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29화


***


"어딜 도망가려고?"


"헉...!!"


앞을 가로막으며, 순식간에 날아든 네루의 발차기.

색채는 꼴사나운 모습으로 성대하게 날아가 쓰러졌다.


"사람이 말이야, 일을 벌여 놓았으면 책임을 져야할 것 아니냐~?"


"하아...!!! 하아...!!"


공포에 질린 눈빛과 함께 색채는 다시금 일어나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네루의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 놀음 수준의 무의미한 저항일 뿐.


"그러니까... 멋대로 피하지 말라고!!!! 오랏!!!!!"


"끄아아악...!!!!"


다시 한 번 가해지는 발차기와 함께 색채의 중력이 반전되었다.

곧이어 흙먼지와 함께 바닥을 구르는 그녀의 모습은 퍽 애처롭기도 했다.


일렁이는 아지랑이와 함께 서서히 다가오는 네루.

마치 맹수와도 같은 아우라에 색채의 눈빛도 점차 공포에 질려갔다.


"이 정도의 텀이라면 너도 어느 정도 회복 되었겠지."

"본래는 봐주는 것 없이 그대로 가려고 했지만 뭐, 그런 스타일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하아... 하아..."

"큭....!"


거친 숨소리의 반복.

말없이 눈치를 살피던 색채는 이내 다시금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 네루는 덤이었다.


"옳지, 그래. 그렇게 일어나는거야."

"자세를 잡고 임마... 전력으로 덤벼보라고!"


"...후우. 후우..."

"....크으읏!!!!"


기어코 얼마 남지 않은 신비를 짜내어 다시금 격돌하는 색채.

그러나 네루의 기백은 여전했고, 그녀는 퍽 여유로운 듯 했다.


파앗.

순식간에 색채의 앞에서 모습을 감춘 네루.

이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윽고 어마어마한 충격이 산발적으로 색채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끅.... 크아아앗!!!!"


"이것 봐~ 움직임이 다 읽힌다고?"

"조금 더 힘을 내보란 말이다!! 오랜만의 몸풀기인데 이러기냐!"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등장과 사라짐을 반복하는 네루.

그때마다 색채의 몸 곳곳에서도 불규칙적인 충격과 고통이 전해져왔다.


"큭..!!! 아악.... 크아아앗...!!!"


"이봐, 아직 멀었다고!!!"

"우리들의 동료를 그토록 무참하게 참살한 놈이 이 정도로 엄살은...!!!"


"그... 그만...."


"아앙~? 뭐라고? 그만해달라고?"

"...그깟 수지맞는 장사 따위, 들어줄 것 같냐오라앗!!!!!"


콰아앙.

어마어마한 충격과 함께, 색채가 꽂힌 자리로부터 희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정작 네루가 다가가자 그 어디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이!!!! 어딜 가는거냐!!!"


그 순간, 불현듯 연기를 가르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튀어나온 무언가.

그 무언가는 이내 어마무시한 빠르기로 근처 빌딩을 타고 올라가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빠르기로 보나 맥락으로 보나 아마 색채임이 확실한 상황.

이에 네루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추격에 나섰다.


"큿...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높은 빌딩으로 올라가면 내가 뭐, 못 따라올 줄 알았어?"

"내 사랑스러운 후배님 덕분에 말이야~ 빌딩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오랏!!!"


"크아아아아악!!!!"


다시금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꽂혀버린 색채.

처참한 모습의 그녀과는 달리, 아직도 네루는 퍽 여유로워 보였다.


"일어나. 아직 안 끝났으니까."


"허억... 허억... 허억..."


"이 정도로 엄살 피우지 말라니까. 살고 싶으면 맹렬하게 저항을 해야지, 피해서 되겠어?"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난 정말로 널 이 자리에서 죽일 생각이니까."


철컥.

그제서야 비로소 장전된 총을 겨누며 네루는 말했다.


"자. 이제 진짜 시작이라고."

"어디 살고 싶으면 도망쳐 보던가. 애송이."


궁지에 몰린 색채.

이제 세상은 더 이상 그녀의 편이 아닌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색채의 몸에서 다시 한 번 빛이 발했다.


"뭣...?"


엄청난 지진과 함께 갈라진 땅의 틈으로 모습을 드러낸건 다름 아닌 기괴한 형상의 촉수 줄기들이었다.

순간 예상치 못했던 변화에 잠시 주춤하는 네루였으나, 이도 잠시.


"뭐야... 잔재주도 부릴 줄 아네?"

"...그래봤자 내겐 한 주먹거리도 안되지만!!!!"


능숙한 움직임으로 닥쳐오는 공격을 자유자제로 피하는 네루의 모습.

이를 멀뚱히 바라보던 색채는 위기를 느꼈는지, 네루가 줄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네루 또한 그녀를 추격하고자 했으나 수많은 촉수들이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어어?? 너 어디가냐?!?"

"돌아ㅇ... 이익, 귀찮게 시리...!! 어이, 임마!!! 거기서!!!"


"허억!!! 허억...!"


위대한 탈출. 얼마나 달렸을까.

한참을 도망친 끝에 색채는 어느덧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줄곧 곁을 맴돌던 추격 소리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 따돌렸나...?"


