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으."
수학 시간이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새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깨끗한 교과서를 폈다. 하지만 반년이나 수업을 빼 먹었는데 잘 되면 거짓말이다.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선생의 말도 이해 되지 않았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선생의 말이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몰려오는 졸음과 하품을 이겨내며 겨우 눈을 뜨고 있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못 떠서 반 즈음 감겨있어 차라리 자고 싶다는 욕구가 넘쳤다. 곧 곧게 펴져 있던 허리는 굽혀졌고 칠판을 곧게 보고 있던 시선은 점점 좁혀져 결국 사라졌고 고개는 칠판에서 책상으로 떨구어졌다. 꾸벅꾸벅, 졸음과 이성 사이를 겨우 붙잡고 있는 내게 김독자가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더니 속삭였다.
"잘거야?"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평소의 목소리가 50점이라면, 이번 목소리는 5000점을 넘게 줄 수 있었다. 중 저음에 가까운, 놀라울 정도로 좋은 목소리에 소름까지 돋을 정도였다. 아니, 그는 그저 평소대로 말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졸려 있는 데다, 귀 바로 옆에서 말했기에 더 간드러지게 들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걸로 잠이 확 달아났다는 사실이다. 나는 왼 쪽 귀를 막고 김독자 쪽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김독자가 피식 웃으며 내가 못 풀고 있던 문제를 샤프로 가르키며 말했다.
"그거 x를· 여기다가 대입해서 풀어봐."
그가 친절하게 샤프로 얇은 선을 그어 내게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기초가 없던 나는 그 다음을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차근차근 하나 씩 알려주었다. 어느 새 30명 남짓 되는 인원이 듣는 수업이 아닌 김독자와 나, 이 둘만의 일 대 일 수업처럼 되었다. 주절대던 선생의 말은 들리지 않고, 그저 나긋나긋한 그의 목소리만 들렸다.
"흐으, 이런 걸 어떻게 매일 푸는 거야?"
그러자 김독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그저 자신도 모른다는 의미이리라.
나는 억지로 깨워져 쌓인 졸음을 버티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그러자 김독자가 자신의 교복 재킷을 덮어주었다. 뭔가 이불 같은 감각이라 이질감 보다는 편안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베개까지 있으면 좋았겠지만 욕심이란 걸 알기에 팔짱을 껴 팔을 베개 대신 삼았다. 그러자 적당히 좋은 베개처럼 되었다. 그가 막 벗은 재킷은 따뜻하다 못해 포근하기까지 해서 자는 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잠에 들기 직전 느낀 기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던 예전보다 하는 게 많아졌음에도 더 즐거운 기분이었다.
*
"수영아."
집에 들어가려는 나를 그가 불렀다. 어째선지 감이 섰다. 미래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미 몸은 뒤를 돌고 있었다. 그러자 어제와 같이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익혀진 채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가 살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
"준비 됐어?"
그러자 나도 호응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예전처럼 어색한 웃음이 아닌 한신영과 있을 때 짓던 그 자연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내게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나는 그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아직."
그러자 김독자가 아쉬운 듯 입꼬리를 내렸다. 나는 그걸 보고는 그에게 손을 살짝 흔들어준 후 "잘 들어가." 라는 말을 들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제처럼 엄마가 있진 않았다. 평소같은 차가운 집이었다. 그러나 모순되게 몸은 뜨거웠다.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콜라를 따라 마셔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혔다. 내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를 좋아할 이유도 없는 데다 그를 좋아할 수도 없는데도, 왜 그의 말 하나하나가 이리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걸까. 차가운 콜라 덕에 적당히 식은 몸을 방까지 끌고 가 침대에 몸을 휙 던졌다. 뭔가 몸이 녹진녹진해서 몸을 던지자 정신과 몸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자려고 눈을 감자 그 붉은 김독자의 얼굴이 떠올라 잘 수 없었다. 이젠 한신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 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 같다. 한신영보다 조각 같진 않은 그 외모의 그 부드러움이, 그 자연스러움이 좋다. 한신영보다 나와 잘 통하진 않지만 그 통하지 않는다는 점 자체가 좋았다. 겨우 본인의 마음을 말하는 데도 얼굴을 붉히고 힘들어하는 그가 좋다. 본인의 마음을 말하는 데 상대에게 허락이 필요한 그가 좋다. 이젠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나는 김독자가 좋다. 이젠 한신영보다도 좋게 되어버렸다.
10화 내에 끝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