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이 히든 시나리오는 총 10번의 발판을 찾아내고 전체 공격기를 버텨야 비로소 끝난다. 문제는 발판이 생성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 되려 원작보다 늘어난 제한 시간을 확인한 김독자는 방금 전 간접 메세지를 복기했다.
- 성운 올림포스가 화신 신유승의 죽음을 바랍니다.
'웃기는 소리!'
거대 성운이 고작 화신 한 명의 죽음을 바랄리가!
개연성 적합 심사에 걸렸으면 모를까, 신유승은 타고난 재능을 제외하면 평범한 화신이었다. 심성이 고와 성좌들에게 밉보일 가능성도 없고. 그렇다면 올림포스가 견제하는 대상은 신유승이 아니라 . . .
"유승아."
"네,네?"
"혹시 배후성에게 언질 받은 거 없니?"
"그게 - "
신유승이 입을 연 순간, 소재앙이 울부짖었다.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피해요!"
염열 내성이 있는 정희원이 신유승을 안고 몸을 던졌다. 이현성은 '헤라클래스의 방패'로 불길을 막으며 김독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일행들이 있던 자리에 불덩이가 쏟아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선지자들이 불꽃에 휩싸여 한 줌의 재로 화했다.
'전체 공격이 아닌 단방향이라. 그래도 최소한의 난이도 조절은 했나 보군.'
그래 봤자 오십보 백보였다. 사방에 옮겨붙은 화염은 회피 공간을 점점 줄이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전부 타 죽는다.
"끄아아악!!!"
"젠장, 이런 말은 없었 - 아아악!!"
넘어진 선지자들의 몸에 불이 옮겨붙었다. 끔찍한 작열통이 사람들의 입을 억지로 벌렸다. 비명을 지르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다.
"커어억 . . . "
개방된 기도를 파고든 불꽃은 화신들을 내부에서 부터 불살랐다. 허망한 표정을 지은 이현성이 방금까지 사람이었던 숯덩이를 바라봤다.
허나 죽은 자를 위한 애도를 올리기엔 상황이 급박했다.
"독자씨 . . .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독자가 머뭇거렸다. 그로써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성운이 개입한 탓에 시나리오의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치솟았고, 눈앞에 재앙이 도래했다.
'재앙을 사냥하기엔 힘이 모자라다. 그렇다고 이 불지옥 속에서 1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크롸롸롸!!!"
재앙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괴랄한 힘이 실린 발톱이 김독자와 이현성을 갈라놓았다.
- 콰왕!
콘크리트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김독자는 그룹 단체방에 일단 버텨 보라는 다소 무책임한 명령을 내리며 꼬리의 연격을 피했다.
그때, 누군가가 김독자에게 접근했다.
"후후, 급해 보이시군요."
" . . . 네놈은 여유로워 보이는군."
"그야 저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뭐라고?'
여유로운 표정의 사내는 아까 김독자에게 아스모데우스를 거론한 하차자였다. 잠시만, 그러고 보니 아스모데우스가 몇 편에서 나오더라.
'57편.'
거기까지 읽었으면 사내를 단순한 하차자라고 볼 수 없었다.
"너는 사도군."
" . . .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네, 저는 다섯 번째 사도입니다."
"미래를 아는 놈들이 어쩌자고 일을 벌린 거지? 여기서 다 죽을 셈인가?"
"높으신 분들의 개입은 저희 예상 밖에 일이지만 . . . 그래도 계획은 아직 굳건합니다. 유중혁 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말이죠."
"무슨 계획이지?"
"저희는 래서 드래곤을 사냥할 겁니다."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이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두 사람은 능수능란하게 브레스를 회피했다. 김독자는 패턴을 알고 있었고, 5번째 하차자는 청빙환의 효력으로 몸 상태를 최적으로 유지시키고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챈 김독자가 혀를 찼다.
'이 녀석처럼 몸에 청빙환의 냉기를 품은 놈들이 다섯 명.'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냉기를 품은 자들이 5명이나 있었다. 불확실한 전장에 인원의 절반을 투입시키다니. 녀석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희와 협력하신다면 유중혁 님께도 청빙환을 드리겠습니다."
"거절한다면?"
"유중혁 님의 일행은 여기서 모두 죽겠죠."
"네가 일행 따위를 걱정할 것 같나?"
"후후, 과연 계시 그대로군요."
기껏 해야 50여편 밖에 읽지 못한 놈들이 계시를 운운하는 데 살짝 꼴받았지만, 이어진 협박은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쯤 유중혁 님의 '본진'은 저희 손에 넘어왔을 테니까요."