'젠장... 신비가 모두 떨어졌어... 이대로 가다간 말짱 도루묵이 될지도 몰라...'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일반인들의 시신.

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색채는 이내 입맛을 다시며 스스로 되내었다.


'하, 하지만... 이대로 천천히 다시금 신비를 축적하면... 하아... 어떻게든 될지도...!'


천천히 숨을 고르며 여기저기 흩어진 신비를 모으는 색채.

비록 그 양은 극히 미약했으나, 그럼에도 지금의 색채에겐 감지덕지나 마찬가지였다.


'맛도 없고 더럽지만... 하아... 이렇게라도...'

'그건 그렇고 뭐냔말이야 그 메이드... 생긴건 완전 꼬맹이면서 무슨 완력이...'

'뭐... 그래도. 난 살아 남았어. 이대로 조금만... 조금만 더 쉬다가...'


줄곧 유지되던 긴장을 뒤늦게서야 놓은 채 안심하던 그 순간.

문득 자그마한 스포츠 가방이 그녀의 앞에 풀썩, 하며 떨어졌다.


"응...? 뭐지? 가방인가...?"


여전히 주변에는 아무런 기척도,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은은한 무광빛의 검은색 가방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무해함이 분명해 보였다.

이에 색채가 안심하여 주인 없는 가방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려던 그 순간.


"쾅쾅 터져버려~!!"


"뭐, 뭐엇?? 지금 어디ㅅ..."


퍼어엉!

가방이 어마어마한 불길과 함께 성대하게 폭발하였다.

순식간에 번진 불씨는 색채의 전신을 맹렬하게 태우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쿠후후~ 폭. 발. 해. 라❤️"


"큭.... 으아아아아악!!!!"


전신을 감싸오는 끔찍한 작열통에 몸부림치는 색채.

눈물도 콧물도 아낌없이 쏟아냈건만 타오르는 불길에 곧바로 말라버리기 일쑤였다.

그 순간, 일렁이는 불길 너머로 두 사람의 형체가 아른아른 보이기 시작했다.


"쿠후후~ 재미있어~"

"아루 짱? 색채 씨를 발견했다구? 언제 오는걸까나~"


"윽... 끄아악... 아아악!!!!"

"하아...! 하아... 젠장!!"


온 몸을 휘감은 불길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깨어나 다시금 도망을 시도하는 색채.

생을 향한 그녀의 집착은 안쓰러움을 넘어 이젠 처절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하나. 둘.

차츰 차츰 손을 뻗으며 나아가던 그녀를.


꾸우욱.


"큭.... 으아아악...!!!"


불현듯 누군가가 손가락을 짓이겨 멈춰 새웠다.

우드득,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색채는 또 한번 고통에 신음하였다.


"...도망갈 시도조차 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만일 그랬다간..."


탕!


하늘을 향해 발사된 그녀, 카요코의 총알.

헛발인가 싶어 색채 자신도 당황하던 그때.


"끅... 으아아악!!!"


이윽고 저릿한 충격이 색채의 전신을 통해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악.... 끄아악.... 아아아악..!!!!!"

"하아!!! 하아...!!! 하아.... 우으윽.... 하아...!!!!"


그녀의 심장이 떨리고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마치 숨은 턱턱 막혀오고, 전신은 식은 땀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는 듯한 기분.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무력화된 색채.

그런 그녀를 향해 카요코는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무서워? 너가 다루던 힘인데도?"

"이것이 바로 공포의 무게인거야. 너가 그토록 쉽게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고."


총구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무심한 듯 후하고 부는 그녀.

상황이 어찌 되었든 카요코는 이 모든것이 그저 귀찮은 듯 했다.


"너도 이제 그만 적당히 좀 하지? 언제까지 하려고 그래."


"하아... 하아..."


말없이 탄창을 교환하는 카요코.

유기적인 손놀림과 더불어 알싸한 긴장이 그녀의 오감을 자극하였다.

또 한번 공격이 하늘을 향하리라는 보장은 없었기에, 색채는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큿...!!!"


마지막, 정말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짜내어 카요코를 공격하는 색채.

아니, 그것은 공격이라기엔 엄밀히 말하면 방어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육벽 비스무리한 구조물에 카요코도 적잖히 당황한 듯 했다.


"읏, 젠장... 또 꾀를 부리다니..."

"아루 얘는 어디서 뭘 하길래 연락도 안되고... 참...!!"


"여기서 죽으려고... 그 고생을 버텨온게 아니란 말이다!!!"


눈 깜짝할 사이 모습을 감춘 색채.

다시금 시작된 추격전에 카요코는 진절머리가 난 듯 했다.


"하아... 하아...!!!"

"젠장, 어째서 저들이 이토록 강해진거지...?? 분명 처음엔 오합지졸이었는데..."


쉴새없이 발을 구르며 내달리는 색채.

이미 길목이란 길목은 모두 그녀들에 의해 막혀있었기 때문에 색채가 택한 방법은 Z축이었다.


"나는... 나는 이곳에서 죽을 수 없단 말이다..!!!!"


단박에 바닥을 박차며 한껏 날아오르는 색채.

유영하는 공기와 더불어 미약한 파장이 주변을 향해 찬찬히 퍼져나갔다.


