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컵에 담긴 물이, 컵이 깨져도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꼭 김독자와 유상아의 관계가 그랬다.
"독자 씨."
"상아 씨."
그 둘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딱딱했고, 거리가 느껴졌다.
미노소프트 시절의 둘의 관계와 퍽 비슷한 그런 관계.
.. 였을 텐데.
그러니까, 때는 야심한 밤이었다.
시나리오가 끝나고, 최후의 벽을 또 한 차례 넘어 김독자를 구해냈던, 그날 밤.
"유상아, 빨리 이설화랑 아일렌한테 데려가자. 지금 이 새끼 위험해. 설화고 화신체고 성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한수영의 말대로였다.
김독자의 상태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였다.
이리 저리 균열이 생긴 화신체며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설화 파편들까지, 김독자가 정말 이 우주에서 가장 무력한 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듯.
"네."
대답은 짧았지만, 그 의미는 길었다.
가장 길고, 가장 의미없는 낱말만을 이어서 만든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문장.
초반 시나리오를 겪으며 유상아는 자신이 그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김독자가 그토록 원하고 갈구했던 단 하나의 '소설' 안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의미 없는 그 문장.
"유상아 씨. 모두가 같은 일을 잘할 수는 없습니다. 지하철에서 했던 말, 아직 기억하십니까?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상아에겐.."
"상아의 삶이 있어요."
하지만 아니였다.
김독자, 저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야만 했고, 그 무엇이든 순종적이게 따라야만 했던 유상아가 새로운 환경에 부딫혀 허덕이고, 추락할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알게 모르게 손을 내밀어 줬을 사람.
"독자 씨."
그래서 그녀는, 달밤의 병실에서 그의 손을 잡았던 것이리라.
인간은 타인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뿐.
그렇기에 자진해서 남은 병실.
망가진 화신체에서 새어나온 김독자의 설화 파편을 모으다, 유상아는 문득 그 문장을 보았다.
"아니에요. 독자 씨."
유상아는 그의 말을 부정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에게 구원받았고, 이젠 자신이 그를 구원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의 말을 부정함으로써, 그의 삶을 긍정하고 싶었다.
"지하철에서 했던 말, 기억해요? 상아에겐 상아의 삶이 있고, 독자에겐.."
"..."
"역시 대답이 없네요."
그에게로 비춰지는 달빛이 아스라이 갈라지는 틈에서, 유상아는 과거를 보았다.
김독자가 혼자서 보내온 시간들을, 그 시간을 달래준 하나의 '이야기'를, 그것과 이어져 그를 구원할 또 하나의 '이야기'를,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기 자신과도 마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악몽을 꾸는지, 김독자의 표정이 찡그려졌고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래간만이죠. 이렇게 둘만 있는 것도. 다른 분들은 모두 주무시러 가셨어요."
잠시 말을 멈춘 유상아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 중혁 씨가 다시 독자 씨와 마주하고 싶어해요. 갚을 빚이 있다나요."
"수영 씨도 마찬가지에요. 독자 씨가 해 주셔야 하는 일이 있대요."
".. 현성 씨도요. 벌써 다섯 번이나 오셨다고요."
유상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희원 씨도 들렀다 가셨어요. 어째선지, 표정이 밝으시더라구요."
"지혜도 왔었어요. 독자 씨가 떠나고, 많이 울었어요. 그 애 마음이 여리잖아요."
"길영이도 보고 싶대요. 처음엔 참다가, 그래도 결국 독자 씨 팔을 잡고 울더라고요."
"유승이도 울다가 갔어요. 그러니까 화신 내버려두고 어디 가시면 어떡해요."
자신이 그와 부부였다면, 이런 느낌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유상아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설화 씨도. 표정은 무뚝뚝하셨지만, 그래도 많이 그리워하셨어요."
"하영이도. 몇 번이나 독자 씨를 바라보던지."
"필두 씨도. 콧방귀를 뀌시면서도 결국엔 찾아서 오시더라고요. 뭔가 허심탄회한 느낌. 알죠?"
"명오 씨도요. 와서 한숨을 열댓 번은 쉬고 가시더라니까요."
"키리오스 씨도요. 한심한 제자니 뭐니 하시는 게, 딱 저희 아버지 같았어요."
그리고 유상아의 말을 뚝 끊겼다.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지만, 유상아는 그것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의 손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지금 그가 겪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겠다는 듯.
"저도 그래요.. 보고 싶어요.. 다시 한 번, 일어나서 그 목소리로 그 눈빛으로 그 손짓으로.. 멸살법 하루 종일 읽어도 괜찮으니까."
유상아는 그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꽉 쥔 채 이불에 얼굴을 덮었다.
이내 이불이 젖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가 옅게 떨려왔다.
".. 좋아해요, 독자 씨."
그렇게 말하곤 유상아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누군가의 그림자에 의해 가려지고 있었다.
그 빛의 거대한 어둠은 너무나도 비좁았지만, 숨는 것을 좋아하는 유상아에게 있어서 가장 알맞는 장소였다.
"상아 씨."
김독자의 목소리였다.
천사처럼 한 없이 달콤하면서도, 마왕처럼 한 없이 위험한.
김독자가 수줍게 내뻗은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유상아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을 쓰윽, 하고 닦아냈다.
".. 저도 좋아해요."
그리고 다음 순간, 김독자는 유상아를 끌어안았다.
쇠약해진 팔로, 무리하면 좋지 않았음에도 절대 놓지 않으려는 듯.
그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다정한 손길에 유상아는 순간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독자 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정말.."
"나도요, 상아 씨. 그 셀 수조차 없는 세월 동안."
김독자는 유상아의 턱을 살짝 들어 그녀와 마주봤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떨리는 턱으로, 떨리는 입술로.
유상아에게 입을 맞췄다.
"독자 씨.."
"상아 씨.."
어떤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컵에 담긴 물이, 컵이 깨진다고 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하지만 어떤 관계는 형태를 바꾼다.
컵이 깨지고 흘러내린 물이, 자기 멋대로 형태를 바꾸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