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regrets/66625372

2편: https://arca.live/b/regrets/67145445


***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츠키 선배와의 추억은 그닥 많지가 않다. 인상 깊었던 순간까지 논하자면 더더욱.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배가 마냥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유형의 인간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선배도 은근 인간미가 넘치는 한 명의 여고생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때는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며, 홀로 탈의실로 들어가버린 아이자와를 기다리고 있을 시점.

불현듯 등 뒤에서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거기서 뭐해?"


"ㅇ,예엣? 누,누구..."


뒤를 돌아보니 그 곳에는 거대한 여성이 서 있었다.

180cm는 족히 넘을법한 키와 짧은 흑발의 머리카락.

배구부의 주장인 나츠키 선배가 분명했다.


"그,그러니까 이건 아이자ㅇ"


당황한 나는 황급히 나의 결백을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너무나도 오해받기 딱 좋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라, 간절한 나의 외침은 닿지 않았다.

나츠키 선배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닥쳐, 변태."


곧이어 선배는 간단하게 발을 걸어 나를 제압한 뒤, 바닥에 쓰러진 나에게 암바를 걸었다.

나는 오해라고 억울함을 토로하며 저항해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꼴사납게 비명을 지른건 덤이었다.


결국 모든것을 포기하고 체념한 그 순간.


"어? 료스케? 어디 갔..."

"꺄아아아악!!! 선배!!!! 그런거 아니에요!!!"


만일 그때 타이밍 좋게 아이자와가 나와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뼈도 못 추렸겠지.

이후 아이자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선배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사과를 하였다.


"미안...! 요즘 교내에 변태가 출몰한다는 신고를 워낙 많이 받아서..."


"괜찮습니다 선배... 제가 워낙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하기도 했고..."


"그래도 나의 잘못은 잘못이야... 다시 한 번 미안하다!"


"그,그러니까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저기... 그 전에 그 손 좀 놓고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그것이 선배와의 첫 만남이었다.

정말 어지간히 미안했는지, 선배는 나와 마주칠 때 마다 그 떄의 일을 사과하기에 바빴다.

철의 여인이라 불리며 배구부의 카리스마를 담당하던 그 선배의 모습이라기엔 좀 깨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괴리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이후 마치고 아이자와를 체육관 앞에서 기다릴 때 마다, 나와 선배는 종종 마주쳤다.

워낙 자주 마주치다보니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날도 여느 때 처럼 종례를 마치자마자 바로 체육관으로 달려와 아이자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여어, 미나즈키."

"오늘도 아이자와를 기다리는거야?"


"아, 선배. 헤헤... 네."


"...아이자와라면 조금 늦을거야. 지금 한창 개인 연습중이거든."


"개인... 연습이요?"


"응, 개인 연습. 아이자와가 워낙 뛰어나야 말이지."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갑자기 기량이나 그런게 팍 상승했거든. 덕분에 감독에게 좋은 방법으로 찍혔지만."


나츠키 선배는 그 광경이 퍽 즐거웠는지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 같은 평화도 잠시. 불현듯 선배는 자신이 들고있던 짐 일부를 내게 던져준 뒤 말했다.


"너, 한가하다면 이거 옮기는것좀 도와주지 그래."


"ㄴ,네? 저 아이자와가 나오면 바로 가야하는데요..."


"어차피 지금 나오는것도 아닌데 뭐. 사내가 되어서 힘 좀 쓰라고."

"저기 교무실 까지만 가면 돼. 설마 이런 연약한 여성을 눈 앞에 두고 도망치는건 아니겠지?"


한 눈에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체육 장비들을 번쩍 들면서, 나츠키 선배는 말했다.

그 압도적인 힘 앞에 감히 대항할 기운을 잃어버린 나는 잠자코 선배를 따라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선배는 꽤나 즐거워보였다. 

그 날의 훈련은 어땠느니, 키가 커서 불편하다느니와 같은 잡담을 하며 웃는 선배의 모습.

평소 학교에서의 선배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허억... 허억..."

"어디까지 가야해요...?"


"아앙? 벌써 지친거야? 웃차, 여기 이 계단 보이지? 여기까지만 내려가면 돼."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구. 발이라도 헛디디면 끝장이니까."


까마득히 높은 계단.

대강 새어보아도 30칸은 족히 넘을 것 처럼 보였다.