'이... 이 정도까지 올라왔으면 더 이상 쫒지는 못하겠지...?'


허나 그것은 색채의 안일한 착각일 뿐.

미처 생각을 모두 정리하기도 전, 그녀의 눈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공포에 질린 색채의 눈에 비친 것은 다름 아닌 붉은 안광의 여우.

코사카 와카모였다.


"잡. 았. 다❤️"


"핫...!"

"자, 잠ㄲ...."


뻐어억!!

방금 전과 비교해서 배운 것이 없었던걸까?

작렬하는 충격에 색채는 기껏 올라온 높이가 무색하게 다시금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충격과 고통으로 정신을 못차리며 어지러워 하는 색채의 곁으로 한 무리의 발걸음이 저벅, 저벅 다가왔다.


"크으윽... 쿨럭!! 쿨럭..."

"하아... 대체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가까스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깨어난 색채.

그러나 그녀가 마주한 광경은 꽤나 충격저기면서도 절망의 극치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찾았네. 어디갔나 했더니."

"...이렇게 제 발로 걸어와 줄 줄은 몰랐어? 색채."


"후훗☆ 아깐 잘도 우리들을 굳혀버렸겠다?"

"삿짱! 여기야 여기! 어딜 둘러보는거야~!"


"너... 너희들은..."


예상 밖의 인물에 색채는 당황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하나는 악마가 연상되는 박쥐의 날개, 다른 하나는 아기자기한 깃털이 수놓인 날개.

분명 아까 전 자신의 힘으로 굳혀 놓았던 존재들인 히나와 미카였다.


'대... 대체 어떻게... 이건 말도 안돼...!!'

'분명 내가 신비로 저들의 행동을 구속해 놓았었는데... 이게 어찌된거지???'


"...푸훗, 쟤 지금 당황한 것 같은데? 맞지? 맞지?"

"난 착한 공주님이니까~ 지금부터 착실하게 설명해줄게☆"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다가와 색채의 뺨을 후리는 미카.

순간 충격에 멀리 나가 떨어지는 그녀였으나, 이윽고 은은한 빛과 함께 상처가 씻은 듯이 회복되었다.


"그래~ 이거야 이거!"

"아루 짱과 다른 친구들이 널 엄~ 청 괴롭힌 것 같더라구? 어때, 내 말이 맞지?"


"..."


"아까부터 널 쭈욱~ 관찰한 결과, 넌 회복을 할 때 신비를 주 원료로 쓰는 것 같던데."

"이젠 성소도 없고... 보아하니 그동안 축적한 신비를 통해서 상처를 회복해온거구나?"


색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했지만.

이에 미카는 실없는 웃음과 함께 그녀를 비웃으며 말했다.


"하나 짱, 네 말이 맞았네! 정말로 이 녀석으로부터 이전과도 같은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아!"

"그렇게 생각없이 신비를 쓰니 말이야~ 우리들이 풀려나도 모르는거라고?"


"풀려.... 나...?"


'서... 설마 부족한 신비 탓에 저들의 움직임을 더 이상 굳게한 채로 유지할 수 없었던건가...?'

'젠장!!! 역시 신비가 점차 고갈되고 있었던거잖아...!!'


식은땀을 흘리며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색채.

그런 그녀를 보며 히나가 꽤나 시니컬한 어투로 말했다.


"...이제 그만 끝을 내지. 미카."

"이 녀석의 얼굴을 보는 것도 이젠 질릴 따름이야."


"응, 동감☆"

"그럼... 어금니 꽉 물라구? 색채 짱?"


기겁한 색채는 재빨리 도망치고자 하였으나, 될리가 있나.

순식간에 발을 잡혀 끌어올려진 그녀는 공중에 떠오른 샌드백이 되어 신나게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빗발치는 탄환과 함께 여기저기 구멍이 뜷린 색채의 몸뚱아리는 꽤나 애잔해 보일 지경이었다.


"큭... 으아아아악!!!!"


"어머, 벌써 지치면 안되지!"


이윽고 어마무시한 공세가 이어졌다.

천천히 터져나가는 살갖과 근육이 주는 통증. 그리고 끊임없이 닥쳐오는 충격까지.

이에 색채는 방금 전도 그랬지만, 드높던 위엄이 무색하게 눈물 콧물을 쉴새없이 쏟아내며 고통스러워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아직 무리였다.


"끅... 캬아악!!!"

"제, 제발 그만... 너무 아파...!!"


"아프다고...? 그래, 이제서야 고통을 느끼는구나?"

"그럼 어디 이것도 한 번 느껴봐... 우리들이 지금껏 느껴온 고통... 내면의 고통까지 말이야!!!"


두 눈을 부릅 뜬 채 빗발치는 총알을 무자미하게 퍼붓는 히나.

색채는 끔찍한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는 반면, 그녀의 눈빛에 한없는 공포를 느꼈다.


"끅... 아, 안돼... 안돼애애..!!!!"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이 너무나도 자명한 상황.

색채는 온 몸을 비틀며 앴 저항해 보았지만 그럼에도 억눌려온 그녀들의 분노를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이윽고 사지가 잔인하게 찢어발겨진 색채의 몸뚱아리가 털썩, 하며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하아... 하아..."

