는 그 형식성으로서 이 잉여감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용함에 있다.

이처럼 서정적 글쓰기는 어떻게 보면 계산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사 모든 일이 어느정도는 그럴 것이다.


5. 평면도형

우리가 어떤 닫힌 공간 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공간이 필요 이상으로 넓은 곳이라고 가정하지는 않는 버릇이 있다. 정말이지 그렇다, 우리는 자기네 방이 더 넓었으면 하고 또 자기네 집이 더 넓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지만 그 넓은 정도가 도시 하나 아니 대공원 하나 정도만 된다고나 하면 그 상상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곧 소름 끼치는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공간 속에 들어와 있기 위해 동시에 공간을 우리 마음 속으로 집어넣는 모종의 인지작용이 있기 때문인데 이런 방식으로 사람마다 자신의 '적정 용량'을 다른 측정 값으로 가짐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우리가 그 공간의 크기로 말미암아 "그것은 제 소유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그 한계가 계산가능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막상 아예 완전히 열린 공간으로 나가게 되면 그곳의 어떤 자연물이든 우리의 마음대로 처분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또 있다는 것이다. 

공공장소가 발생하는 그 심리적 원리는 따라서 열린 공간에서 대중들에게 가상의 닫힌 공간을 창출하는 사회적인 기술력에 달려있게 된다.


6. 중력

모든 생물의 생존 조건 중에서 무시하지 못할 것 중의 하나는 다름이 아니라 이 지구의 막대한 중력을 들 수 있다. 세포 하나마다는 그다지 큰 중력을 받지 않지만 거대한 부피를 갖는 유기체에게서는 그것을 이루는 고분자 하나마다가 본체에서 제법 떨어져 나가있지 않는 한 적잖은 부하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중력의 원리는 우리의 창조과정 그리고 본능적 단계에서부터 잘 각인되어 있는 것인데 그 본질적으로 같으나 추상적 다른 형태는 사물을 정렬하여 재배치 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능이다. 단지 그것은 꼭 직선적이지 않고 순환적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땅에 서있지' 않은 채 우리가 태어나고 또 묻힐 곳을 생각하는 것이란 분명 어려움이 있다. 토속신앙과 민족주의에서부터 가장 객관적인 과학이론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의 경우 속에서나 우리는 이처럼 속박되어있다.


7. 80km/h 규정속도제한 

전염과 전념이 똑같이 들린다는 것은 정말이지 재밌는 일이다. 무엇에 전염되는 것과 무엇에 전념하는 것은 실로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전염은 어떤 복제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원리인데 그것은 처음에는 작은 감염으로 시작하지만 이내 숙주의 내용을 잠식하여 숙주가 그것의 재생산에 밖에 몰두할 수 없게 만든다. 한편 전념은 누군가 모든 유형 및 무형의 자원을 한 목적을 위해 집중시키고 투자하여 그 행위에 골몰하는 것을 말하는데 전념의 과정에서는 실로 사고회로나 그 유형적 매개자들이 일시에 동류의 상태에 이르기보다는 강한 전염적 신호를 주고 받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전념적인 것은 어떻게든 전염적이고 전염적인 것은 실로 전념적이다. 그런데 전염없는 전념이나 전념없는 전염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건 무슨 뜻일까? 그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 오늘날의 매서운 풍경들이다. 

주파수를 맞추는 노력이 필요없는 무선 통신의 일상. 수학적 전염병 메커니즘을 적용한 숏폼 컨텐츠 업계의 게시물 추천 기능. 그것들은 실로 어떤 속도위반을 한다. 


8. 어떤 새로움

새로운 것은 그것이 어느새 낡은 것으로 변하고 만다는 것 때문에 단지 새롭다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낡은 것의 다음으로 다른 낡은 것이 다시 나타나면 그것은 조금은 보다 새로운 것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여 새롭지도 않고 낡지도 않은 것이 성립될 수 있는가? 놀랍게도 가능하다 그것은 '새로워지는' 것들이다. 동시에 '낡아가는' 것들이기도 하다. 단지 말장난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는 그것들은 느끼기는 하지만 전혀 사례화하거나 또 보거나 만질 수가 없는 것들이라서 더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저 새로워지기 위해 너무 많은 그들의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고 새로워지고 싶지 않다. 나는 낡은 것을 추억하고 새로운 것을 탐닉하는 것으로 충분히 풍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