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드의 방은 중세 유럽의 수도원이 연상될 정도로 옛스러움과 신비로움이 묻어나왔다.
벽에 난 창문으로는 쏟아질 듯이 많은 별이 보였고 천장에는 별자리가 그려져 있었다.
헤세드는 독서대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별의 도서관...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것도 같네요.”
“참 아름답지 않나요?”
헤세드는 펜을 내려놓고 창가로 가 망원경을 들여다봤다.
와서 보라는 헤세드의 손짓에 나도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살자리입니다.”
“처음 듣네요.”
“하하, 유명한 별자리는 아니죠. 큐피트라는 신을 아시나요?”
“잘은 모르지만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화살에 맞으면 사랑에 빠진다는...”
“네. 화살자리가 큐피트의 화살입니다.”
“그렇군요. 누굴 향해 쏜 걸까요?”
“글쎄요, 화살의 방향을 따라가면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가 있긴 하지만... 뭐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랑 딸랑
“화살자리의 주인공이 온 것 같네요.”
“네?”
또 또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네네, 나중에 알게 되겠죠. 나가보겠습니다.”
밖에는 검은 단발머리에 160이 안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또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서오세요.”
여자도 나를 보더니 잠시 멈칫했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건 확실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혹시 고등학교가...”
“저 구원고.”
“2학년 9반?”
“네.”
“오랜만이다! 나 기억 안 나?”
“......”
“둘 다 조용한 성격이었으니까 기억 안 날만도 하지. 그래도 동아리까지 같이 했는데.”
같은 동아리라고 해도 동아리 시간까지 책만 읽었으니...
“진짜 너무하네. 내 소설도 읽어놓고.”
“아, 혹시 한수영?”
“빨리도 기억한다. 안 변했네.”
“앉아 있어. 마실 거 갖다줄까?”
“괜찮아. 그나저나 여기 책 좀 봐도 되냐?”
한수영은 책장으로 가 한 권을 꺼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자 이름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한수영이었다.
“작가랑 이름이 똑같네.”
“내가 쓴 거니까.”
“작가 됐냐?”
“웹소설. 이건 단행본 나온 거야.”
“와... 지금도 연재하냐?”
“안 쓴 지 꽤 됐어.”
“왜?”
“그냥, 잘 안 써져서.”
“음... 슬럼프 같은 건가?”
“그렇지 뭐.”
웹소설을 즐겨 보기 때문에 작가의 슬럼프 또한 많이 접했다.
그래서 슬럼프 기간 동안 작가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또한 잘 알고 있다.
“영화 좋아해?”
“영화?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닌데 재밌어 보이면 보러 가지. 왜?”
“그냥. 보러 가자고.”
“언제?”
“토요일 어때?”
“그래. 좋아.”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난 가볼게.”
“잘 가. 토요일에 보자.”
한수영이 나가고 어느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헤세드가 입을 열었다.
“이제 데이트 신청까지 하는군요.”
“데이트 신청이 아니라...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 인간은 나를 놀리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Fortune favors the bold, and it abandons the timid.”
“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용기 있는 자에게 행운이 깃들고, 두려워하는 자에겐 불행이 깃든다.”
“좋은 말이네요.”
“그러니 주저 말고 용기를 내세요.”
헤세드와 대화를 할 때는 내 생각이 다 읽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나도 모르는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여기를 찾은 사람도 비슷한 기분이었겠지.
*
시간은 흘러 토요일이 되었다.
“전 나가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영화관에 도착했을 때 한수영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왔네.”
“니가 늦은 거지. 시작시간 지났어.”
서둘러 극장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아직 광고 중이었다.
“아직 시작 안 했네. 내가 이거 계산하고 늦게 온 거지.”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곧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분명 재미 없는 영화가 아니었는데 상영 내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 부분 좀 지루했는데 마지막은 재밌네.”
“그러게. 진짜 첫부분만 보고는 모르는 거 같다.”
“......”
나 뭐 잘못 말했나?