그만큼 경사도 높은것은 덤이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대고 있는 나를 지나치며 나츠키 선배는 호기롭게 계단 위로 올러섰다.

커다란 짐을 든 탓에 시야가 다소 방해되었음에도, 선배는 계단을 척척 올라갔다.


"설마 이것도 무섭다며 못 올라가는건 아니겠지?"


선배의 발이 미끄러진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힉?!? 꺄아아아아악!!!!"


선배의 말마따라 저 높이에서 떨어지면 정말 끝장임이 분명했다.

손에 들고있던 짐 따위를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잠시 뒤, 정신을 차려보니 선배는 내 품안에 고이 안겨있었다.



"허억... 허억...! 선배...! 괜찮으세요??"


"...."

"...으,으응?"

"ㅇ,어... 괜찮...은 것 같네..."


다행히 선배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듯 하였다.

정작 어째서 얼굴이 붉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기... 이제 슬슬 놔주지 않을래?"


"아,아! 넵!"


내가 선배를 안고있던 손을 놓자마자 선배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짐들을 줍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아까 내던져버린 나의 짐인듯 하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선배를 돕고자 다가갔다.

하지만 이후 선배가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ㄱ,괜찮아.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아이자와도 마치지 않았을까? 어서 가봐."


"정말 안 도와드려도 될까요? 아까 분명 무거우시다고..."


나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하는 선배덕에 결국 나도 뜻을 굽힐 수 밖에 없었다.

선배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길. 갑자기 뒤에서 선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료스케!"


"ㅇ,예엡??"


"그... 고마워! 아까...전에는."


말을 마친 나츠키 선배는 눈 깜짝할 사이 계단 위로 사라져버렸다.

당시에도 워낙 어이가 없었고, 지금이라고 딱히 다른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사건 이후 나를 대하는 선배의 태도가 은근 유해졌다는 점.


.

.

.


그리고 그런 선배와 나는 오늘 데이트를 한다.

정확히는 데이트 '연습' 이지만.


대체 선배는 무슨 생각이었던걸까.

실연을 맞은 불쌍한 아이를 향한 동정? 아니면 단순한 유희?

분명 선배의 입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으니 전자는 아마 아닐터.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평소에 자각할 일이 없어서 몰랐지만 선배도 여자였으니까.

분명 이성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테고, 그렇기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좋은 모습만을 보이고 싶었던거겠지.

그제서야 나는 선배의 심리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임해야하는가' 가 관건이었다.

간단한 유희라면 나 또한 즐기면 될 터.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선배가 그랬듯이 나도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자와를 다시 만나는 것.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것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배를 최대한 만족시키는것이 필수.

그렇기에 마냥 즐기기만은 할 수는 없었다. 대충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약속 장소에 나가니 선배는 일찌감치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 어차피 선배의 집 앞이니 어쩌면 당연한거였지만.


"늦잖아 료스케."


"아직 약속시간 30분이나 남았는데요..."


"그래도 여자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기다리는 사람의 심리는 생각 안 해?"

"...그래도 뭐. 어차피 상관없어, 연습이니까. 기다리는것도 연습의 일환으로 하면 되지. 가자!"


선배는 웃으며 내 손을 이끌었다.

자연스래 손을 잡는 선배의 대담함에 놀라면서도, 이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그나저나 우리 어디가요?"


"응? 그러고보니 그걸 안 정했네."


선배는 정말 화려한 준비성에 놀라 어이 없어하는 나에게, 천진난만한 미소로 대답하였다.

교복을 입은채로 말이다. 그것도 데이트에.


물론 연습이랬으니 별 상관은 없다만 그래도 신경쓰이는건 매한가지였다.

형식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데이트는 데이트. 내 목적을 위해서라도 이는 가만 두고볼 수 없는 안건이었다.


"...갈 데 없으시면 같이 옷이나 사러 가실래요?"


"뭐? 옷? 그걸 왜 사?"

"안돼 그거. 돈 낭비야. 차라리 맛있는걸 먹으러 가자."


"옷을 왜 산다니요... 그럼 계속 교복만 입고 다니실거에요? 그 불편한걸?"


"왜~! 교복이 뭐가 어때서!"

"자, 봐봐! 몸에 딱 맞고 얼마나 편한데!"


"그러니까 교복이 몸에 딱 맞으면 문제잖아요..."


