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세상은 편안하고 달콤하다.

 

순백색은 점차 퇴색되어 얼룩덜룩한 인공 건축물이 나타났고,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은 다시 반즈의 몸으로 돌아왔다.


 

사방의 벽은 마치 누군가 수를 세고 있는 것처럼 단검의 깔끔한 흠집으로 덮여 있지만, 흠집이 너무 촘촘해서 몇 개인지 알 수 없었다.

 

반즈는 팔다리에 활동 신호를 보냈지만 결국 헛된 시도임을 알게 됐다.


반즈 

흠... 예상대로 움직일 수 없다.

 

반즈가 신체의 손상을 더 인식하려고 했을 때, 그의 시야는 검은 총구로 가득 찼다.


 

? ? ? 

내가 너라면 움직이지 않을 거야.

 

반즈

(혼수상태에서 죽이지 않았다. 자칭 '기어'라는 것과 같은 편이 아닌 것 같아. 아마 가능성은...)

 

반즈가 한창 다음 단어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앞에 있는 노인이 주도적으로 질문했다.

 

? ? ?

넌 대체 뭐야?

 

반즈

음?

 

? ? ?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몸에는 인간이 가져야 할 조직이 없어.

몸은 분명히 기계이지만 바깥을 떠도는 괴물들만큼 미친 것은 아니야. 넌 누구고, 뭘 위해 여기 있는 거지?

잘 생각해. 네 대답에 따라 내 총에 든 총알이 너를 맞이할지, 굿모닝 키스로 맞이할지 알 수 있을 거야.

 

반즈 

나는 그냥 여기까지 잘못 찾아온 구조체입니다...

 

? ? ? 

하아? 구조체는 뭐야?

 

눈앞의 노인은 손에 든 소총을 반즈의 이마에 가깝게 대고 말했다.

 

반즈 

모르시는 겁니까... 설명하긴 좀 번거로운데. 쉽게 말해서 인간의 정신을 유지하고 몸은 생체공학으로 만든 인간형 기계병사....

 

? ? ?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말해!

......그래서 그냥 사람들의 생각을 깡통에 담는 건가?

 

반즈 

흠...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 ? ?

[삐——], 정말 죄를 짓는구나. 인간은 이렇게나 지구에서 에테르를 뛰게 하는 건가?

 

노인은 말하며 옆으로 조금 움직이며 반즈 앞에 있던 소총을 뒤로 뺐다.

 

? ? ? 

근데 너 같은 놈은, 난 처음 본다.

 

아놀드

그래서, 어... 구조체? 발음하기 정말 어렵네. 그냥 이름으로 부를게. 내 이름은 아놀드다. 네 이름은?

 

반즈 

음...반즈.

 

아놀드 

반즈? 오, 만사 잘 되고 있나?*

근데 내가 보기엔, 그다지 잘 되고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무인 구역이야. 살아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넌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반즈의 한자 이름이 만사(万事)라는 걸 이용한 말장난

 

반즈 

...기억도 안 납니다. 지금의 나는 좌표조차 가늠할 수 없어요.

임무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대피소로 철수하기로 했는데..

그리고 철수 중에...음... 잠들어버렸습니다.

 

아놀드

그건 혼수상태라고 해야지. 잠든 게 아니라.

근데 아까 임무를 이야기하던데... 장비를 명패를 보면... 군인인가?

 

반즈 

...

 

아놀드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나? 괜찮아, 어쨌든 상관없어.

나라도 이제 막 만난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을 거니까.

 

반즈

죄송합니다.

 

아놀드

괜찮아, 군인들은 다 이렇지, 나도 익숙해.

 

반즈 

흠...전에 군인이었나요?

 

아놀드

나는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삐--] 군인놈을 알고 있지.

 

반즈

느낌상, 서로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아놀드 

오래 살면 그런 사람 한두 명쯤은 만날 수 있어. 너도 마찬가지로.

 

반즈 

흠...아마도.

지금 이렇게 다쳐도, 눈을 감으면 마치 그들이 큰소리로 저를 혼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군요.