"꿀꺽, 하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


색채가 이미 무력화 되었음에도, 여전히 불타는 그녀의 눈빛.

이에 모두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무렵이었다.


"히나...!"


"내 손으로 이 녀석의 머리통을 직접 박살내기 전까지는...!!!!"

"하아... 나는 결단코 안심할 수가 없어... 그러니 말리지마 사오리!!!"


"..."


자신을 붙잡은 사오리의 손을 기어코 뿌리치며, 색채를 향한 발걸음을 옮기는 히나.

그녀의 애환섞인 분노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실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허억... 윽... 자, 잠ㄲ..."

"....크아아아아악!!!!"


절단면이 짓눌린 색채는 어린아이 같은 비명을 질러대며 고통스러워 하였다.

그러나 히나는 이에 굴하지 않은 채 그녀를 더더욱 압박하기 시작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봐."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내 말 알아 들어?"


"사.... ㅅ... 살ㄹ..."


"약한 척 하지마."

"타인의 심장을 후벼팠다면, 너 또한 후벼파일 각오를 해야지. 내 말이 틀렸어?"


히나는 어디서 공수한 것인지 모를 단검을 꺼내어 색채의 가슴에 천천히 박아넣었다.

동시에 색채의 가냘픈 흉곽이 바르르 떨리며 흰 우윳빛 신비를 벌컥벌컥 토해내기 시작했다.


"읏.... 으극..."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미약한 신음을 내뱉는 색채.

그리고 이 광경을 히나는 눈 하나 깜짝않고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가 아직 안 죽은거 알아."

"그러니 일어나... 일어나라고!!!!!"


푸욱.

푸욱.


속절없이 흔들리는 색채의 몸뚱아리.

동시에 히나의 검은 장갑도 점차 백색으로 물들어만 갔다.


"난 아직 끝나지 않았어... 더 고통스러워 하란 말이야!!!!!"


서슬퍼런 칼날이 몸속을 드나들길 몇 차례.

색채의 눈동자는 이미 흐려져 더 이상의 광택조차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히나의 손길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다.


설령 그녀의 신체가 공포에 잠식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

"히, 히나 잠깐... 멈춰!"


"죽어... 죽어..!!!!!"

"고통 속에 죽어버려... 삶의 부질 없음을 느끼며 떨라고!!!!!"


"히나!!!"


터억.


히나의 손을 붙잡으며 내치는 사오리.

이에 히나는 잔뜩 핏발선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야... 왜..!!!!! 왜 막는건데!!!!"

"이 녀석은 아직 제 죗값을 치르지도...!!!"


"네 헤일로를 봐!!!!"

"검은 색을 넘어... 은은하게 빛나던 잔흔마저도 침식되고 있지 않나...!!"


"뭐...? 침... 식...?"


그때,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고만 히나.

그런 그녀를 맞이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얕은 물 웅덩이였다.


웅덩이속 자신과 천천히 눈을 마주하는 히나.

그러나 수면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색채와 똑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거냔 말이다 소라사키 히나!!!"

"지금 네 녀석의 상황... 영락없는 공포의 침식이지 않나...!!"


"뭐.... 뭐야 이거..."

"내 모습... 왜 이래...??"


장갑을 벗었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손바닥의 검은 흔.

이와 더불어 수면속 그녀의 얼굴은 이미 검은색 혈관 비스무리한 것에 잔뜩 뒤덮혀 있는 상태였다.

두 손을 벌벌 떠는 히나를, 사오리는 재빨리 걷어내어 색채로부터 떨어트려 놓았다.


"선생의 사무실에서 읽었던 자료를 잊어 버린거냐!!!!!"

"색채의 근원은... 다름 아닌 공포라는 것을...!!!"


"ㅁ... 뭐어??"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히나가 만들어낸 공포의 기운.

그것은 신비를 잃어버린 색채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어 그녀들의 시간과 노력을 무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아... 안돼...!!!"


다급해진 미카의 대응사격.

그럼에도 이미 한 번 불 붙은 회복의 불씨를 꺼트리기엔 무리였다.


"젠장... 탄약이 다 떨어졌어!!"

"이게 마지막이었는데... 젠장...!!!"


협공으로 애써 떨어트려 놓았던 그녀의 팔다리도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엎질러진 물은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법 이었다.


"아... 아아..."


검게 물들어버린 자신의 몰골을 보며, 히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죄책감과 고통에 몸부림쳤다.


"나... 나 때문에... 내가... 내가 모든 것을 또..."

"아아 선생.... 선생님.... 이걸... 이걸 어찌하면...."


누더기와 같은 몸을 천천히 일으키는 색채.

자신이 불러 일으킨 재앙에, 히나는 차마 이성을 유지할 틈도 없이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히나!!! 정신차려 히나!!!"


"아아... 아아아아....!!!"

"색채를... 색채가 다시 살아나다니... 내가... 나 끝났었는데 내가...!!!"


"어떡하지 삿짱??? 얘 완전히 망가졌는데??"


다급하게 사오리를 향해 물어보는 미카.

그러나 사오리라고 해서 별반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 말도 않는 그녀였지만, 눈빛만은 속절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히나 못지않게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뭐, 뭔..."


그녀들이 망설이는 사이.