그제야 김독자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김독자가 <선지자의 밤>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순간, 선지자들은 김독자보다 한 발짝 앞서 움직였다.
본진을 인질로 유중혁을 손에 넣는다. 딱 안나 크로프트가 좋아할 발상, 음습한 계획이었다.
문득 김독자는 계획을 짠 사도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이에 다섯 번째 사도는 이렇게 답했다.
"그분은 선지자들 가운데 모든 계시를 읽은 유일한 분. 유중혁 님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고 계신 분입니다."
김독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가 이내 가늘게 휘어졌다. 잘생긴 얼굴에 떠오른 것은 다름아닌 미소였다. 이에 감탄한 다섯 번째 사도가 문득 생각했다. 유중혁이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그러나 의문에 답하기도 전에 김독자는 움직였다.
"너희들 잊었나 봐? 내 성흔이 무엇인지."
조회수 1로 가득한 소설창을 떠올리며.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자신 말고도 완독자가 있다는 발언을 부정하며.
"그런데 궁금하네. 너희들은 어떨까? 이번 회차의 이례적인 존재들인 너희들은, 과연 다음 회차에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세계와 함께 이대로 소멸할까?"
하차자들의 무지를 지적했다.
"정말 계시를 읽었다면, 네놈들도 답을 알고 있겠지?"
이에 대한 김독자의 답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였다.
다섯 번째 사도의 안색이 파래졌다. 그가 고함을 내지르며 동료 사도들을 독촉했다.
"유중혁 잡아!"
[5급 화룡종, '래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타이밍 한번 끝내주네. 재앙의 주둥아리에 모이는 화염구를 향해, 김독자가 뛰어들었다.
"독자씨, 지금 뭐 하는 - "
콰콰콰!!!
정희원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굉음에 파묻혔다.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파멸의 불꽃은 멋모르고 날뛴 사도들을 불태웠다. 어그로가 끌린 틈을 타 김독자가 안국역의 깃발 꽂이에 깃발을 박았다.
이윽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허억 . . . 허억 . . . "
[히든 시나리오 - '왕의 길'을 달성하였습니다.]
[당신이 걸어온 길에 따라 새로운 '왕'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1. 오만한 위선의 왕
2. 고독한 취향의 왕
3. 냉혹한 선택의 왕
. . .
불살의 왕은 없었다. 김독자는 이미 금호역에서 동족살인을 저지른 바 있었다.
'천인호 . . . 때문인가.'
결국 꿩 대신 닭이라고 김독자는 첫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오만한 위선의 왕."
원작에서 10악 중 한 명이 고른 선택지. 특전은 자신을 믿는 화신에게 버프를 부여하는 것. 왕 자신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없다. 오만한 왕은 스스로 존귀해야 한다는, 웃기지도 않은 설정 때문이다.
보상을 수령하고 뒤를 돌아본 김독자가 흠칫 놀랐다. 재앙의 주둥아리가 저를 향하고 있었다. 곧바로 쏟아지는 화염.
'피하긴 글렀다!'
몸에 닿는 면적이라도 줄이기 위해 김독자가 상체를 숙인 그때, 우직한 방패가 김독자의 앞을 막아섰다.
- 콰앙!!
"끄으윽!"
섬광이 번쩍이고 주변이 뜨겁게 타올랐다. 숨 쉬기 조차 버거운 환경에서 간신히 눈을 뜬 김독자가 사내의 정체를 확인했다.
아니, 확인할 것도 없었다. 김독자의 방패는 하나뿐이었기에.
['오만한 위선의 왕'의 특전이 활성화됩니다.]
"현성 씨!"
"독자 씨 . . . 괜찮으십니까?"
자신을 구하러 뛰어든 등장인물에게 김독자는 뭐라 이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 자신이 상상하던 인물에게 구원받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시선의 폭력에, 또래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 던진 질문. 거기에 대한 답이 돌아왔음에도 김독자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열 상황도 아니었고.
한차례 입술을 깨문 김독자가 이현성에게 부탁했다.
"조금만 버텨주세요."
"알겠습니다 . . ."
아직 완전한 성체가 아닌 용의 브레스는 얼마 못가 사그라들었다. 휘청거리는 이현성을 부축한 김독자가 단두대처럼 쇄도하는 날개쭉지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신유승을 업은 정희원이 두 남자를 향해 달려오며 사자우를 질렀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다들 미쳤어요?!"
"언니 뒤에!"
정희원이 신형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멸마의 힘이 담긴 검이 화룡종의 꼬리를 얇게나마 베어냈다. 김독자는 희망을 봤다. 청빙환이 있다면 정희원이 일행의 서포트를 받아 재앙을 배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리라.
