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땅이 녹아내리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계절. 봄이 왔다. 3월의 초봄 날씨는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 코트며 자켓이며 겉옷을 하나씩 걸치고 다녔다. 카페에 앉아 가만히 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다양한 옷차림이 보였다. 개중에는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특이한 옷이 눈에 띄였다. 항공점퍼의 뒤쪽에 대문짝만한 대학 로고를 새겨놓은. 흔히들 과잠이라 부르는 그것이었다. 연인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같은 로고에 비슷한 색의 과잠을 입은 남녀가 사이좋게 걸어갔다.



 나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너와 나는 벚꽃이 피는 날 처음 만났다. 우리 과는 대부분이 단체활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다만 그 날은, 벚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서. 그 꽃에 홀려 저도 모르게 벚꽃놀이를 갔더랬다.

 벚꽃놀이 갈 사람을 찾는다는 과 단톡방의 투표에 참가를 눌렀다.

 과잠을 맞춰 입고 삼삼오오 모이는 과 사람들. 그 사이에 나는 홀로 동떨어져, 그들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어색한 눈인사만 오고 갔다. 저 사람들은 어느새 저렇게 친해진건지. 조금은 쓸쓸해졌다.


 "XX과 맞으시죠?"

 "네? 네..."

 "과잠은 안 사셨구나..."


 첫 만남에도, 너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그렇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내 어색함에도 거리낌없이. 한발자국 내 안으로 다가와, 내 어깨에 제 과잠을 걸쳐주었다.

 그러면서 벚꽃을 보러 가는 내내, 내 옆에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보따리상이라도 된 듯. 제 이야기를 자랑스레 펼쳐놓는 네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픽- 하고 웃으니. 너는 뭐가 그렇게 좋다고. 저가 더 크게 웃어보였다.


 "웃으니까 되게 예쁘시네요."

 "안 웃으면, 안 예뻐요?"

 "그건 아닌데..."


 붉어진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네 모습이 퍽 귀여워 보였다.

 우리는 번호를 교환했다. 몇 번의 만남과, 몇 번의 식사, 몇 번의 데이트가 있었다. 그건 소위말하는 썸이었다. 너는 내가 첫만남부터 좋았더라고 고백했다. 나는 그런 네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 우리 사귈래?"


 처음이라 어색하다며, 꽃다발을 수줍게 내밀며 말하는 네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추억을 쌓았다.


 너도, 나도.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툴렀고, 어색했고, 어설펐다. 그래도 좋았다.

 남자와 손을 처음 잡았다. 너의 손은 크고 듬직했다. 우둘투둘한 굳은 살마저 사랑스러웠다.

 너와 처음으로 본 야경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깜깜한 도시를 비추는 주황색 불빛들. 그 사이에 너와 나.

 오락실도 너와 처음으로 가봤다. 영화관도, PC방도, 당구장도, 볼링장도. 모든 게 너와 처음이었다.

 너와의 첫날밤은, 너와 내가 오롯이 하나가 되었다는 그 사실이 나를 만족하게 했다.


 우리는 조금씩 삐걱거렸다.

 2학기가 되니 우리는 조금씩 바빠졌다. 너는 알바도 시작했다. 나 밖에 없었던 너의 삶에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들어섰다.

 나는 그게 싫었다.

 우리는 연락 문제로 다투었다. 나는 너에게, 조금 더 나에게 신경써줄 것을 바랐다.

 그렇게 서운해 하는 나에게, 너는 조금의 이해를 바랐다.

 서로가 바라던 그 조금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너도, 나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갈라진 틈을 어떻게 메꿔야할지 알지 못했다.


 "우리 헤어지자."


 어느 겨울날 밤에. 그런 말을 성급하게 뱉고, 울며 돌아섰다. 나는 네가 나를 잡기를 바랐다.

 너는 나를 붙잡았다. 미안하다고. 내가 더 노력하겠다고 울었다.

 우리는 서로를 안고, 서로가 미안하다며 울었다.


 이걸로 우리 사이가 조금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 갈라진 틈은 눈물로 메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너와 친구들의 남자친구를 비교했다. 네가 가진 자격지심을 건드렸다.

 싸우고, 울고. 내가 네게 헤어지자 말하고. 화해하고.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벚꽃이 피는 봄이 돌아왔다. 우리가 만난지 300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 전날도 우리는 크게 싸웠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때쯤에는 이유가 없었다. 너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이유가 되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너에게. 땀을 흘리며 뛰어오는 너에게. 나는 매정하게 헤어지자는 말을 건넸다.


 "... 진짜 미안해. 준비할 게 있어서."

 "변명 그만해."

 "변명이 아니고..."


 너는 사람들이 다 보는 와중에도 저가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나는 그게 너무 보기 싫었다.

 그래서 너를 뿌리치고 돌아섰다. 택시를 잡고, 집으로 가면서도. 너는 나를 붙잡으려 했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어려서, 그렇게 나에게 매달리는 너를 뿌리쳤다. 여기서 잡히면 너와의 기싸움에서 밀린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날 너는 연락이 없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연락이 없었다. 너는 그렇게 원래 없던 사람처럼 훌쩍 떠나버렸다.



 교통사고였다.

 시내에서 5중 추돌 사고가 일어났다고 했다.

 너는, 그 사고의 희생자로 돌아왔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너의 부모님을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까만 옷을 입고 텅 빈 눈으로 오열하시는 그 뒷모습으로 처음 만났다.

 그제야 나는 네가 내 삶에서 정말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님은 나에게 전해줄 것이 있다며 무언가를 건네주셨다.

 꽃다발과, 편지와, 작은 선물들. 300일을 기념해서 준비했다는 너의 선물들이었다.


 반지가 있었다. 너와 내 이름이 새겨진 커플링이었다. 반지 케이스에 꽂힌 작은 편지에는, 내가 너에게 투정했던 내용이 녹아있었다.

 친구의 남자친구는 보석이 박힌, 비싼 반지를 해주었는데. 나는 내 텅 빈 약지를 바라보며 너에게 그렇게 투정했더랬다.

 너는 그것이 미안했다고. 지금은 이런 작은 반지지만, 나중에는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선물해주겠다고. 그런 내용을 써놓았다.


 너와 내 사진이 담긴 액자도 있었다. 그 액자에 끼워진 편지에서, 너는 나와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2년, 3년, 10년 뒤의. 나와 행복할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편지에서 그리는 너와 나는 행복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너가 나에게 가진 마음은 그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하루 아침을 울었다.

 내가 그 날 너를 뿌리치지 않았더라면. 나를 잡는 네 손을 따라갔더라면.

 너와의 마지막에, 너를 모질고 이기적으로 대했던 것이 떠올라서.

 나는 그제야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너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어리고 이기적이어서. 그것이 너를 상처입혔음을 깨달았다.



 너가 나를 떠나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아직도 내 방의 책상에는 네가 만들어준 액자가 있다.

 네가 남기고 간 반지도, 여전히 내 손에 끼워져 있다.

 종종 힘든 날에는 네가 남긴 편지를 읽고 눈물을 쏟는다.


 지금은 없는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사랑은 그것 밖에 없었다.



 과잠을 입고 걸어온 남녀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다. 그 뒷모습이, 꼭 우리의 첫만남 같아서.

 나는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너와 나처럼은 되지 않기를.





후회물 보러 왔는데 재밌는 거 많길래 나도 하나 갈겨봄. 이런 게 후회물 맞습니까? 아니면 자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