방출된 공포를 섭취한 색채는 이전보다도 더욱 거대한 형상으로 부활을 노리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 만으로 정신력이 깎이는, 그야말로 공포의 상징이나 다름 없게된 색채.


"아... 아아..."

"어찌 이런... 신이시여...!"


끝끝내 미카마저 무너져 내리고 만 초유의 상황.

그러나 그 순간.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색채의 측면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으음?"


마치 섬광탄과도 같은 무언가.

그것의 정체를 알게되기까진 그닥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퍼어어어엉!!!

성대한 폭발과 함께 휘청이는 색채.

이에 모두가 벙쩌있을 무렵, 어디선가 요란한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https://www.youtube.com/watch?v=pEg_d2f6myw




"하아...!! 다행이다! 명중했어!!"

"이봐 준코!!! 더 밟으리고 더...!!!!!"


"후훗, 더 밟으라고 하는군요?"


"진짜아~!! 왜 맨날 나보고만 그러는데!"

"하루나 선배도 그렇고, 직접 운전하면 되잖아아~!!"


요란한 굉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차량 한 대.

바로 급양부의 트럭.


그 곳에는 한 무리의 테러범(이자 미식연구회)과 하루카.

그리고 리쿠하치마 아루가 위태롭게 매달린 채 돌진하고 있었다.


"리쿠하치마... 아루...?"


당황한 사오리의 눈빛.

창문을 붙잡고 곡예 아닌 곡예를 부리는 아루의 모습이 꽤나 충격인듯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기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봐!!! 지원을 해준다면서 멍하니 뭐하는거야!!!"


[이미 발사는 마쳤어. 다만 도달하지 않은 것 뿐.]

[재ㅈ... 아니, 겹쳐진 원들의 궤적이 보인다면 내가 왔다는 신호야.]


동시에 색채의 머리 위로 5개의 원 궤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채 알아내기도 전, 그녀를 향하여 수많은 박격포 미사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퍼버벙!

하나하나 모두 명중하여 폭발을 일으키는 미사일들.

엄청난 진동과 더불어 색채의 몸뚱아리가 사정없이 뒤흔들렸다.


"아하하!!! 또 명중이야~!!!"

"다음은 할머니..... 어이 할머니!!! 지금이야!!!"


[후훗. 이 저를 할머니라고 부르시다니... 꽤나 모욕적인 언사네요?]

[...조용히 하세요 에이미! 옷을 따스하게 입어야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되는 법이라구요!]


"하... 오케이! 히마리!! 밀레니엄의 초천재 병약 미소녀 해커 히마리 부장님!!!"

"지금 상황이 긴박하거든요? 지금 그쪽 지원이 하루 빨리 필요한 상황이니까...!!!"


[후훗... 역시 그쯤은 되어야죠.]

[이걸 이렇게... 에잇!]


동시에 아루의 몸이 미약하게 푸른 빛을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그랬으나, 더욱 열혈 넘치게 변한 아루는 함성과 함께 달리는 차에서 점프를 시전하였다.


"우오오옷!!!! 왠지 힘이 난다아아앗~!!!!"


놀랍게도, 색채를 향해 직접 날아가며 총구를 겨누는 아루.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코는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조용히 일어나 태블릿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잉? 뭔가 굉장히 몸이 절제되고 신중해지는 느낌?'


[...그동안의 전투 측정 데이터를 보냈으니까, 빗나가게끔만 쏘지 마세요!!!]


"아코...?? 아코구나!! 아코 맞지??? 날 믿어주는거야?"


[따, 딱히 그런건 아니지만 말이죠!!]


"우후훗... 좋아. 맡겨두라고!!!!"


아로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공중에서 천천히 자세를 잡아 색채를 겨누었다.

이에 뒤늦게 그녀를 감지하곤 반격테세를 준비하는 색채였으나 때는 이미 늦은 상황.


"한 손으로도... 명중 시켜주지...!!"


타앙!!!

또 한번의 사격이 색채의 몸뚱아리에 박히고.

동시에 그녀의 한창 발달하던 몸이 타들어가는 연기와 더불어 조각조각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아... 안돼....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했는데..."


차츰 타들어가던 불씨도 잦아든 그 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작렬하여 일대를 가득 매웠다.

애써 수복하였던 신체는 갈기갈기 찢겨 불길 속에서 불타 없어졌으며, 공포와 신비도 모두 끝이었다.


"안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안돼...!!!"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싫어... 싫어...!!!!"

".......안돼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


그것이 곧 색채의 종말이었다.


***


조금은 허무하다고도 느낄, 색채의 최후.

상식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몇 번이고 부활하며 그녀들을 괴롭혀온 색채가 이토록 쉽게 사라진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이에 히나를 포함한 그 자리의 모두도 쉽사리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히나, 괜찮아?"


"..."

"으, 응. 일단은."


부질없이 떨리는 그녀의 섬섬옥수와 가냘픈 어깨.

하마터면 모두를 다시금 절망의 구렁텅으로 몰아넣을 뻔 했다는 죄책감은 여전했기에.

히나는 쉽사리 그녀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히나."


"...역시, 마냥 안심할 수는 없어."

"아루가 활약을 해주긴 했다만... 역시 아무리 그래도 방금의 공격으로 색채가 죽었으리라곤 쉽사리 단정 지을 수 없어."

