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입니다, 토마스 씨.


예. 그렇습니다. 아침이죠. 오전 7시 정도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방에 갇혀있는 상황이라 시간감각이 무뎌진 모양이군요.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습니까? 아뇨, 구속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라는 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제 말은 뭔가 근질거리거나 하지는 않는지 묻는 거였습니다. 아뇨, 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야 구속구 아래쪽은 간지러울 수도 있습니다만 그 부분은 참아주십시오.


그러니까 '근질거림'이라는 건 정신적인, 혹은 영적인 측면에서의 느낌을 말하는 겁니다. 그건 없다고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따금 스파이 녀석들이 붙잡혔을 때 정보 유출을 막겠답시고 머리에 뭔가 변칙적인 걸 심어서 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넌지시 배후를 캐묻는 것만으로 머리가 펑 하고 날아가는 모습은… 예,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지요.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식사 전에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입니다.


아뇨. 딱히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이 정보를 흘리는 순간 목숨을 잃도록 시술을 받지 않았다 해도, 당신을 통해서 재단에 숨어든 나머지 연합 스파이들을 캐묻겠다는 건 아닙니다.


의아한 표정이군요, 토마스 씨. 예, 그렇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뒷조사는 대부분 끝났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연합 측에서 보내온 스파이라는 걸 알고 있고, 당신이 연합 내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재단에서 어느 정도의 자료를 빼돌렸는지, 심지어는 당신 가족 구성원까지 말입니다. 가족 구성원이라 해야 지금 살아계신 건 병원에 입원 중인 어머니가 전부이긴 합니다만.


아뇨! 재차 말하지만 당신에게서 연합의 정보를 캐내려는 게 아닙니다. 가족을 인질로 협박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물론 당신이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당신 개인에 대한 정보를 거의 모두 확보했으니, 이제 토마스 씨에게 할 제안이라고는 당신 동료들에 대한 정보를 내놓으라는 것밖에 없으리라고 말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제안도 선택지 중에 하나이긴 합니다. 가진 정보를 모두 재단에 내놓고 이적하는 것 말입니다. 일단 예의상, 그리고 절차상 한 번 해보도록 하죠.


예.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바로 다음 제안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두 번째 제안은 현상유지입니다. 당신은 한동안 이대로 갇혀있을 거고, 첩자 처리에 대한 매뉴얼에 따라 처우가 결정될 겁니다. 온갖 심문이 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선 실험체로 쓰일 수도 있고, 그냥 머리에 바람구멍이 뚫려 처형당할 수도 있겠지요. 운이 좋다면 연합과 일종의 포로 교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으시다면 말이죠.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 토마스 씨.


아뇨, 정보를 내놓거나 죽거나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정보를 내놓고 죽을 수도 있잖습니까.


…미안합니다. 이건 썩 좋지 않은 농담이었던 것 같네요.


아무튼 제가 하고픈 말은 세 번째 제안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쪽은 제안이라기보다 강요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강요가 시작되기 이전에 토마스 씨께서 이 일을 맡아주신다면 아직 충분히 제안의 영역일 거라 생각합니다.


토마스 씨, 이 서류를 봐주시겠습니까?


예. 잘못 보신 게 아닙니다. 좋은 타이밍은 아닙니다만 지금 말해두죠. 승진 축하드립니다.


놀라셨습니까? 적어도 표정을 보면 그런 것 같군요.


놀라시는 게 당연합니다. 세계 오컬트 연합의 스파이, 그것도 정체가 들통나 이렇게 의자에 묶여있는 사람에게 승진이라니? 또 제가 예상하기로는 하나 더 의문을 품을 것 같습니다. 이걸로 당신은 더 많은 자료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고, 연합으로 빼돌려지는 재단의 정보는 더욱 늘어나게 될 테죠.


거기에 대해 답하는 건 간단합니다. 그게 바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군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토마스 씨, 그러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뇌의 어떤 부분에 결함이 있는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색을 반대로 인식했습니다. 색맹과는 조금 다릅니다. 빨강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가 빨간색 물건을 보면 우리가 초록색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그 아이는 색을 문제없이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빨간색을 '초록색'이라고, 초록색을 '빨간색'이라고 다른 이름을 붙여서 살아왔을 뿐이지요. 그러니 초록색이 무엇인지 물으면 '풀과 같은 색'이라는 답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아이에게는 풀도 붉게 보일 테니까요.


결국 그 아이가 죽는 순간까지도 뇌의 결함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딱 한 명, 타인의 시야를 엿볼 수 있는 변칙개체를 제외하고서 말입니다.


만약 그 개체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심지어는 그 아이 본인조차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지 못하고 있었지요.