"흐응, 아니거든? 잘 늘어나고 통기성 좋고. 옷이 이보다 좋을 순 없잔아!"

"...뭐야. 잘 못 믿겠다는 눈치인데. 잘 봐! 여기, 여기!"


선배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듯 여기저기 몸을 뒤틀며 교복의 신축성을 보여주었다.

몸에 착 달라붙은 채 굴곡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교복은 선배의 의도가 어찌했든간에 나의 심상을 상당히 심란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크게 부각되는 저 흉부. 유난히 탄력있고 거대한 선배의 그...

더 이상 나를 위해서라도 그저 가만히 보고 있을 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거,거기까지요 선배!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진작 그럴것이지. 그럼 불만 없지? 첫 장소는 음식점으로!"


"하아... 네."


뭔가 처음부터 단단히 꼬인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 시작인데 놓아버리기엔 아직 이른 시점었으니, 나는 힘을 내기로 했다.


선배와 함꼐 도착한 곳은 그녀가 공언했던 대로 음식점이었다.

문제는 그게 규동집이었다는거.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규동집에 올 줄이야.

하지만 하늘하늘하게 웃으며 버튼을 누르는 선배의 표정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음식은 규동이지~ 료스케 너도 시켜!"


일부러 그러는걸까 아님 진짜로 모르는걸까.

그러나 선배의 저 환한 표정을 보니 아마도 후자일듯 싶었다.


"어어... 저는 치즈 규동이요."


"어라, 료스케 너 그런 이미지로 안 봤는데...후훗"


"...뭐가 어때서요??"


"농담이야 농담. 어서 들어가자."


규동집이 늘 그렇듯, 안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저 적절히 한 끼를 때우기 위해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갖 사이드메뉴를 추가해 한 상 거하게 먹는 사람도 있었다.

나와 선배는 적절히 구석에 있는, 비교적 조용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것도 본래 낮술한 취객 옆에 앉으려는것을 내가 겨우 뜯어말린 결과였다.


"이렇게 자리에 앉는것도 오랜만이네. 보통은 저기 주방 앞 테이블에 앉아서 먹었거든."

"점심시간이 워낙 짧으니까 말이야... 이렇게 여유있게 식사를 하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선배는 규동 좋아하세요?"


"규동? 싫진 않지. 싸고 먹을만 하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아. 뭔가 신물이 난다고 해야하나."


"그렇다면 어째서..."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닷!! 맛있게 드세요!!"


직원분께서 끼어들어주신 덕분에 내 질문은 정말 다행스럽게도, 선배에게 닿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다소 무례한 질문이 아닌가. 선배로 분명 생각이 있었을텐데 말이지.

나는 말없이 한껏 들뜬 선배의 곁에서 규동을 우걱우걱 먹었다.


"휴우~ 좋았다. 넌 어땠어 료스케?"


"예,예엣? 저는 물론 좋았죠. 맛있었어요."


"에이~ 거짓말 치지마. 표정에 다 드러나는걸?"

"역시 데이트 장소로 규동집은 좀 그랬으려나? 미안하게 됐네..."


"아,아니에요! 진짜로 좋았어요."


"그랬으면 아까 여기 왜 왔냐고 물어보질 않았겠지 임마."

"...미안. 생각나는데가 여기밖에 없었거든."


선배는 한층 풀이 죽은듯한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질문이 닿지 않았다는건 내 착각이었다. 그놈의 말. 뭐든지 항상 후회하는 타이밍이 늦잖아 나는.


"매일 점심시간에 규동, 마치고 규동... 그 외에 다른걸 먹어본적이 없아."

"나도 물론 비싸고 맛있는거 먹어보고 싶지...! 그런데..."


"..."


"그런데 아는 곳이 없는걸..."

"쨋든 미안하게 됐네 료스케... 내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ㅇ"


"아아아아!!!! 그,그래서 다음 일정이 어디랬죠?"

"그래 옷...옷가게! 옷가게로 가요 선배! 계속 교복만 입을수는 없잖아요? 자, 가요! 어서!!"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선배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꽤나 대담한 행동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아무리 연습이라고 한들 상대방의 기분을 그 따위로 잡쳐놓으면 데이트 상대로 실격이기 때문이다.


"어,어어...?"

"...음. 그,그래..."


이후 정말 다행스럽게도 선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와주었다.