"우선, 저기 떨어진 가장 큰 몸뚱아리부터 경계하고 있자. 부상자들은 치료하고... 우선은 내가 먼저 맡고 있을게."


"아니, 그럴 필요는 전혀 없어."


머리 뒷편으로부터 들려오는 아루의 목소리.

이에 히나는 천천히 그녀를 향하여 돌아보며 말했다.


"...어떻게 확신을 지을 수 있지?"

"생각해봐. 우리가 색채를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


"글쎄, 난 적어도 그렇게 느끼는데."

"저 정도의 참격이었다면, 응. 아마 분명히 죽었을거야."


"아니... 며칠 전의 악몽을 잊은거야??"

"그때도 우린 분명히 진실의 성소를 부수었고, 미약하게나마 자축을 벌였었어."

"하지만 그 결과는... 너도 알잖아.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는 것을..."


히나의 연분홍빛 동공이 일렁이며 속절없이 떨리는 가운데, 아루는 퍽 여유로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황파악을 못 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지난날의 교휸으로부터 얻은 것이 없는 것인지.

그런 아루의 태도에 문득 울분을 느낀 히나는 아루의 멱살을 쥐어 잡으며 말했다.


"...리쿠하치마 아루. 지금 상황을 잊은거야?"

"난 말이야... 순간의 안일한 판단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트릴 뻔 했어. 그런데 너마저도 그런..."


"이봐, 선도부장. 왜 그렇게 딱딱해?"

"이제 다 끝났다니까. 나는 알 수 있어..."


"그러니까 대체 어떤 근거로 그런...!"


아루는 대답 대신, 검지 손가락을 펴보였다.


"...검지?"

"지금 뭐하자는거야? 농담할 분위기로 보ㅇ..."


"위."


"...뭐?"


"위를 바라보라고 바보야."


왠지 모르게 아련하면서도 인자한 아루의 미소.

이에 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https://www.youtube.com/watch?v=D3boxTP-ZG8




"...내가 말했잖아. 다 끝났다니까."


그곳에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색채가 침공을 개시한 이후 줄곧 붉게 물들었던 키보토스의 하늘이, 다시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이... 이건... 뭐야?"

"내가 지금 환상을... 헛것을 보고 있는거야?"


뒤바뀐 현실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는지, 재차 눈을 비벼대는 히나.

그럼에도 되돌아온 키보토스의 푸른 상공은 여전히 고유의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정말로 색채의 권세가 사라진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대체 어떻게..."

"아루, 무슨 방법을 쓴거지? 어떻게 단박에 색채를..."


조금은 신기한 듯, 아루를 향해 묻는 사오리.


"간단하지! 너희들이 노력해준 덕분에, 색채의 장갑 속성은 경장갑이 되었잖아!"

"거기에 더해 히마리와 아코의 보조까지... 그냥 운이 엄청 좋았던거야. 나도 될 줄은 몰랐거든. 헤헤..."


"아니... 그 보다도 의문점이 한 둘이 아니다만."

"장갑 속성의 변화니, 우리들의 위치니... 모두 변칙적이었을텐데 어떻게 알아낸거지?"


이에 아루는 조금은 착잡함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그이의 도움을 조금 받았어."


"그이...?"


아리송한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오리.

하지만 아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히나, 거기서 혼자 뭐하고 있어?"

"다 끝났다니까... 괜찮으니 함꼐 와서 어울리자."


"하, 하지만... 혹시 누가 알아..."

"하늘만 달라진 것인지... 그냥 순전히 우연일 수도 있는거잖아...!"


히나의 눈동자는 아직 불신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아루는 근처에 있던 사오리의 머리를 불현듯 휘어잡기 시작했다.


"악... 아악!"

"뭐, 뭐하는건가 리쿠하치마 아루!!"


"어이, 히나. 잘 보라고."

"사오리의 머리 위가 어떻게 보이지?"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앗... 아프니까 어서 놓아라 아루!!"


"사오리의... 머리... 위..."

"...!!!!!"


털썩.

두 손을 입가에 모으며 주저앉는 히나.

곧이어 눈가 너머로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

"...으흐흑...!!!! 훌쩍, 흐으윽...!!!"


"뭐, 뭔... 왜 그러는가 히나?"

"어이, 아루! 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당황하는 사오리의 앞에 불쑥, 하고 들이 밀어지는 무언가.


"너도 거울 좀 보고 살아, 사오리."

"네 헤일로. 본래 푸른색이었구나?"


"뭐...? 네가 그걸 어떻ㄱ..."


그 순간, 아루가 건낸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사뭇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머리 뒷편에서 은은한 빛을 내며 빛나는, 푸른 빛의 헤일로. 검은 침식흔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들의 낙인이었던 검은 헤일로 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이... 이건..."


"것 봐, 히나. 내 말이 맞지?"

"너도 한 번 볼래? 자, 거울 줄게!"


"훌쩍, 아... 아니... 괜찮... 흑, 괜찮아..."

"정말로... 괜찮으니까.... 훌쩍, 흐윽... 흑...!!"


처절하게 오열하는 히나.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피어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끝났구나..."

"정말로 모든 것이... 색채가... 흐윽...!!"


"저, 정말로...??? 어라? 나도 돌아왔네???"