“...고마워.”
“응? 뭐가?”
“그냥. 뭔가 해결된 느낌이야.”
“다시 올 거야?”
“어딜?”
그러고 보니 간판도 없고 딱히 부를 일도 없다 보니 그 곳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처럼 별의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게 제일 나으려나.
“별의 도서관.”
“응? 아 거기? 이름이 별의 도서관이었냐?”
“다들 그렇게 부르던데. 나도 원래 이름은 몰라.”
“음... 모르겠네. 그때 어떻게 갔는지도 기억 안 나.”
“오고 싶으면 다시 오게 될 거야.”
“응?”
헤세드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 주었다.
이 맛에 놀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잘가.”
“너도.”
*
돌아오니 헤세드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이쪽이 내가 말한 김독자 씨야.”
빨갛고 긴 머리에, 얼굴엔 흉터가 가득한 그 여자가 나를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난 게부라. 주말 담당이야.”
“아. 반갑습니다.”
“난 가볼게 헤세드.”
“잘가. 다음주에 봐.”
“뭘 다음주에 봐. 이따 또 보면 되지. 안녕.”
게부라가 나가고 난 뒤 헤세드의 얼굴은 빨개져 있었다.
“혹시 여자친구...?”
“아니,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빨개진 얼굴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파란 머리와 대비되어 더 웃긴 광경을 연출했다.
그동안 당한 걸 복수하듯 옆에서 웃어주었다.
“...... 데이트는 잘 다녀오셨나요?”
“데이트 아니라니까...”
아, 좋은 생각이 났다.
“데이트는 제가 아니라 헤세드 씨가 한 것 같은데요.”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재밌는 걸 그동안 혼자 하고 있었단 말이지.
*
며칠 후 한수영이 다시 찾아왔다.
“왔어?”
“미친... 넋놓고 걷다 보니까 여기 앞이네. 어떻게 한 거냐?”
“나도 잘 모른다니까. 암튼 앉아.”
한수영은 책장에서 책 하나를 빼들고 의자에 앉았다.
옆을 보니 헤세드가 화분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손 좀 줘봐.”
“손? 왜?”
“할 게 있어서.”
“이상한 짓 할 생각하지 마.”
순간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옆에선 헤세드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손이나 줘봐.”
한수영은 책을 계속 보면서 한쪽 손을 내밀었다.
“놀라지 마.”
화분에 가져다 대려고 한수영의 손을 잡았다.
...
“김독자?”
“독자 씨.”
잠깐 넋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긴장했냐? 여자 손 처음 잡아봐?”
“얼굴이 빨개졌네요.”
한수영은 보던 책도 덮고 낄낄댔고 헤세드도 아까 일을 복수하듯 계속 놀려댔다.
“흠흠, 시작할게.”
한수영의 손을 화분에 가져다 댔다,
“와...”
“신기하지?”
화분에 노란 안개꽃이 활짝 피었다.
“어떻게 한 거야?”
“나도 몰라.”
헤세드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말해주기 싫은 거겠지.
“나 최근에 글 다시 쓰기 시작했어.”
화분에서 손을 땐 한수영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저번에 영화 보러 갔을 때, 니가 한 말 있잖아.”
“내가?”
“그... 처음 부분만 봐서는 알 수 없다는.”
“아, 그거.”
“그 말 듣고 일단 시작해보자고 생각하게 됐어.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니까. 시작과 끝이 아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잖아?”
조언이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다.
“연재도 다시 할 거야?”
“해야지. 넌 꼭 읽어라. 너 때문에 쓰는 거니까.”
“알았어. 읽을게.”
시곗바늘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가볼게.”
“조심히 가.”
“맞다 김독자. 이번 주말에도 시간 돼?”
“왜?”
“또 만나자고. 연락할게.”
“그래. 잘 가.”
한수영이 나가고 헤세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그거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했나요?”
진짜 언젠가 저 히죽거리는 얼굴을 꼭 한 대 때리고 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