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19화


***


차가운 바람.

씁쓸한 잿빛 하늘.

눈가에 비친 슬픈 얼굴.


".....우으으으."


히나는 문득 느껴지는 두통에 신음하며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살결에 느껴지는 냉기의 돌풍과 눈 앞을 아른거리는 흰 잿가루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밝은 주변 환경까지.


히나는 머잖아 강렬한 위화감을 느끼고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곳곳에 의식을 잃은 채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그녀의 파티원들, 이를테면 유우카라던지.

수많은 잔해들과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등, 세기말적 분위기의 풍경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당황한 히나는 자신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의 존재도 깨닫지 못한 채, 말없이 거친 숨만 헐떡일 뿐 이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거지...?"


고치. 고치 안의 괴생물체.

섬광과 함께 고치가 열린 것은 기억이 난다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맹렬하게 몰려온 구토감과 함께 기절해 버린 그녀였기에.

그녀는 그녀가 잠들어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무슨일이 일어난거람 이라며, 히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주변을 탐색하던 그녀의 눈가에 문득 한 물체가 밟혔다.

처참하게 무너진 잔해에 기대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는 신원 불명의 여성.

뿔 한 쌍이 머리 뒤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녀와 같은 게헨나 출신인 듯 하였다.

히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하여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이 점차 빨라짐과 더불어 그녀의 심장 또한 서서히 그 박차를 가해갔다.

행여나 자신이 아는 얼굴이 아니기를 바라며, 히나는 입술을 꼬옥 깨문 채 말없이 전진했다.


"저,저기. 괜찮아?"


마침내 도착한 잔해 앞.

그러나 여성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헤일로가 보이지 않았으니.

히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여성의 고개를 들어보였다.


"...!!!"


털썩.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히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제발 자신이 아는 얼굴이 아니길 바란다고. 그렇게나 속으로 기도했던 히나였건만, 현실은 잔혹했다.


"리쿠하치마... 아루...??"


게헨나. 한 쌍의 뿔.

어딘가 고급스러우면서도 많이 해진 코트까지.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허당끼와 더불어, 틀림없는 아루였다.


빛을 잃어버린 동공과 푸석푸석 해진 피부.

그리고 어째선지는 몰라도 푸르딩딩하게 부어오른 다리까지.

이를 말없이 바라보던 히나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녀의 목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


다행히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경동맥의 심장 박동.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일단 한 숨은 돌렸지만, 여전히 앞길은 막막했다.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녀는 조용히 탄식했다.


"아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어째서... 어쩌다가 이런 꼴이... 젠장...!!"

"...설마!!"


히나는 황급히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불타고 있는 샬레 사무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필름이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 있던 장소가 바로 사무실이었다.


어째서인지 땅으로 내려와 있는 자신과 그녀들, 그리고 부어 터져버린 아루의 다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명확한 한가지 결론이었다.


"....뭐야, 혼자서...??"


선생을 지키기 위해 모인 그녀들.

사오리를 비롯한 여러 인원들의 이탈이 있었지만 못해도 10명이 넘는 인원을 홀로 옮기다니.

그것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저 높이를. 그것도 맨 다리로 내려오다니, 히나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게헨나의 선도부장인 그녀.

그녀가 기억하는 평소의 아루는 골칫덩이였다.

붉은 머리와 세 떨거지들. 수상할 정도로 자주 파산하는 모지리들.

늘 되도않는 사업을 붙잡으며 사고만 일으키고 다니는 그녀를 히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1주년. 2주년을 지나 최근까지.

꽤나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오며 알게된 그녀의 이면은 히나로 하여금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단정한 몸가짐에 게헨나 답지 않은 통솔력과 지도력. 그리고 서예까지... 그녀는 히나가 바라는 완벽한 인재상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된다면 그녀에게 선도부장 직을 물려주겠노라고, 히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째서... 대체 왜....??"

"혼자서라니... 뭐가 그리 급했던거야... 왜 이 지경이 될 때 까지...!!"


수많은 피멍들로 물들어버린 그녀의 다리.