"뭐야... 뭐냐구~!!!! 이제 다 끝난거야...? 정말로 색채가 죽은거야???"


느껴지는 감복에 적잖히 흥분했던 탓일까.

미카의 자그마한 날개가 더욱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개 움직이는 것 좀 봐. 닭같네 닭."


"뭐어? 닭??? 방금 누가...!!"

"...에? 유우카?"


성을 내며 돌아본 미카의 앞에 나타난 것은 유우카를 비롯한 밀레니엄의 학생들.

문득 뻘쭘해진 미카는 달리 도리가 없었는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뒷통수를 긁적거릴 뿐 이었다.


"중간에 길이 막혀서 늦는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결국... 어떻게든 색채를 처리했나봐?"


"응. 그런 것 같네. 아루가 활약해준 덕분에..."


"좋네... 아리스도 돌아왔고, 다들 멀쩡해 보이는 것 같고."

"남은 것은 이제 재건뿐인가... 예산이 장난 아니게 들겠는걸."


"그렇긴 한데... 후후."

"그래도 기쁘지 않아? 어째 표정이 계속 썩어있는 느낌이다?"


미카의 지적에 애써 입고리를 올려보이는 유우카였으나 깊은 감정의 골을 감추기엔 무리였다.

애수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미카도 이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다 끝났지."

"하지만 마냥 기뻐하기엔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뒤인걸."


"그, 그래도 자축 정도는 조촐하게 할 수 있잖아."


"자축이라... 저번에 자축 한 번 했다가 어떻게 되었는데."

"그건 뭐, 시기장조였다 치더라도 이 기쁜 상황에 정작 주역이 없으니까...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 보여."


"주역...? 그게 누구..."

"아..."


유우카의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린 미카는 절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그렇네... 선생님이... 안 계시니까..."


"색채는 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돌아오시는건 아니잖아."

"그래서... 이제 어떡해야 하나 싶어. 솔직히 말해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해야하나."


"..."


"홀로 쓸쓸히 돌아가신 선생님을... 누가 어떻게 위로하며, 우리들은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지..."

"어쩌면 우리들에겐... 더 이상 돌아갈 곳 따윈 남아있지 않을지도 몰라."


어느덧 눈가에 맺힌 눈물 방울들.

조용히 훌쩍이며 감정을 달래는 유우카에게 누군가가 손수건을 내밀어 주었다.


"으, 으응? 고... 고마워."


"유우카. 울지 마십시오!"

"색채는 사라졌고 유우카와 친구들은 모두 남아있지 않습니까!"


"아리스 짱의 말이 맞아요, 후훗."

"돌아갈 곳이 없긴요... 모두가 유우카 짱을 기다리고 있다구요?"


저벅저벅 걸어와 유우카를 토닥여주는 노아.

그리고 말없이 미소 지어 보이는 세미나 맴버들까지.

화기애한 광경과 더불어 굳어있는 분위기도 차츰 풀어지는 듯 했다.





"너희들..."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유우카는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

.

.









https://www.youtube.com/watch?v=Tntuxch3aUQ


"...그건 너희들이 검은 헤일로가 아니니까 그렇지."


"에?"


"속편히 말하긴... 너희들은 아마 모를거야."

"지금 내가 살아있음에 느끼는 한없는 무게감을... 그리고 죄책감을..."


지그시 감은 두 눈 너머로 느껴지는 떨림.

이에 노아는 물론 옆에 있던 아리스마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 하지만 유우카 짱..."


"난 말이야... 선생님을 해쳤어."

"너희들이 애먼곳에서 광폭화를 이루었을 때도... 나는 그걸 선생님께 풀었다고."

"그래서 선생님은 죽었고... 이젠 없고... 그럼에도 나는 살아있지."


굳게 쥔 그녀의 주먹이 속절없이 부들거렸다.

그것은 분노, 혹은 슬픔.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 복합적인 감정의 산물처럼 보여졌다.

이윽고 유우카는 한껏 충혈된 눈으로 노아를 향해 쏘아 붙이듯 말했다.


"그런 내게 뭐...? 돌아갈 곳이 있다고?"

"아니, 전혀. 설령 있다고 해도 나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야."


"유우카 짱... 어떻게 그런 말을..."

"그,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 지겠죠... 분명 괜찮아 질거에요!"


"노아... 넌 완전기억능력을 가지고 있지?"

"그런 너에게 있어 우리들... 검은 헤일로는 어떤 존재였어?"


"그, 그야 저도 검은 헤일로였으니..."

"..."


노아는 말이 없었다.

이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는 유우카.


"...알겠어? 그런거야."

"우리들은 그저... 그런 존재인거라고."

"모두에게서 잊혀져야만 할, 잊혀지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끔찍한 재해."

"그게 바로 우리... 검은 헤일로의 운명이나 마찬가지인거야."


"....."


"넌 그걸 버틸 수 있겠어?? 하물며 네 기억은 완전한데??"

"난... 난 솔직히 지금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우리들이 축하받을 자격이 있는지...우리들이 멀쩡히 일상으로 돌아갈 자격이 있는지 말이야..."

"선생님을... 우리들의 유일한 어른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발 편히 뻗고 잘 수 있겠어...?"