 

아놀드 

솔직히 말하면, 내 기계 지식으로 판단해 볼 때, 네 기체가 내 집까지 걸어 온 것도 이미 기적이야.

네가 혼수상태일 동안, 나랑 내 파트너가 너를 쉴 새 없이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네가 언제 깨어날지 귀신도 몰랐겠지.


 

아놀드의 말에 따라 반즈의 침대 옆에 작은 공 모양의 로봇이 나타났다. 이것이 아놀드가 ‘파트너’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아놀드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한 수리뿐이야. 결국은 내가 본 적 없는 기술로 만들어졌으니까.

 

반즈

감사합니다...근데 왜 저를 도우려 하십니까?

 

아놀드

쳇, 그 [삐--] 와의 지긋지긋한 약속 때문일 뿐이야.

물론, 내 탓도 일부 있지만, 그건 모두 옛날 일이야.

어쨌든, 넌 지금 일시적으론 안전해.

 

아놀드는 손을 흔들며 방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아놀드

반즈, 뭐 먹을래, 여기 수르스트뢰밍*도 있어.

 

                *수르스트뢰밍 : 스웨덴의 생선 통조림. 심한 악취를 풍긴다.

 

반즈

구조체는 이론상 먹을 수는 있지만, 꼭 먹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놀드

오, 정말 편리하군.

 

아놀드는 허리에서 단검을 꺼내어 약간 부풀어 오른 캔을 솜씨 좋게 잘라 열었고, 즉시 이 좁은 공간에 코를 찌르는 이상한 냄새가 가득했고, 약간 손상된 후각 모듈도 잠시 감각을 회복했다.

 

반즈

흠...이게 뭐죠? 먹으면 악몽을 꾸는 느낌일 것 같은데.

 

아놀드 

젊은이들은 이 음식의 좋은 점을 몰라. 먹으면 건강해지고 머리도 맑아져. 오랜만에 만난 외부인인데, 같이 먹을까 했지.

지금은 예전보다 상황이 안 좋아. 예전에 밥 먹을 때는 밖에 테이블을 차리고, 파트너에게 내가 좋아하는 베이스 연주를 몇 곡 부탁했어.

신선한 생선과 고기를 쇼트브레드, 바삭바삭한 감자를 버터와 함께 먹고, 음악을 들으며 밤바람을 쐬고, 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과, 하늘을 가릴 정도로 높은 도시의 그늘.

달빛과 별들이 내 온몸으로 흩뿌리는 그 광경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된다.

 

단검이 깡통에 꽂히고, 아놀드는 생선을 씹고, 눈을 감고 입맛을 다시며 추억 속의 장면을 회상했다.

 

아놀드 

밖에 있는 괴물들 때문에 물자를 얻는 거나, 밖에 오래 머무는 게 이제는 불가능해.

 

반즈 

으... 음.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아놀드

하하하하, 상상으로는 잘 안 되고, 직접 해봐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많으니까.

 

아놀드는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사용하여 캔에 있는 마지막 물고기를 찔러 입에 넣었다.

 

바로 그때 반즈는 아놀드의 어깨에 있는 로봇이 약간 흔들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놀드 

으으, 왜 내가 먹을 때마다 항상 일이 일어나는지.

 

반즈

무슨 문제라도?

 

아놀드 

사소한 문제야. 나갔다 오지.

 

반즈

네? 이시간에?

 

아놀드

그래.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 늙은이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을 거라 생각하나.

 

아놀드는 말을 마치고 소총을 들고 벽에 있는 사다리를 타고 머리 위의 닫힌 원형 밸브를 열고 방을 나갔다.

 

반즈

그럼 이 틈을 타서...

 

아놀드가 떠났을 때 반즈는 눈을 감고 내부 구성 요소의 손상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반즈 

예전의 충격과 일시적인 차단의 부작용 때문에 지금은 본체의 연결 회로가 완전히 차단된 건가.

 

주위를 둘러보니 노란색 연기와 먼지가 지하 공간을 가득 채웠고, 방의 광원은 모두 머리 위의 베타 램프에 의해 제공되고 있었다.

 

옆에는 기계 작업대 같은 물건들이 쌓여있지만, 그 위에 덮인 먼지는 이 물건들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줬다.

