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난 문자 관련 전문가는 아니라는걸 밝혀두고 시작함

그냥 필기체 좀 써본 입장에서 말하는 거니까 흥미 위주로 봐주고 혹시 잘못된 점 있으면 지적해주면 고맙겠음


필기체라고 하면 보통 사진처럼 줄줄이 이어쓴 로마자를 생각할 것임


근데 사실 필기체라는 게 전부 다 이어쓰는 필체만을 뜻하진 않는다

히브리어 필기체나 라틴 필기체를 보면 그냥 쓰기 편하게 좀 다듬었을 뿐 이어쓰진 않는걸 볼 수 있음

그래서 인쇄체와 구분될 만큼 변형해서 손으로 휘갈겨 쓴 글 또한 모두 필기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함


물론 모든 손글씨 == 필기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님

표준 자형을 보고 모사해서 손으로 쓰던 것이 숙달되면서 기존 자형과의 차이가 커져야 필기체라고 말할 수 있지



앞서 말했던 히브리 표준 자형으로 쓰여진 유대 경전과 히브리 필기체로 작성된 편지임

로마자 계열의 필기체처럼 이어쓰는 특징은 나타나지 않지만 자형은 필기의 편의 + 구분감을 위해 상당히 변형된 걸 볼 수 있음


이처럼 휘갈겨 쓴 글자는 잉크 필기구를 통해 일상 속에서 쓰는 문자라면 어디나 나타남. 적당히 알아볼 수 있으면 됐지 매번 FM대로 쓰긴 귀찮으니까

당장 한자에도 엄청 휘갈겨 쓴 초서체가 있는데 이건 표어문자 특성상 지가 쓴거 아니면 읽기가 곤란함을 넘어서 붓 궤적을 분석해야할 정도로 난해함

로마자 필기체도 깃펜이 도입되면서 약해빠진 깃펜을 오래 쓰려고 + 잉크를 아껴 쓰려고 하다보니 변형된게 이어져 오는 것이고

심지어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도 돌에 새기는 FM식과 파피루스에 쓰는 손글씨에 차이가 꽤나 있음



이집트 상형문자의 필기체와 표준 자형인데 기본 뼈대를 빼면 꽤 많은 변형이 가해짐


이처럼 어떤 문자든 영어로 + Cursive라고 검색하면 돌이나 나무에 새길때만 쓰던 게 아닌 이상 인쇄체와 다르게 변화한 글자들을 볼 수 있음

아니면 아랍 문자 마냥 필기체가 인쇄체를 잡아먹은 경우도 있고



위 정의를 따르면 이따구로 날려쓴 글씨도 훌륭한 필기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한글에도 필기체가 있음

물론 모든 문자가 그렇듯 처음부터 있던 건 아니고 한글이 생활 속에 스며들면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 역사를 살펴보자



우선 한글이 처음 반포될 때는 이런 판본체라고 하는 네모네모한 글자를 주로 썼음

서예 배울 때 맨 처음 배우는 서체기도 한데 이때는 한글이 생활화가 썩 되지 않아서 출판되는 책 같은 곳에나 쓰임

출판물에다 글씨를 휘갈길 순 없기도 하고 더 큰 이유로 아직 한글이 일상에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에 흘려쓰는 글씨가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리고 조선 중기쯤 되니까 한글이 점점 생활화되기 시작하면서 궁체가 등장함

이쯤 되면 한글이 민간에서도 많이 사용되면서 본격적인 흘림체가 나타나는데 이건 또 크게 반흘림이랑 완전 흘림으로 나눌 수 있음


반흘림은 흘림체의 기본으로 한 글자 내에서 이어쓰기 편하도록 궁체를 다소 변형한 형태를 보이고

완전 흘림은 반흘림을 기반으로 더 흘려쓴 서체인데 한글이 흘려쓰기에 썩 적합하게 생겨먹질 않았다 보니깐 보통 2~3글자를 이어쓰는 양상을 보임



그리고 흘림체는 현대의 한글 날려쓰기와 비슷한 획순도 많지만 낯선 획순도 꽤나 있음

ㅁ을 ㅣ + 3처럼 쓴다든가 ㅍ과 ㄹ, ㄴ과 ㄷ이 거의 차이가 없기도 하고 어두 ㅇ은 항상 삐침을 쓰는 등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현대보다는 전체적으로 붓으로 쓰기 편하고 세로쓰기에 적합한 자형이 많이 반영됨

나는 서예 배울 때 반흘림까지만 배웠는데 완전 흘림은 그냥 멋대로 흘려쓴거에 가까워서 그런듯 싶음



여기서 잠시 필기체에서 벗어나 한글 풀어쓰기 운동에 대해 알아보자

한글을 모아쓰지 않고 풀어쓴다 == 흔히 아는 로마자식 필기체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니까


한글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한자와의 호환을 위해 모아쓰기를 채택했고 동아시아 표준이었던 세로쓰기와 함께 이게 몇백년간 유지되어 오다가

구한말 쯤 되면서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이 다양한 이유로 한글을 풀어쓰는 것이나 가로로 쓰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함


이때가 한글 정서법의 격동기이기도 했는데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나오면서 더 이상 발음이 남아있지 않은 아래아가 사라지고 텬디(天地), 죠션(朝鮮), 긔챠(汽車)와 같이 발음과 맞지 않는 한자 표기법을 발음에 맞게 대거 수정하는 등 옛 문체가 현대적인 문체로 갈아엎어지다시피 했는데 이것이 영향을 줬다는 말도 있음