덕분에 내 입장에선 차후 계획을 수립하는데 시간을 더 투자할 수 있으니 절호조였다.

헌데 선배가 이 정도로 말이 없던 사람이었나? 


***


"다시 다시! 패스가 그게 아니잖아!!"


힘들다. 고통스럽다.

이젠 뭘 더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연발되는 실수에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까지.

난생 처음으로 연습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잠깐 잠깐! 잠깐 휴식!"

"아이자와, 넌 이리로 와보렴."


또 나야.

이번이 몇번째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마지못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자와. 요즘 힘들다는거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연습을 개을리 하면 안되지? 인터하이가 얼마 남지 않았어."


알고 있다고. 그깟 인터하이따위.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알면 뭐해. 제대로 하지를 못하는데.


"...죄송합니다."


의미없는 사죄. 오직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고개를 숙인 뒤 자리로 돌아가니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아이자와가 아이자와가 아니네?"


"그러게... 왜 저렇게 됐지? 몇 주 전 까지만 하더라도 잘나가던 에이스였는데..."


다 들린다고 이 년 들아.

하지만 내색해선 안됐다. 에이스라는 네임벨류는 중요했으니까.

다가오는 인터하이. 모두가 내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때문에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아니, 용납할 수 없었다.


"자자, 다들 조용! 연습에 집중해!"


오늘따라 코치의 목소리가 더욱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젠장. 이럴 때 선배는 어디로 간거야?


"허억.... 허억...."


주말 아침부터 지속되는 연습.

물론 이해한다. 아침부터 강도높은 운동을 하기엔 역시 힘들겠지.


하지만.

하지만 너무 벅차다.

특히나 선배가 연습을 빠지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더욱.


본래 내 포지션은 미들 블로커, 선배는 세터였다.

그러나 선배가 없는 지금, 자연스래 그 자리는 내게로 넘어오고야 말았다.

물론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미리 복수 포지션을 연습해왔으나, 결국 부족한건 매한가지.

새로운 포지션에 대한 적응은 매 순간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이자와 선배, 많이 지치신것 같은데..."


"허억.... 허억....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너희들은.... 허억.... 어서 가서.... 으읏...?!?!?"


순간 눈 앞이 깜깜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곧이어 머릿속을 강타하는 불쾌한 이명음까지.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바닥에 누워있었다.


"괘,괜찮아요 선배?"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감독님도, 저희들도 너무 당황해서..."


그제서야 방금전의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뭐지. 예전에는 이런적이 없었는데.


"아이자와는 오늘은 이만 집으로 가도록 해."

"체력관리는 정말 중요하니까. 인터하이까지 회복해야지."


"하지만 감독님 저는 아직 더..."


"방금 증상, 빈혈이야. 너가 너무 무리했다는 증거지."

"지금 회복하지 않으면 위험할수도 있어, 아이자와. 오늘은 내 말을 듣도록 해."

"...매일 홀로 남아서 연습하는거 알고 있다. 하지만 경기보다는 건강이 우선이야."


"....네."


어쩔 수 없이 지친몸을 이끌고 체육관을 나섰다.

부끄러웠다. 수치스러웠다. 팀을 이끌어나가야할 에이스가 체력방전으로 쫒겨나다니.

하지만 한 편으론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다.


탈의실에서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서는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에! 괜찮아?"


"...료스케?"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곳에는 료스케 대신, 같은 배구부 소속의 마도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기대했던걸까, 나는.


"괜찮아 하나에? 혼자 갈 수 있겠어?"


"...으응. 괜찮아."


한숨이 나왔다.

나도 참, 료스케일리가 없잖아.


때때로 연습경기를 마치고 이렇게 탈의실을 나서면, 그곳에는 료스케가 날 기다리곤 했었다.

환하게 웃으며 내게 이온음료를 건내는, 그런 따뜻했던 료스케의 모습은 이제 없다.


"..."


언제까지나 허공만을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늘 해가 뜨기 전에 체육관으로 나와, 해가 지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것이 일상이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이렇게나 푸르고 맑은 하늘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푸르른 나뭇잎들과 맴맴 하고 우는 매미들. 비로소 여름이라는것이 실감되었다.


"여름..."


생각해보니 그 날도 여름이었다.

길을 걷다보면 나오는 카페에서, 함께 파르페를 나누어 먹었던 그 날.