그리고 번뜩이는 눈으로 사도들이 죽은 곳을 훑어본 김독자는 이내 당황했다.
'청빙환이 . . . 없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성운의 개입, 피할 곳 없는 열기에 당황한 사도들이 몰래 여분의 청빙환을 모두 복용한 것이었다. 다섯 번째 사도가 가진 유중혁 몫의 청빙환은 하필 래서 드래곤의 발치에 있었다.
'개자식들.'
일을 벌리는 사람 따로, 수습하는 사람 따로라더니. 단체 생활의 비애를 실로 오래간만에 느낀 김독자는 곧장 정희원과 합류했다.
"이성국 씨와 정민섭 씨는요?"
" . . . 죽었어요."
비고에 슬퍼할 새도 없이 김독자는 신유승에게 질문했다. 중간에 끊긴 문장. 거기에 이 사태를 해결할 방도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스모데우스가 뭐라고?"
"제련."
"뭐?"
"철은 달구고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법이라고, 전해 달랬어요. 여기까지만 말해도 아저씨가 이해할 거라고 . . . "
일행들의 시선이 김독자에게로 향했다. 김독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 . . 배후성한테 전해 줘. 이해했다고."
김독자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은 김독자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모 아니면 도. 어쩌면 여기서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
허나 어째서일까. 저 별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한 누구도 죽지 않을 것 같다고, 김독자는 은연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성 씨.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어주세요."
"네."
"래서드래곤의 브레스 지속시각은 대략 30초 입니다. 브레스를 쏘는 순간, 움직임이 굼떠지니 저와 희원씨, 유승이가 그때를 노려 공격하면 이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잠시만요. 그럼 현성 씨는?"
" . . . 미끼가 필요합니다. 놈의 시선을 끌고 브레스를 버텨줄 사람이."
여기서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체력이 높고 보유한 스킬과 아이템이 방어에 최적화된 이현성보다 미끼 역할에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다만 브레스의 위력을 채감한 현 시점에서 김독자는 이현성에게 죽으라고 말한 것과 다름없었다. 적어도 제3자에겐 그렇게 들렸다.
". . . 싫어요. 현성 아저씨가 죽는 건 싫어요. 그냥 함께 공략하면 안 돼요?"
"나도 유승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동료의 희생을 보기 위해 강해진 게 아니라고요!"
". . . 그럼 제가 미끼가 되도록 하죠. 희원씨와 유승이는 공격에 특화된 스킬을 가지고 있고, 현성씨도 '태산부수기' 라는 묵직한 한방이 있으니까 손발을 잘 맞추기만 하면 -"
"독자씨!"
"저건 재앙입니다, 희원씨."
김독자가 래서 드래곤을 손가락질했다. 반대편으로 도망친 화신을 물어 뜯은 드래곤이 섬뜩한 안광을 보이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시나리오처럼 누군가의 희생없이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 아닙니다."
"크롸롸롸!!!"
압도적인 위용에 주먹을 꽉 움켜쥔 김독자는 근래 본 밤하늘을 떠올렸다. 옥상에서 본 별동별. 메인 시나리오의 결말을 장식한 유성우는 모든 것을 불사르는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시나리오란. 그리고 삶이란.
동전처럼 때때로 뒤집혀 전혀 다른 일면을 보여주곤 한다.
방금처럼 희망이 절망으로 뒤집히기도 하고.
"끄아아악!!"
간혹 그 반대의 경우도 일어난다.
"독자씨."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제게 하신 말씀은 . . . 명령권을 사용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김독자는 부정했다.
"저는 여러분께 명령권을 사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제 부하가 아닌 동료니까요. 그러니, 이건 명령이 아니라 제안입니다. 싫다면 거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때는 희원씨 말대로 죽기 살기로 덤비는 거죠."
이현성을 위하는 문장의 은연중엔 이현성이 끝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숨겨져 있었다. 한마디로 위선. '오만한 위선의 왕'이란 칭호에 걸맞는 수작이라고, 김독자는 자조했다.
이현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결심을 굳혔다.
"하겠습니다."
정희원이 재차 만류했다.
"현성씨."
"이건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침 제 스킬은 버티기에 특화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 . . "
손바닥으로 방패를 두드린 이현성이 웃으며 말했다.
"저를 믿고 나아가 주십쇼, 희원씨."
정희원이 이를 악물었다. 짧은 시간에도 그새 정이 들었나. 아니다. 그것보단 정희원이란 인간이 이런 상황을 끔찍이 싫어하는 까닭에서 우러난 분노였다.