현실 조정자를 마주했을 때, 혹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의식을 휘젓는 존재를 상대할 때. 이런 순간이 바로 그러합니다. 무언가 변화가 발생했음에도 변칙성에 당한 본인이 인식할 수조차 없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것이 상식적인 일이라고 받아들이며, 아무런 의심조차 품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는 세계 오컬트 연합의 행적을 보며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의 여부를 떠나 정말로 변칙개체를 성공적으로 파괴한 게 맞을까? 어쩌면 파괴했다는 건 착각이고 이후로도 여전히 변칙성이 남아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지금 변칙개체를 격리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어쩌면 우리가 격리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정해봅시다. 우리가 그들을 격리했다 여기도록 만드는 SCP 개체가 있다면 어떨까요? 재단 내부를 유유히 돌아다니며 요원들을 살해하고, 심지어는 마음대로 기지 바깥에서 외출까지 즐기는 녀석이 있는데, 우리는 그 망할 자식이 철저하고 완벽하게 격리된 상태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면?


인간의 인식과 의식을 망가뜨리는 녀석들은 그 변칙성에 영향을 받은 자 스스로가 해결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빨간색과 초록색이 뒤바뀐다 한들 인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변칙성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눈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멀리 떨어진 다른 기지의 연구원들 정도로 해결되지요.


물론 최악의 경우도 있습니다. 변칙성의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모든 인류, 혹은 모든 지적 생명체, 심지어는 모든 생물에게 영향을 끼치는 경우, 그럴싸한 표현을 쓰자면 CK급 현실 재구축 시나리오 말입니다. 설령 우리의 세계가 원래의 것과 다르게 변화한다고 한들 알아차릴 방법은 없지요. 어쩌면 이미 한두 번쯤 세상이 변했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빨강과 초록. 이제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그러나 당연하게도 변칙성이라는 게 반드시 극과 극으로 나누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스펙트럼에 가깝지요. 단순히 확률분포로만 따져도 이 세상에는 한 사람 혹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끼치는 변칙보다 그 중간의 변칙이 더욱 많을 겁니다.


이제 당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를 알아차리신 모양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변칙성의 영향을 받는 '내부'가 우리 SCP 재단 전체인 경우.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상황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외부의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지금과 똑같이 행동해주시면 됩니다. 계속 연구원인 척 행동하며 재단의 세부 사항을 조사하고 SCP 개체와 관련된 자료를 연합에 전달해주십시오.


토마스 씨, 당신은 본질적으로 재단의 사람이 아니므로, 어쩌면 재단 인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변칙성에서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상대의 변칙성이 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형식적으로만 재단에 소속된 당신까지 휘말리는 경우도, 그 자료를 변칙성의 '바깥'인 연합에 전달함으로써 문제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이 당신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이며, 우리가 협력자로 세계 오컬트 연합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이 계획으로는 필히 격리 중인 개체에 대한 정보를 협력자에게 넘겨줘야 하는데, 적어도 연합은 저희가 변칙개체를 문제없이 격리하고 있는 기지까지 때려부수지는 않거든요.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당신에게, 그리고 세계 오컬트 연합에 부탁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당신네들은 타입 그린이라는 표현을 쓴다지요? 빨강인 척 하는 초록이 있다면 그 망할 자식을 주저없이 박살내버리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의 강령대로.


구속은 10분 내로 풀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평소의 생활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동료 연구원들에게는 심한 감기에 걸렸다고 전달해두었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수고해 주십시오, 토마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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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눈팅만 하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써보는 글.

선택한 짤은 4번의 초짜들은 안 된다니까.


"이건 '비격리 상태', 그리고 이건 '격리 상태'야."

"아무리 봐도 그것도 '비격리 상태'인 것 같은데요."

"아니, 이건 격리되어 있는 거 맞다니까?"

라는 느낌으로 써봤음.


1422에서 재단 인원 모두가 국립공원을 몰랐던 일이 발생했는데, 만약 공원에 숨겨져 있던 게 2000이 아니라 다른 적대적 개체였다면 아주 위험하지 않았을까.

재단도 최소한 1422의 존재를 파악한 이후로는 그런 가능성을 염려했을 것 같음.


그 외에도 343은 제3자 입장에서 문서로 보면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는데, 이것도 재단 바깥 사람의 관점에서는 재단이 변칙성에 휘말린 상태라는 걸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음.

어쩐지 재단이라면 자기들이 현실 조정자에게 지배당하는 시나리오도 최소한의 대비는 해뒀을 것 같고.


그래서 그나마 최대한 문제가 적게 일어날 외부인들에게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위험한 쪽의 1422'를 방지하려는 느낌.


연합 스파이 이름은 처음에는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는 점에서 피터(베드로)로 하려고 했다가, 자신들의 격리조차 의심하기 위한 협력자라서 토마스(도마)로 바꿨음.


서식은 내키는대로 쓰다보니 이렇게 됐는데, 윤리위원회 오리엔테이션이 개인적으로 취향이라 그런듯.

제목은 "초짜를 위한, 초짜에 의한"하고 "적녹색맹" 중에서 고민했는데, 쓰고 나니 협력자가 초짜라기보다는 외부인에 가까워서 후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