유우카도, 노아도.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은 시점, 남은 것은 오직 격정적인 숨소리 뿐 이었다.


"...뭐, 너라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밀레니엄에서 보자, 노아."


"유... 유우카 짱...!!!"


다소 매정하다 느껴질 정도로, 노아를 스쳐지나가는 유우카.

그러다 문득, 유우카는 자신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에 그녀는 말없이 미소만을 지은 채 좁은 길목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


"..."


남은 것은 오직 정적.

소름끼치는 죄악과 책임만이 남은 정적이었다.


조금은 허망하기도 한, 연합의 끝.

그것이 곧 종막이었다.


"노아 씨... 유우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리스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유우카가 이토록 고통스러워 하는지..."

"죽음이란... 단순한 게임 오버가 아닌 셈입니까?"


"...그건 나중에 돌아가서 설명 해줄게요."

"자, 모두들. 이만 돌아갑시다. 리오 선배님도 이쪽으로..."


"...음. 알겠어."

"..."

"하야세 유우카... 어쨰서..."


천천히 모두를 이끌고 AMAS에 올라타는 밀레니엄측 일행.

떠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그 자리의 모두가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들도 이만 해산하도록 하죠."

"자, 츠루기 부장. 남은 대원들을 이끌고 돌아가도록 합니다."

"미카 님도 이쪽으로... 가야할 곳으로 돌아 가도록 하죠..."


이윽고 제각기 다른 태도로 어색한 이별을 준비하는 그녀들.

혹자는 웃으며, 혹자는 침묵을 지키며. 다른 혹자는 눈물을 닦아내며.


그렇게 그녀들은 방금 전까지의 협력이 무색하게끔 갈기갈기 찢어저 사라지기 시작했다.


"..."


해체의 흐름 속에서, 사오리는 섣불리 나서질 못했다.

무너져버린 유우카의 인격과 자아를 직접 목격한 입장으로써 그녀보다 더욱 죄질이 나쁜 자신은 어찌 행동해야만 할지.

황폐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할 방도와 이유를, 도무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오리, 거기서 뭐해?"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아즈사였다.


"아, 아즈사... 너였군."


"사오리는 그래서, 어디로 갈거야?"


"나... 말인가?"


"응. 사오리는 이전부터 매번 홀로 떨어져 지내곤 했잖아."

"그래서 말인데, 괜찮다면 이제 우리들과 함께 하는건 어때?"


"너희들... 이라고?"

"트리니티를... 말하는건가."


문득 손을 내미는 아즈사.

그러나 사오리는 그런 그녀의 손을 섣불리 잡지 못했다.


"어째서...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거지."

"나는... 나는 너무나도 큰 죄를 저질렀기에... 너희들과 어울릴 수 없다."


"사오리,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죄인이야."

"각자 제각기의 죄악과 업보를... 그리고 선생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품고 있어."

"...이럴 때 일수록 더더욱 뭉쳐야 하는거야.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말이지."


언뜻 보이는 챙 너머로 갈등하는 사오리의 눈빛.

그리고 이를, 아즈사는 말없이 계속 기다려주었다.


"...제안은 고맙다만 아즈사. 내겐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다."


"음... 분명히 괜찮다고 말했는데."

"괜찮아. 난 사오리의 선택을 존중하니까... 다만 어째서, 냐고 물어봐도 될까?"


"물론 너의 사상이나 언행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더더욱 가까운 셈이지."

"다만... 네가 말했듯이. 내겐 아직 보듬어야할 상처가 남아있기 떄문에..."


"...알겠어."

"히요리와 아츠코, 미사키를 말하는거지?"


잠시 동안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는 아즈사와 사오리.


"그럼, 잘 지내야 해. 나중에 시간나면 놀러오고."

"아, 그리고 말인데. 그 모자. 좀 벗고 다니고 그래! 너무 어두워 보이잖아!"


"...아아. 그러도록 하지."

"아즈사, 너도... 잘..."


어색하게 손을 들어 흔들어보는 사오리.

그러나 아즈사는 이미 저 만치 멀리 떨어져버린 뒤였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아즈사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


모두가 사라진 황량한 땅. 남은 인물들은 오직 사오리와 아루 일행들 뿐.

그제서야 사오리는 비로소 그동안 줄곧 벗지 않았던 모자를, 처음으로 벗을 수 있었다.


"...후우."

"정말이지, 이토록 상쾌한 것을..."

"... ...."


서서히 몰려오는 먹구름과 함께 쏟아지는 소나기.

그 따스하면서도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사오리는 한참 동안을 비 아래에 서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다만 이제 자신은 그 어디에도 섞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기에.

키보토스의 유일무이한 죄인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그리고 그 죄는 결단코 용서 받을 수 없기에.

그 순간 만큼은 떨어지는 빗방울들 만이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안식처이자, 전부였다.


'이 따스함과 포근함... 선생, 당신인가...'

'선생... 난 이제... 당신을 망가트려버린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것이 빗물인지, 혹은 눈물인지.

진실은 오로지 그녀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


늦게온 만큼 삽화도 그렇고 꽉꽉 눌러 담았음

다음화면 완결이고, 에필로그 하나만 더 연재하면 그걸로 끝!!!! 키보토스도 이젠 안녕이야!!!!!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