문득 떠오르는 추억에 미소 지으면서도, 이젠 모두 과거의 일이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절로 무겁게 했다.


이 카페에 들어가 함께 파프레를 시키고.

한 컵에 빨대 두 개. 그래, 갯수까지 모두 기억난다.

모든것이 바로 어제의 일인마냥 기억이 생생하다.


무려 1년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


잠깐.

그러고보니 딱 1년 전 이었구나.


그제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료스케가 평소답지 않게 그토록 연락을 시도했는지.

어째서 료스케가 그날따라 유독 실망감에 젖어 있었는지.


어째서. 

어째서 난 몰랐던걸까?


"...1주년."


그래봤자 이미 다 끝난 일이다.

이제와서 기념하려고 해봐도 엎질러진 물이기에.

돌이킬 수 없다. 내가 시작한 인연, 내가 끝낸 인연이니까.


내가 너무했던걸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 시기의 나는 분명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었어.

그렇기에 료스케도 내 갑작스러운 이별선언에 별 토를 달지 않은거겠지.


내 꿈을 응원해주기로 한 이상, 그리고 내게 꿈을 불어넣어준 이상 료스케도 어느 정도는 각오 했을터이니.

따지고보면 료스케가 너무 필요이상으로 집착해서 벌어진 일이잖아. 난 잘못이 없어. 난 결백해.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도 마음 한 켠이 불편한건 매한가지였다.

처음 이별을 선언했던 그 순간 이후로 쭈욱, 내 가슴속 짐이 되어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으으읏."


또 다시 머리가 아파져오기 시작했다.

젠장. 이래서 더 남아있겠다고 한거였는데.

차라리 배구를 하고 있었더라면 힘들지언정, 이렇게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일은 피했을테니까.


질끈 감았던 눈을 뜬 그 순간.

불현듯 나타난건 갈림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하고도 조금 전.

나와 료스케의 인연이 시작되었던 그 갈림길이.

내게 우산을 씌워주고, 내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려준, 그 갈림길이.

늘 서로 함께하고 같이 지나던 그 갈림길이,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하아아."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나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이러면 말짱 도루묵이잖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헛수고를 했는지도 모른다.

잊을 수 있을리가 없잖아. 잊기엔 이미 너무나도 깊이 새겨져버렸는걸.


그래서, 그냥 걸었다.

왠지는 모른다.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골목을 조금 걷고 싶었을 뿐이다.


이 벽. 이 전봇대. 이 우체통까지.

골목의 모든곳에서 그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이의 발자국과 숨결이 바로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것만 같았다.

마치 살아움직이는 것 처럼 아주 생생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말이다.


역시, 잊을 수 없었나보다.

나는 두 눈을 질끈감았다. 두 귀도 막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았다. 

죄책감에 미쳐버릴것만 같았으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듣고싶지 않았다. 

상실감에 울어버릴것만 같았으니까.


사라져. 사라져.

더이상 나를 방해하지 마.

내 인생을 가로막지 마.


그저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줘.

날 붙잡지 말아줘.

내 미련을 자극하지 말아줘.


제발 그만.

그만 사라져주세요.

부탁이니 제발 그냥 떠나가주세요.


제발.


제발.


"...!!!"


하지만 바뀌는것은 없었다.


그 골목은 그대로 제자리에 있었다. 

전봇대도, 우체통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물며 내 실력마저도, 그때 그 실력 그대로였다.


단 하나. 오직 료스케만 없었다.


"...스읍...."

"...후우...."


강해저야해.

잃지 않고서는 얻을 수 있는게 없어.


인터하이가 얼마 남지 않았어 아이자와.

집중해야해. 지금은 과거에 얽매이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인터하이만 끝나면, 다시 모든걸 되돌릴 수 있어.

그때가 되면 잃었던걸 다시 되찾을 수 있어.


"...스읍...."

".......후우......"


하지만 그게 모두 무슨 소용이야?

이미 난 모든걸 잃어버렸지만, 돌아오는건 없는걸.


모두 버리고 떠나왔지만.

지금의 나를 보면 과연, 내게 그럴 가치가 있었을까?


"....스읍........."

"...후우....후우우.....후우우으으으...."


역시 무리였다.

어쩌면 나도 속으로 내심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잘못된 선택이라는것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포기하기엔, 그 가치가 너무나도 컸다는것을.

