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부리왕을 따라 도착한 곳은 거목이 빽빽하게 들이찬 어느 숲이었다. 빛이 출입하지 않는 숲은 대체로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 그르르 . . . 


가끔 짐승의 울음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올 때마다 혹부리왕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굶주린 신격들이 냄새를 맡은 모양이군.] 


[무슨 냄새요?] 


[먹이 냄새.] 


. . . '은가이의 숲'에 발을 들여놓은 게 벌써 후회되기 시작했다. 나는 혹부리왕의 등 뒤에 몸을 바짝 붙였다. 


[곤란하군요. 먹히는 건 취향이 아닌데.] 


혹부리왕의 기세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느껴졌다. 저마다 개성이 강해 통일된 외형이라곤 전무했지만, 이것 하나 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외부인을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 


혹부리왕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시나리오에게 버림받은 이곳 주민들은 설화를 독점하는 별을 증오하지.] 


[흐음, 좌를 저버린 별들도요?] 


[타락한 별의 이야기 맥에도 설화가 흐르고 있지.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아.] 


어쩌면 당연한 말이었다.


우리가 발밑의 개미를 볼 때, 그것의 학명을 굳이 찾아보진 않는다. 단지 생김새를 보고, 머릿속에 산재한 정보를 바탕으로 시야에 들어온 개체를 '개미'라 단정 지을 뿐이다. 


이계의 신격도 마찬가지다. 


저들은 별의 밝기를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스타스티림에서 그들보다 어둡고 침침한 존재는 없다시피하니, 버림받은 자들의 시선에서 성좌와 마왕 사이의 간극은 미시적인 틈에 불과했다. 


그 틈을 넘었냐 넘지 않았냐가 선악을 가르는 기준이라면, 둘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나는 이계의 신격들의 사고방식을 고찰하다가 혹부리왕의 문장을 귀담아들었다. 


[비유하자면 밑바닥 인생을 사는 자들이 부자를 동경하는 것과 같은 이치야. 부러움의 크기가 곧 증오의 크기지.] 


혹부리왕이 말을 마친 순간, 근처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츠츠츳! 


【아아아 . . . !】 


혹부리왕의 결계를 건드린 이계의 신격이 재로 변했다. 죽음이 아닌 소멸이었다.


그들은 삶을 이야기할 수 없기에, 숨이 멎어서도 이야기를 끝맺을 수 없었다. 


잔혹한 운명.


혹부리왕은 무심한 눈으로 누군가의 이야기가 있던 자리를 흘겨보곤 중얼거렸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있으니.] 


[ . . . ] 


나는 손을 뻗어 바람에 흩날린 활자 부스러기를 좇았다.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에 중얼거렸다. 


[어리석기보단 동정이 가는군요.] 


이계의 신격들. 


운명을 마시는 새의 어둑시니들처럼 명확한 형체가 없는 그들의 정체는 사실 버림받은 세계선의 등장인물들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읽어 줄 사람이 남지 않아 결국 자신을 잃어 버린 사람들. 저들도 한때 설화를 쌓고 시나리오를 진행했을 것이다.


함께 울고, 기뻐하며.

그렇게 결말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니 고작 망각이란 단어로 그들의 피땀어린 노력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부리왕은 내가 느끼는 연민에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와 혹부리왕도 마찬가지였나. 


우리는 침묵 속에서 숲속을 거닐었다. 혹부리왕의 결계에 닿으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톡톡히 보여줬기에, 자질구레한 신격들은 우리를 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지켜만봤다. 


그렇게 방해 없이 몇 분을 걷자 나무의 수가 눈에 띄게 감소했다. 삭막한 대지. 그 위로 반구형의 성 한 채가 뜬금없이 솟아 있었다. 


[여기서부턴 혼자 들어가라.]


[그대는요?] 


혹부리왕의 시선이 성 외벽으로 향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는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시선을 교환했다. 


[위대한 모략이 독대를 원하는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잘 가요.] 