형태를 잃어버린 채 서서히 무너지는 살갗을 히나는 차마 끝까지 볼 수 없었다.


"크흑...."


그때, 그녀의 탄식에 답이라도 하듯 아루의 헤일로가 천천히 깜빡이기 시작했다.

이에 히나는 미처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이, 곧바로 아루의 미약한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으. 으으..."


"...!!"

"괘,괜찮아? 정신이 들어?"

"나 여기 있어. 여기 있으니까..."


"으으... 히....히ㄴ...ㅏ....."


"으응,듣고 있어... 괜찮아... 다 괜찮을거야..."


"흐윽,선ㅅ... 선ㅅ니ㅁㅣ.... 선ㅅ..."

"선..... ㅅ....."

"..."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한거지? 선생님이 왜?"

"그러고보니 선생님이 안 보이시는데.... 그래서? 무슨 말이야 그게?"


"..."


"...아루?"

"아루...??? 듣고 있어?"


히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아루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얇은 와이셔츠 너머로 이먁하게나마 느껴지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당황한 히나는 재빨리 아루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


아니나 다를까, 꺼져버린 헤일로.

퀭하니 풀린 그녀의 눈동자엔 이미 생기라고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힘을 잃어버린 검은 동공 구멍을 말없이 바라보던 히나는 잠시 뒤, 천천히 그녀의 눈을 감겨주었다.


"..."

"......"


이오리. 아코. 그 밖에 수많은 선도부원들.

그리고 선생. 사오리. 마지막 신규 명단에 리쿠하치마 아루까지.

지금껏 그녀가 보내온 소중한 동료들의 목록에 또 한 줄이 추가되고야 말았다.


"....우웃, 웃..."

"....하아...!!!!! 후우...... 후우웃....."


가슴이 먹먹하니 시려워 오기 시작했다.

머리는 얻어맞은 듯 띵하고 손발은 천천히 오그라들었다.

곧이어 눈가에 송골송골 맺히는 눈물 방울에 그녀는 적잖은 혼란을 느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향연에 히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힘겹게 토해내었다.


"하아.... 하아아..... 후욱, 훗.... 흐윽..."

".....웃, 이이익....!!!!! 히이익...! 히익....! 힉.... 힉....."

"...흑, 흐흑...... 흑....... 아으윽..... 후으으읏..... 흐윽....!!!!"


그녀 자신도 이 감정과 기분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냥 처음 느껴보는 감정은 아니라는 것.


"....흐아아아...!"

"젠장... 젠장....!! 젠장....!!!"


수차례나 바닥을 내려 찍으며 고통스러워 하는 히나.

하지만 고통의 근원은 찬찬히 멍들어가는 두 손이 아닌 가슴 속 깊은 곳 이었다.


"젠장..... 씨바아아아아알...!!!!!!!"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린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들.

피가 철철 흐르고 붉게 부어올랐지만 그녀는 전혀 고통스러운 기색이 없었다.

이미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흐윽.... 흑....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

"왜 바보같이 혼자.... 혼자서 우리를..... 왜애.... 왜애애애...!!!!"


옥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그녀는 오열했다.

너무나도 눈물을 많이 흘린 탓인지 이번이 몇번째인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실의 슬픔은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았다.


"으으... 으으으..."


부쩍 소란스러워진 주변 탓인지, 유우카를 필두로 쓰러졌던 그녀들이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항폐화된 주변과 참상을 목격한 유우카는 방금 전 히나가 그랬던 것 처럼 비슷한 전철을 차례차례 밟아나갔다.

단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유우카는 첫 발견자가 아니라는 것.


"...저기, 히나."

"괜...찮아? 무슨 일이야...?"


주저 앉은 채로 조용히 흐느끼는 히나.

익숙하지 않은 광경에 이를 바라보던 유우카의 심장도 점차 떨려오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한사코 부정했지만, 주변의 모든 상황이 그녀를 천천히 비극으로 이끌고 있었으니까.


"히나... 히나...!!"

"그러니까 괜찮... 히익...!"


식겁한 유우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야 말았다.

