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새 집이군요."
"...그러네요."
침실, 거실, 작은 방과 화장실 하나가 딸려있는 아담한 아파트. 과거라면 그리 비싸지 않는 가격이었겠지만, 최근 내집 마련이 힘들정도로 집값이 오르는 바람에 이 집을 구매하는데 무려 8억이 들었다.
내가 기존에 모아둔 1억, 외가에서 빌려온 2억, 그리고 의외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엄마에게 5억을 빌려 이 집을 샀다.
-...이렇게 돈이 많으셨어요?
-그럼, 감옥에 있는데도 책이 팔리면서 돈이 꼬박꼬박 들어왔더구나.
그래, 잊고 있었지만 그 돈 중 일부를 잘 받아먹던 친척들도 잘 먹고살고 있겠지.
"독자 씨?"
"아, 네 상아 씨."
"무슨 생각 해요?"
"아, 그냥.. 7억을 언제 갚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20년 뒤에는 갚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은행에 빌렸다면 진짜 큰일 났겠군요."
그 말을 들은 유상아가 실실 웃었다.
"가구는 저녁에 들어온대요!"
"그렇군요. 그럼..."
"...왜 그렇게 봐요?"
"병원에서 언제부터 해도 된다고 했었죠..?"
"...이제 임신한지 두달 지났거든요! 12주 지나기 전까지는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직 유상아의 배는 불러온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의사가 배가 불러올 때 즈음 부터 남성 상위의 체위같이 태아에게 문제가 될 수 있는 체위를 제외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했었으니...
그림의 떡을 바라보는게 이런 느낌일까?
"...유상아 씨가 제게 고백하며 저를 덮친 그 날 아이가 생겼는데 그 날을 제외하면.."
유상아가 얼굴을 붉히더니 소리쳤다.
"...아, 아이 낳고 많이 해드리면 되잖아요..!"
.
.
.
"...상아 씨는 먼저 들어가게. 임신 중인데 무슨 야근인가."
"...네, 부장님."
유상아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한명오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챙긴 후, 회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명오가 내게 다가왔다.
"저... 독자 씨. 내가 할 말이 있는데... 혹시 술 한잔 가능한가?"
"...저한테는 예쁜 아내가 있고 토끼같은 딸이 생길 예정이라서요. 지금 상당히 부장님의 행보가 소름이 끼치는데... 이거 따라가면 장기가 털릴 것 같아서 싫습니다."
"......부탁하네."
"...예."
왠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한명오를 보고 조금 께름칙했지만 그냥 따라가서 한 번 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
.
.
"독자 씨, 정말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미안하네."
"...부장님? 혹시 점심으로 뭘 잘못 드셨나요?"
"...아니야!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네. 상아 씨에게도, 독자 씨에게도 정말 큰 죄송함을 갖고 있네."
"...알고는 계시니까 다행이네요."
한명오가 유상아에게 그 짓을 한건 유상아가 임신한지 2주 즈음 지났을때의 일이다. 그래서 죄책감이 생긴건지, 아니면 그저 그 행동 자체에 대한 죄책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명오의 사과 자체는 진심인듯 보였다.
"...유상아 씨한테 직접 사과하세요. 그게 맞는겁니다."
"...그래야지. 다만 독자 씨에게도 사과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네."
"...참 고맙네요."
한명오가 미안함을 느낀다는건 잘 된 일이지만 어째서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건지 의문이 들었다.
"근데 제가 아는 부장님이라면 이렇게 사과 할 사람이 아닌데 무슨 계기라도 있었습니까?"
"......사실 딸이 생겼네."
"예? 결혼까지 하셨으면서 상아씨한테 집적거린겁니까?"
"아, 아니야! 오해하지 마! 얼마 전에 집 밖에 나갔다가 갓난아이 하나가 포대기에 쌓여서 상자에 들어간채로 집 앞에 놓여있는걸 봤네. 이 추운 계절에 아이를 밖에 둘 수가 없어서 데리고 들어왔지."
"경찰서에 가야하는게 아닌가요?"
"당연히 경찰서에 갔지. 근데 아이를 고아원에 맡겨야 한다더군."
...설마, 아니겠지? 한명오 부장이 그렇게 정이 많은 인간일 리가 없는데.
"부모한테 버림받았다는 기억을 갖게 하고싶지 않았네. 그래서 내가 입양 절차를 거쳐서 입양했어."
"...엄마는 어릴적에 돌아가셨다고 하실 생각입니까?"
"역시 자네는 제 정신이 아니야."
"부장님에게 듣고 싶던 말은 아니네요."
한명오가 잠시 상처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결혼을 해야하나 생각을 하긴 했네. 하지만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하는 결혼은 배우자에게도 예의가 아닐거고.. 그래서 가정부를 고용해서 키우려고."
멸살법에 나왔다면 개연성에 위배되어 이계의 신격들이 나타났을거다. 사람 성격이 저렇게 한 순간에 달라지다니.
"...딸 이름은 뭡니까?"
"다름이.. 한다름으로 지었네"
"...딸 데리고 식장으로 오세요. 그 전에 유상아씨에게 사과 하실거라 믿습니다."
"...1주일 뒤에 한다고?"
"네, 상아 씨는 이미 청첩장 다 돌린 거 같던데 저는 청첩장이 남아돌거든요."
"...힘내게."
"위로하지 마세요. 안 슬프니까."
다음 날, 한명오가 쭈뼛거리며 유상아에게 다가갔다.
"저, 상아 씨.."
"...네?"
유상아가 한명오에게 미소를... 아니, 미소라고 하기 힘든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본 한명오가 유상아에게 말했다.
"저, 술 한잔 마시지 않겠나?"
"아, 아니요. 제가 임신중이라서요."
"그, 그러면 차라도 마시겠나?"
"...왜 이러세요? 데려가서 무슨 짓을 하시려고."
유상아가 싸늘하게 얼굴을 깔며 한명오를 노려봤다.
"...미안했네. 정말로."
"...부장님 혹시 어디 아프세요?"
"........"
그 뒤로는 나와 한명오가 했던 얘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오갔다.
"...알겠어요."
"그, 그래! 고맙네 상아 씨!"
하지만 여전히 유상아는 한명오를 경멸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