다른 누구보다 순수하게, 오직 나만을 바라봐주던 사람은 코치도, 선배도, 친구들도 아닌 오직 그.

료스케 뿐이었다는것을.


"흐윽.... 흐으으윽...."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고통스러웠다.

누가 나를 때리지도, 병에 걸린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머리는 얻어맞은 것 처럼 아파왔고, 가슴은 병에 걸린것 처럼 시큰거려오기 시작했다.



이내 나는 꼴사납게 벽에 기대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길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우리 학교의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 따지고보면 다 남들인데 뭐. 난 도대체 뭘 기대한걸까.


"읏,흐으윽...!!!"


결국 도망쳐버렸다.

골목의 깊숙한 곳을 끊임없이, 마치 빨려들어가는 것 처럼 내 몸을 의탁했다.

달리고 또 달렸다. 발걸음은 멈출줄을 몰랐다.


너도 잘 알잖아 아이자와.

이 세상에서 널 챙겨줄 사람은 너 밖에 없어.


모두 네 손으로 정리해버렸으니까.


배구. 인터하이.

모든것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겐 이제 달리 돌아갈 길이 없었다.


모두 내 손으로 정리해버렸으니까.


***


잠시 뒤 도착한 옷가게.

선배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와... 이런덴 어떻게 아는거야? 완전 멋지다..."


"헤헤... 다 방법이 있죠."


그래. 다 방법이 있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데가 생각나지 않았던 나는 결국 일전에 미리 봐두었던 장소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주년을 기념한 이벤트에서 아이자와와 함께 가기로 했던 가게. 

당시 꽤나 사전조사도 열심히 했던걸로 기억하는데, 그 지식을 여기서 써먹게 될줄이야.


가게에 들어서니 직원이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어서오세요! 커플분이신가요?"


"아...그게..."


"네... 커플이요."


당황하는 나의 옷깃 소매를 지그시 잡아당기며, 선배가 말했다.

아, 맞다. 그런 설정이었지. 


괜스래 무안해진 나는 선배의 설정에 맞추기 위해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진짜 커플처럼 손을 잡는다더니, 아님 바짝 붙어있는다던지.

뭐 나름대로 열심히 하긴 했는데, 아마 잘 안됐나보다.


"...뭐하는거야?"


나츠키 선배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속삭였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나는 말했다.


"네? 그,그게 커플이니까..."


"...대체 어느 커플이 너처럼 어색하게 끌어안냐?"

"너 연애도 해봤다며. 커플은 어떻게 할지 너가 잘 알거 아냐!"


"그,그게 사실 저도 이런건 처음이라서..."

"아이자와랑은 그게, 손...밖에 안 잡아봐서..."


"...아이자와가 안 가르쳐줬어?"


"....네."


"그,그래?"


선배는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더욱 어색해진건 덤이었다.

정말 오늘은 왜 이렇게 되는게 없지?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인지는 몰라도 하루 종일 무언가가 어긋나있는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 만은 없는 노릇.

우물쭈물하며 제자리에 멀뚱히 서있는 선배를 대리고 나는 진열된 매대로 향했다.


"...왜요? 옷이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선배는 말끝을 흐리며 수줍은듯 우물쭈물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게 있는 듯 했지만 선배는 그저 바닥만을 바라보며 내 옷깃을 잡아당길 뿐이었다.

그렇게 침묵의 실랑이가 계속되던 그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이런게 처음이라..."

"...너가 좀 골라주면 안돼?"


"제,제가요?"


선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감했다. 나라고 여자 옷 고르는 법을 알고 있을리가 없었으니까.

아이자와 이전에는 연애 경험이 아예 없기도 했고, 아이자와와는 데이트 다운 데이트를 해 본적이 없기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걸까.

정말 다행스럽게도 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직원분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와드릴까요?"


"아...!! 네! 네네..!!"


십년을 감수한듯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니 옷가게를 오자고 한 사람이 나인데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 숨고 싶었다.

직원분께선 선배를 대리고 가게 내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이윽고 선배는 수줍게 웃더니 직원분의 안내를 받아 어딘가로 향했다.

맥락으로 보아 아마 탈의실인듯했다. 그말인 즉슨 선배는 이미 마음에 드는 옷을 골랐다는거.


결국 여기서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선배가 내게 직접 옷을 골라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말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정작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

아이자와에게도 그랬고, 이젠 선배까지.