혹부리왕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나는 흔들던 손을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 . . . 되도록 만나지 말자고요.] 


그 편이 내 신상에 이로우랴. 


한숨을 내쉬곤 성에 진입하기 직전 외관을 한 번 더 살펴봤다. 올림픽 구장의 천장이 그대로 내려앉으면 저런 모습일까. 인위적으로 조성된 동굴 같았다. 살아온 세월에 비해 미적 감각은 다소 부족하구만. 


스르륵. 


문에 손을 얹자,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안과 밖의 구분이 희미해짐을 감지했을 무렵엔, 내 화신체는 이미 성 안으로 전송된 상태였다. 


[흐음, 흑염룡이 좋아할 만한 인테리어네요.] 


흑운보다 어두침침한 장소는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공간이 뒤틀렸는지, 성의 내부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 넓었다. 나란히 축조된 기둥들 아래로 무광의 타일이 규칙적인 배열을 이루고 있었다. 


배열은 곧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선을 줄곧 바라보고 있자니, 도로 가장자리의 흰색 선을 벗어나지 않는 놀이에 빠져 있던 유년기로 회귀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저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존재에 비하면 나는 철부지 어린아이에 불과하겠지.


선의 끝엔 불온한 옥좌가 놓여 있었고, 헤아릴 수 없는 악이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서두를 열었다. 


[내부 인테리어는 나쁘지 않다만, 외관은 추후 수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미학적으로 영 별로군요.] 


【 . . . 】 


[그리고 불 좀 키고 살아요. 화신체도 시커먼데 주변 경광도 그러니 잘 안 보입니다.] 


【 . . . 】 


[계속 나 혼자 떠들게 둘 심산입니까, 은밀한 모략가?] 


은밀한 모략가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역시 섞여 있군.】 


[네?] 


순간, 내 주위에서 강한 스파크가 일었다. 


츠츠츳!!!


['벽을 넘은 자'가 '은밀한 모략가'를 경계합니다!] 


【 . . . 】 


'벽을 넘은 자'와 '은밀한 모략가'가 대치하는 사이, 내 머릿속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뭐가 섞여 있다는 것일까.

그는 정말 내 기원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 . . 벽을 넘은 자는 왜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이어진 은밀한 모략가의 진언이 사유의 고리를 끊었다. 


【질문이 많아 보이는군.】 


[그대 말대로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먼저 꺼내야 할 지 모르겠군요.] 


내 대답에 은밀한 모략가의 감정이 변화했다. 그것은 미약한 호기심과 -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일순, 은밀한 모략가의 기척이 희미해졌다. 


['벽을 넘은 자'가 분개합니다!] 


. . . 읽을 수 없다. 


본래도 무대와 동떨어진 느낌을 주던 모략가 였으나, 존재감을 숨긴 지금, 그의 이야기를 훔쳐 읽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마치 김독자의 내면을 엿보다 '제 4의 벽'에 막혀 튕겨 나간 것과 비슷한 현상.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물어보면, 답해 줄 의향은 있습니까?] 


【기회는 한 번뿐이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베일 너머에서 암울한 비소가 새어 나왔다. 


【언약을 맺어야겠지.】 


[ . . . 정중히 거절하죠.] 


불공정계약은 에덴과 맺은 협약으로 족하다. 호기심 때문에 영혼을 팔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대화를 진행하려면 나를 부른 이유까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화, '불패의 협잡꾼'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물론 내가 쥔 패가 더 강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가장 오래된 꿈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결말을 보기 위해서, 그 비밀은 모략가가 직접 진실을 목도하고 손수 가장 오래된 꿈 구원하기 전까지 꽁꽁 숨겨 놓아야만 했다. 


과정 없는 결과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즉, 실질적으로 내가 써먹을 수 있는 패는 전무했다. 혹부리왕에게 써먹은 거짓 공갈도 안 통할 것 같고. 


여러모로 답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모략가가 내뱉은 진언은 대화의 행방을 아얘 미궁 속으로 빠뜨렸다. 