그녀의 선은 희생이란 개념을 혐오했기에, 멸망한 세계에서 드물어진 인간다운 인간을 잃고 싶지 않았다.
". . . 얼마 안 걸릴 테니 조금만 참아요."
"알겠습니다."
신유승이 핏빛 손아귀를 두르며 입을 벌렸다. 이현성이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정희원 못지 않았다. 더군다나 올림포스의 간접 메시지 탓에 신유승은 이번 사태의 원인이 제게 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아스모데우스가 변호를 해줬지만). 여러모로 마음이 무거웠다.
"죽지마요, 아저씨."
"하하, 최대한 버텨볼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힘껏 잡았다. 시퍼렇게 빛나는 검면. 날카로운 거울에 붉은 역광이 맻혔다.
"옵니다."
[5급 화룡종, '래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이현성을 제외한 일행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뛰쳐나갔다. 홀로 남은 이현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분의 코인을 체력에 투자하고 '헤라클래스의 방패'를 굳건히 세웠다.
그리고 기다림.
기다림을 짧지 않았다.
- 콰콰콰!!
파멸의 불꽃은 제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불태울 기세로 직진했다. 뒤이어 방패와 불꽃이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전신이 쭈욱 밀려났다. 이현성은 신음을 흘리며 죽기 살기로 버텼다.
"끄으윽!!!"
아까보다 강렬한 기세. '헤라클래스의 방패'는 열기까지 막진 못했다. 높은 내구력은 되려 이현성이 천천히 타들어 가도록 만들었다. 이는 끔찍한 작열통으로 이어졌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 콰콰콰!!
설상 가상으로 방패의 일부가 휘어져 화염이 그곳으로 집중됐다. 이젠 전신에 불이 붙은 거나 다름없었다.
"크으윽!!"
허나 이현성은 쓰러지지 않았다. 손이 형체를 잃어가고 죽음이 눈앞에 아른거림에도, 방패를 놓지 않았다.
산 채로 불타는 고통에 흘러내린 눈물이 수증기로 화해 사라진다. 극한의 열기. 방금 흘린 눈물처럼, 모든 것을 놓아버리면 편해질 수 있음에도 이현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버티고, 또 버텼다.
어째서?
'지키고 싶습니다.'
지키고 싶었기에.
자신이 포기하면 재앙의 불꽃은 그의 소중한 사람들을 덥칠 것이므로. 포기하지 않은 게 아니라 포기할 수 없던 것이다.
'지키고 싶습니다.'
간절한 염원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별이 반짝였다.
그 별은 스타스트림에서 가장 굳건한 존재이며, 이현성을 처음부터 지켜본 별이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기 화신을 바라봅니다.]
앙철로봇의 심장이 한 군인의 강철 같은 의지에 박동하기 시작했다.
"흐아아압!"
기합을 터뜨린 이현성이 앞으로 직진했다. 고작 한걸음에 불과했지만 배후성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엔 충분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고뇌합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강철의 주인'에게 경고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올림포스>의 개입을 비난합니다.]
츠츠츳!
"크으윽!"
<올림포스>가 지급한 개연성이 브레스의 지속시간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판이었다.
- 진정한 강철은 수만 번의 담금질 속에서 태어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올림포스>는 이현성에게 시련을 내리고 만 것이다. 방금의 개입으로 담금질에 최적화된 환경이 조성되었다.
또한 강철의 주인은 제 화신을 아끼는 성좌. 저희들의 원한을 갚고자 자기 화신마저 죽이려 드는 성운의 추태를 가만히 두고 볼 이가 아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망설입니다.]
하지만 딱 한걸음이 모자랐다. 그것은 바로 확신. 이현성이 자기 성흔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김독자의 목소리가, 아스모데우스의 간접 메시지가 전달된 것은 그때였다.
"강철의 주인. 지고한 스타스트림에서 가장 굳건한 존재여! 당신의 화신에게 기회를 주시죠!"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개연성을 보태줄 의향이 있음을 넌지시 말해줍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이현성'이 자신의 설화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강철의 주인이 주저하자, 김독자와 아스모데우스의 문장이 겹쳐졌다.
"당신의 화신을 믿어 주세요."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자신의 화신을 믿으라고 독려합니다.]
믿음.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순간이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츠츠츳!!!
[등장인물, '이현성'이 특성 진화를 준비합니다.]
[해당 특성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설화'가 필요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이 설화의 시련을 내립니다.]
[설화, '강철의 증명'이 시작됩니다!]
엄청난 스파크와 함께 이현성의 몸이 강철로 뒤덮였다. 이와 동시에, 래서 드래곤에게 접근한 신유승의 머릿속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를 . . . 풀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