그때, 직원분께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남자친구분? 잠시 이리로 와주시겠어요?"


나는 애써 얼굴을 펴고 직원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선배의 첫 데이트 '연습' 을 망치면 안되니까.


그러나 그곳에는 여전히 교복차림의 선배가 있었다.

손에는 옷 두개를 잡은 채, 선배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직원분께서 도와주셔서 고르는데는 성공했는데... 역시 잘 모르겠어서."

"너는 어느게 더 나은 것 같아?


"어...어...?"


예상 외의 일이었다. 선배가 내 생각을 읽은걸까?

한창 낙담하며 좌절감에 빠져있었는데,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밀짚모자.

그리고 하얀색 탱크탑과 검은색 반바지.

둘 다 선배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기에 나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 동안 선배는 계속해서 느려터진 나의 선택을 기다려주었다.


"어... 저는 왼쪽거요..."


"어머~ 역시 커플은 통하나봐요~!"

"사실 아까 여자친구분께서도 그걸 고르셨거든요!"


"...정말요?"


"...!"

"아... 아니거든?! 이상한 생각 하지마!!"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스파이크를 대인용으로 사용할 시 매우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

.

.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구매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음에도 등은 여전히 얼얼한 상태 그대로였다.

본의 아니게 스파이크를 갈겨버린 장본인인 선배는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듯 했다.


"미,미안... 많이 아팠어?"


"아,아뇨... 괜찮아요 헤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아마 지금쯤 등에는 커다란 멍자국이 새겨져 있겠지.


나와 선배는 잠시동안 말없이 걸었다.

이제 이 갈림길을 지나 선배를 배웅하고 나면 '연습' 도 이젠 끝일터.

그렇게 된다면 나는 아이자와와 다시금 함께할 기회를 얻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토록 아쉬운 마음이 드는것은.


독단적으로 생전 가보지도 않은 옷가게에 들러 선배를 곤란하게 했다.

비록 의도한건 아니었다만 노골적으로 불편한 티를 내어 선배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미련이 남았다. 왜 더 잘하지 못했을까.

만일 딱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저기, 선배."


"응? 왜?"


"그... 오늘은 죄송했습니다."


나는 선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선배는 몹시 당황하였는지 나를 만류하며 말했다.


"...에? 어째서? 너가 미안할게 어딨다고 그래?"


"그게, 기껏 소리치며 선배를 옷가게로 대려왔는데 정작 저는 아무것도 못한 채 가만히 있었잖아요."

"만약 직원분이 아니셨더라면 선배는 옷을 고르지도 못하셨을거고... 그렇게 되면 정말 최악이었겠죠."

"...죄송합니다 선배. 제가 선배의 연습을 망쳐버렸어요."


"..."

"고개 들어 료스케."


선배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망쳤다니? 난 오히려 좋았는데. 네 덕에 처음 옷가게도 가보고, 함께 옷도 고르고. 난 오늘 너~무 즐거웠는데?"

"그리고 네가 미안할게 어딨어? 미안해야할건 오히려 나지. 너의 의견을 묵살하고 멋대로 행동했으니까."

"상심하지마. 어디까지나 연습이잖아? 설령 네가 실수했다 하더라도 나는 별로 신경 안 썼을거야."


"...예?"


"난 오히려 네게 고마운 감정 뿐 인걸. 생전 옷가게와는 인연도 없던 나를 이렇게, 옷까지 골라주며 이끌어줬잖아?"

"...덕분에 좋은 연습이 됐어 료스케. 그리고 즐겁기도 했고."


선배는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찰랑, 하고 흔들며 말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었다. 민폐였다면 정말 죄송했을텐데.

비록 아이자와에겐 그러지 못했지만, 선배에게라도 도움이 되었으니 그것 만으로 족했다.


뿌듯하면서도 동시에 씁쓸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해어질까."


"...그럴까요?"


"그래. 오늘 수고했어 료스케. 집에 잘 돌아가고."


"네, 선배도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잘 들어가세요."


"...그동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야?"


"...예?"


선배는 다시금 발걸음을 돌려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지. 내가 말 실수라도 한걸까나. 가슴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누가~ 누가 제멋대로 그동안이래~?"

"설마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날거라고 생각한거야?"


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쿡쿡 찌르며 선배는 말했다.