【내 용건은 이미 확인했다. 이제 네 차례다.】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일까. 벌써 확인했다니. 그나마, 모략가가 무심코 말한 '섞여 있다'가 그의 용건과 맞닿아 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 . . 설마 원작의 아스모데우스의 인격이 남아 있단 말은 아니겠지? 갑자기 불안해진다.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격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아니라고?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현 주인은 무성욕자라 지루하다고 투덜거립니다.] 


. . . 그런 의미에서 아니란 거구나. 아무튼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내가 갑자기 변태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성좌들을 먹어 치우는 일은 없겠네. 


그리고 나는 잠시 의문을 접어두었다. 고민해서 답이 안 나오면 잠시 미뤄두는 게 옳다. 대신 여기 오기 전부터 줄곧 궁금해하던 것을 질문했다.


[그대는 내 기원을 알고 있나요?] 


【 . . . 】 


장내에 침묵이 도래했다. 무엇을 말할지, 어디서부터 말할지, 고민하는 낌새였다. 그러다 툭 내뱉은 첫마디는 벌써 천 년의 시간을 거스른 뒤였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우연히 세계선을 방황하는 한 영혼을 관측했다.】 


은밀한 모략가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귀환자, 혹은 환생자라 생각했지.】 


명일상이나 니르바나처럼. 나 역시 이 세계에 얽매인 자라 추측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벽을 넘어서 왔으니까. 


【네가 그 몸에 깃든 이후, 모든 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균열이 어느새 한 세계선의 운명을 붕괴시키고 있더군.】 


은밀한 모략가가 문득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 수백 수천 조각으로 파편화된 우주의 경광이 길게 나열되었다.


난잡한 <스타스트림>의 줄기에서, 그 중심에 자리한 세계는 내가 아주 잘 아는 곳이었다. 


【나는 줄곧 네 세계선을 지켜봤다. 시간이 흐르자 너처럼 운명을 뒤트는 놈이 한 명 더 나타났지.】 


[누군지 알 것 같군요.] 


허공에 영사된 가장 작은 세계에서 김독자가 야마타노 오로치에 맞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그 모습이 더욱 낯익게 느껴진 것은. 


【그놈과 너는 닮았다.】 


[. . . 지금 내가 다른 세계선의 김독자라는 말하고 싶은 겁니까?] 


【'닮았다'고 했지 '같다'라고 말한 적은 없다. 비약이 심하군.】 


[그럼 그대가 보기엔 나와 김독자는 어떤 면에서 닮았습니까? 특이점이란 사실을 제외하면요.] 


스르르. 


눈을 한번 깜박이자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코앞에 도달했다. 불온한 그림자에서 빛나는 안광이 내 전신을 훑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가레스가 확고한 악이라면, 모략가는 불가해한 악이었다.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아니되는 미지의 신격. 


그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무릇 피부로 와닿는 것은 또 다른 법이다. 


그리고 마침내 침묵이 깨졌을 때,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띄기 시작했다. 


【이름.】 


[네?]


【너희 둘 다 내가 처음 듣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아가레스와 한바탕했을 때 '선악을 가르는 벽'에서 발견한 전생의 이름. 이유는 모르나 매우 강한 보안으로 필터링되어 있던 단어. 


그것이 은밀한 모략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 


나는 여전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모략가의 발언은 애초부터 나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벽을 넘은 자'가 동요합니다.]


심상 속에서 전용 스킬이 요동쳤다. 마치 들어선 안 되는 것을 듣기라도 한 거처럼. 


나는 뒤늦게 한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너 . . . 필터링 안 걸리는구나?' 


['벽을 넘은 자'가 침묵합니다.]


그리고 필터링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녀석이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 녀석이 단순한 스킬로 보이지 않았다. 


추측컨대 . . . 


'너야? 날 여기로 데려온 게?' 


그는 이 이야기의 시발점과 아주 긴밀한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