 

반즈 

텔로가 대피소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지만...

 

잠시 생각한 끝에 반즈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반즈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잠시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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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나 왔다~ , 보고싶진 않았니, 꼬마야.

 

반즈

하....아....암.....

 

아놀드의 우렁찬 목소리는 반즈를 깨웠고, 상황 밖의 반즈는 간신히 눈을 뜨고 아놀드 쪽을 바라보았다.

 

아놀드

아이고, 오늘은 예전보다 시간이 더 걸렸네.

 

아놀드는 계단을 내려온 후 라이플을 옆으로 던지고 구석의 낡은 소파에 쓰러졌다.

 

아놀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많은 괴물들이 찾아왔어.

마치 양떼가 쫓겨나는 것처럼.

 

반즈

설마....

 

아놀드

괜찮아, 다 해결됐어, 이렇게.

 

아놀드는 트렌치코트 쪽으로 손을 뻗으며 재빨리 손을 앞으로 향하고 총을 쏘는 자세를 취했다.

 

아놀드

이전에 스크린에서 인기를 끌었던 남자 스타들은 모두 이 자세였어.

 

반즈

음... 뭐랄까요...

 

아놀드

하, 역시나 꼬마네. 이런 남자의 로망을 이해하지 못한다니.

 

아놀드는 멋쩍은 듯 입을 실룩거리며 다리를 꼬고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아놀드

오늘 괴물들이 보여준 이상함은 아마 너를 이렇게 만든 원흉과 관련이 있겠지.

 

반즈

네.. 이곳은 곧 위험해질 것 같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 아놀드씨 먼저 이곳을 떠나세요.

 

아놀드

내가 말했지, 너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냐?

어떻게 부상자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겠나.

 

반즈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아놀드

네가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중요한 건 내가 그렇게 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거야.

번영하고 무관심한 도시를 본 적있나?

번영한 도시에서 모든 사람은 주변의 모든 것에 무관심하지. 황금 시대에 인간 사회의 분위기는 늘 이랬는데, 지겨워.

쯧, 분명 처음에는 다들 똑같은 열정을 갖고 살고 있었어.

이런 건 네가 자료를 보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야.

데이터의 사회적 변화는 단어와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우리는 인간의 따뜻함을 보았고 사회의 무관심도 경험했다.

인간 사회는 한동안 번영했지만, 서로에게 무관심했어.

나는 인간이 그렇게 무관심하고 이기적으로 살아남는 것을 볼 수 없고, 그들처럼 그들의 일부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간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야. 반대로 누구의 목숨이든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좋은 말로 하면 도피하는 거고, 나쁜 말로 하면 겁쟁이야.

인간을 무시하는 행위가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나 혼자, 내 파트너 순이랑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내 앞에 나타난 것이 생명이라면 결코 가만있을 수 없지.

 

반즈

...

 

아놀드

그러니까 알겠지. 떠나야 한다면, 우리 둘이서 떠나야 해.

 

반즈

하지만……

 

아놀드

하지만 아직 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알아.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가 널 고칠테니, 같이 가는 거야.

 

반즈

아?

 

아놀드

노인을 무시하지 마. 나도 한때는 의사였어. 이 몸도 내가 끊임없이 개조하고 강화한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야.

 

아놀드는 반즈의 옆으로 걸어가 코트를 열었고 반즈의 눈에는 아놀드의 몸 전체에 수술 바늘이 있는 것이 보였다.

 

반즈

...그렇군요.

 

아놀드

하지만 혼자서 수술하는 건 너무 번거로워서, 파트너한테도 보조 모듈을 달아줬어.

 

아놀드는 한 손으로 옷을 정리하고 다른 한 손으로 공 모양 로봇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놀드

자, 네 몸을 수리하는 방법을 알려줘. 말만 하고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내 뛰어난 기술을 너에게 보여주지.

 

이야기하는 동안 아놀드는 방에 있는 도구 테이블을 활성화하고 도구 테이블을 반즈의 침대 옆으로 끌었다.

 

아놀드

네 말대로 시간이 얼마 없으니, 속전속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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