"넌 연습을 한 번만 하니? 내가 말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넌 나와 계속 붙어 다녀야해 후후... 몰랐구나?"


"아니, 그,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어라...? 아이자와 만나기 싫어?"

"흐음... 싫다면 말해. 언제든지 그만둬도 괜찮으니까. 대신 아이자와와의 면담은 없던일로?"


"그,그건..."


"히힛. 그럼 다음 주도 이 시간에 우리 집 앞으로 나와! 먼저 갈게!"


쏜살같이 사라져버린 선배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젠장. 어쩐지 잘 대해준다 싶었어. 완전 사기잖아.


"...푸훗... 하하하..."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허탈했달까.

속았다는 생각에 이마를 탁 치면서도 화는 나지 않는, 뭔가 애매한 기분이었다.


"다음 주라..."


그래. 비록 몇 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니.

훗날 내 연인이 될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아이자와를 위해서라도 선배와의 시간은 분명 이득일 터.

다음번에는 기필코 실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허억.... 훌쩍, 허억.... 허억...."


얼마나 지났을까.

이젠 더 이상 내가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었다.

숨은 점차 가빠져왔고 눈물은 차올라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음 보는 골목길이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한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나는 다리의 힘마저 풀리고 말았다.


더 이상의 방황은 싫어.

아무나, 제발 아무나 도와주세요.

내게 길을 알려주세요.


난 이제 어쩌면 좋죠?


그러나 아무리 허공에 외쳐본들 대답이 들려올리는 만무했다.

역시 괜한 기대였던걸까나. 구원의 손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점점 나 자신이 미쳐감을 느꼈다.

어디서든 료스케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서든 료스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미련이라도 남은 것 처럼.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생각해보니 코미디였다.

분명 내가 결정한 일일텐데, 날 위해서 결정한 일일텐데.

어째서 뒤늦게 후회를 하고 있는걸까나 나는.


"하하.... 하하하...."

"....하....하하...."


료스케는 소중했다. 하지만 배구는 더욱 더 소중했다.

료스케와 같은 사람은 훗날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던, 유일한 강점이었던 배구마저 잃어버린 지금.

내게 남은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료스케는 없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이도 없어.

방황하는 나의 길을 바로 잡아줄 사람도 없어.

날 도와줄 사람 따윈 어디에도 없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였다.


"...., ...."


어디선가 익숙한 료스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허상일게 뻔하니까.

그러나 그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정확하고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료스케?"


인간은 나약하다.

그렇기에 설령 헛된 희망이라도 잡고 싶어하는것이 본능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려오는 골목 끝을 서서히 바라보았다.

비쳐오는 햇살 사이로 인간의 형체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료스케가 맞든 아니든, 나는 그것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제발... 제발...!"


길고 긴 골목을 마침내 빠져나왔지만 그 어디에서도 료스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또 허탕이었다.


"허억..... 허억..... 꿀꺽, 허억...."

"....흐윽...!!"


대체 료스케가 뭐라고.

널리고 널린 남자애 한 명, 그깟 남자애 따위가 대체 뭐라고.

나를 이토록이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이 목소리도.

지금 내 눈 앞에 아른거리는 저 모습마저도.

어차피 모두 거짓일 터.


진짜가 아니라면 제발 사라져달란 말이야.


'사라져... 사라져....'

'사라져.... 사라져....!!!! 사라지란말이야!!!!!!!'


"....핫."


하지만 어째서인지 사라지지 않았다. 저 목소리도, 저 모습도.

몇 번이고 다시 눈을 비빈 뒤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자그마하게.

환상이 아닌 진짜 료스케가 다가오고 있었다.


손끝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전신을 감싸는듯한 전류가 온 몸을 타고 흐르는게 느껴졌다.


"...스케."

"료스케.... 료스케.... 료스케....!!!"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다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어째선지는 모른다. 

그에게 인사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다시금 만나자는 뜻을 전하려는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내 가슴은, 그 어느 때 보다 두근거리며 고동을 울리고있었다.


료스케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 까지는.


단지 그를 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의 목소리를 다시금 들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족했다.

하지만 이런 형태를 바란것은 아니었다.


내겐 보여주지 않던 미소.

내겐 들려주지 않던 한껏 들뜬 목소리.

그것은 모두 단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었다.



"...선배?"


료스케의 옆을 차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배구부의 주장.

나츠키 선배였다.


***


후회 아직 안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