너무나도 끔찍했던 아루의 상태에 당황한 그녀는 떨리는 긴장을 애써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거야?? 왜 아루가...!!"

"아루가 우리를 모두 옮겼다니...?"


"..."


"히나... 설명해봐. 어떻게 된거야?"

"뭐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냐구...!!"


"...모르겠어. 모르겠어...!! 나도 하나도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하면 끝날 문제가 아니잖아...!!!!"

"넌 봤을거 아냐.... 최소한 나보단 먼저 깨어났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모르겠다고오...!!"
"어쨰서..... 어째서 아루가 이렇게 되었는지..."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 무력했다고 나는....!!!"


"이렇게 되었다니... 설마...!!"


유우카는 재빨리 히나를 밀치고는 아루를 진찰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맥을 짚고 동공에 빛을 비추어 보아도 그녀의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 안돼."

"안돼안돼안돼안돼...!!"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과 더불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현실을 부정하는 유우카.

뒤늦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해 보았지만 이미 떠나간 영혼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리가.... 그런...!!!"


아리스. 코유키. 선생님. 사오리. 그 밖에 수많은 밀레니엄의 학생들.

요 근래 유우카는 평생 동안 겪어야할 수많은 죽음들을 일순간 몰아 겪어왔다.

정신이 무너지는게 당연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그럼에도 항상 냉철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그녀였다.

사망했던 선생이 기계의 몸을 빌려 불완전하게나마 되살아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앞으로 더 이상의 죽음은 없어야만 한다며.

그렇게 애써 무너진 이상을 도로 쌓아올린 그녀였건만.

그런 그녀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거짓말.... 거짓마알....!!!"

"이건... 이건 말도 안되잖아 이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더 이상 뛰지 않는 아루의 심장.

격분한 유우카는 주먹으로 그녀의 가슴을 내리쳐 보았지만 아루가 깨어날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흘러 내리는 눈물들을 닦아낼 새도 없이, 유우카는 다시금 심폐소생술에 힘썼다.


황륜대제를 거치며 이수한 안전 교육 덕에 절차는 이미 완벽히 외워놓은 상태.

그녀의 손이 꺾이고 짓눌리는 한이 있어도 유우카는 아루를 살려낼 심산이었다.


"하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 하나 열 둘 열 셋 열 넷 열 다섯 열 여섯 열 일곱 열 여ㄷ..."


"....그만."

"그만해.... 제발..."


"뭐? 아직 멀었어....! 내가 지치면 히나 너가 교대를..."


"그만하라고 제바아알...!!!!"

"아루는.... 아루는 이미 죽었어... 죽었다고..!!! 살려내지 못한다고!!!"


"....뭐? 아,아니야 그럴리가..."

"봐봐...! 여기 멀쩡히 살아있잖아? 아, 물론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ㅈ..."


짜아악.

뺨에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과 함께 유우카의 몸이 날아가 쓰러졌다.

얼얼한 볼을 움켜쥐며 당황하는 그녀를 향해 히나가 처절하게 외쳤다.


"제발.... 제발...!!! 그만하라고!!!!!"

"이미.... 너무 늦었단 말이야...."


"..."

"그,그런...."


유우카의 두 팔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인지부조화가 오고 만 유우카는 천천히 신음하기 시작했다.


"내.... 내가 봤어.... 아루.... 아루가 도움을 바라고 있잖아..."

"그런데 죽었다고...? 아,아니야... 내 귀엔 아직 그녀의 목소리가..."


"....제발, 그만해줘.... 부탁이야...."

"제발.... 제발 현실을 직시해...!!!! 제발...!!!!"


"아아..... 아니야..... 그럴리가...."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흐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의 처절한 탄식에 노아를 비롯한 깨어난 모두들이 차례차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들을 반겨준 것은 또 한 번 반복된 동료의 죽음이라는 잔혹한 현실이었다.


대답없는 아루의 육신.

매아리치던 유우카의 외침은 잔인한 현실에 부딪혀 서서히 멀어져갔다.


***



다 죽는다, 다!!!

아마 이번 화하고 다음화, 그 다음화?

역대 피폐 최고점 찍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