아무튼 풀어쓰기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까닭으로는 한자에 종속된 표기법의 독립이나 효율적인 전산화 같은 게 주 이유였는데 개인적으로 풀어쓰기 운동을 지지하진 않지만 후자는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좀 공감이 됨


지금은 완전히 모아쓰기로 전산화가 완료돼서 어쩔 순 없지만 일반적인 제목용 폰트가 2350자에 본문용 폰트가 11172자나 되니까 폰트 만들기가 로마자에 비하면 몹시 힘든 작업임. 조합형-완성형 논쟁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도 영어 폰트나 한글 풀어쓰기 폰트 만드는 데는 며칠 안 걸렸는데 모아쓰기로 2350자라도 만들려고 하면 최소 년 단위는 잡아야 할 테니까

이러다보니 한글 폰트들은 개인이 작업해서 퍼블리시하는 폰트가 적어지고 서체 전문 기업이 파이를 많이 차지하다 보니 개성 넘치는 폰트들이 로마자만큼 많질 못한 것 같아서 아쉽긴 하다


어쨌든 풀어쓰기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아지면서 그 사람들 나름대로 안을 제시하기 시작함



우선 풀어쓰기의 물꼬를 튼 주시경 선생의 안으로 쓴 졸업장인데 단어를 극단적일 정도로 순우리말만 이용해서 읽어보면 꽤나 특이함

보면 알겠지만 기존 한글 자모를 그대로 풀어 쓴 형태를 해서 아무런 추가 교육이 필요가 없고 미니멀리즘한 한글 자형을 잘 살렸지만 자형 자체가, 특히 모음이 풀어쓰라고 만든 게 아니다 보니 형태가 불안정하고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음



여담으로 이걸 80년도에 김정수라는 학자가 가독성 개선을 목표로 수정해서 제안한 게 기울여 풀어쓰기인데

초기 컴퓨터 환경에서 반각만으로 한글을 써야할 때 간혹 쓰이기도 했지만 풀어쓰기 운동이 이미 식어버린 시기인데다 이것마저도 가독성이 별로라서 묻혀버림


그래서 당시 학자들 중엔 가독성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글 자모를 거의 로마자나 키릴 문자와 비슷한 형태로 변형하는 안을 내놓는 사람도 나타남

그리고 이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글 풀어쓰기 필기체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글 주제가 필기체니까 정서법 같은 것 보단 필기체를 주로 설명함


사실 필기체는 위에 설명했듯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걸 제안한 것 자체에 대한 비판도 있고 굳이 안 쓰던 대소문자를 추가한 건 서구 문화의 무비판적 수용으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



우선 이필수라는 학자가 정음문전이라는 책으로 한글 필기체 안을 내놓았는데 기본적으로 로마자 필기체에서 따온 자형에다 키릴 문자와 그리스 문자 필기체를 조금씩 추가한 모습임

근데 필기체를 안 써본 사람도 딱 보면 감이 오겠지만 자형을 90도씩 돌려놓은건 기본에다 모음은 자형에서 따오다가 로마자 발음에서 따오다가 하는 등 가독성을 팔아먹은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한글 기존 자형 자체를 변형하진 않고 필기체만 제안을 함



그리고 김석곤이라는 학자가 제안한 인쇄체/필기체 안인데 이 사람부터는 기존 한글 자모도 조금씩 변형되는 걸 볼 수 있음

필기체를 보면 이필수의 안보다는 키릴 파생이 더 늘어나고 훨씬 기존 한글에 가까워져서 비교적 가독성이 괜찮아졌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헷갈리는 자형이 좀 있고 ㅃ 같은건 저걸 쓰라고 만든건지 싶은 등 한계가 있음



보통 풀어쓰기하면 일컬어지는 최현배 선생의 풀어쓰기 안

자모 형태는 다른 문자의 영향을 받은게 아니라 최현배 본인의 연구로 최적의 자형을 연구하다 보니 나온게 저런 형태라고 함

이제 본격적으로 완전히 다른 문자로 보일 만큼 글자가 변했고 필기체는 비교적 쓰기에 더 적합하고 알아보기 쉽게 변했음


눈 여겨볼 건 작은 ㅣ (딴이)를 분리해서 추가한 건데 이걸 다른 자음 뒤에 합쳐서 ㅔ, ㅐ 등의 복합 모음을 표현함

풀어쓰기에서 공통적으로 주장되는 게 발음되지 않아서 불필요한 어두 ㅇ의 삭제인데 이 때문에 '위'와 '우이'와 같은 여러 단어가 구분되지 않았음

그렇다고 ㅇ을 쓰자니 그건 그거대로 음가가 있는 어말 ㅇ과의 혼동 우려가 높았고 각각 글자마다 자형을 따로 만드는 건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김석곤의 안에서는 모음 위에 Breve, 즉 반달표를 표기해서 이어지는 모음이라는 표시를 하기도 했지만 ㅐ, ㅔ 같은게 글에 한두번 나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뒤에 ㅣ가 붙은 애들 근본이 다중 모음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도 ㅢ (+ ㅟ)를 제외하면 모두 발음이 단모음으로 변한 터라 다른 이중 모음처럼 표기하기엔 좀 그렇기도 했음


그래서 최현배 선생은 다소 전통적인 개념인 딴이를 별도의 문자로 독립시켜서 따로 추가한 것임

참고로 최현배의 저서인 글자의 혁명에서는 ㅟ를 이중 모음으로 보아 딴이 대신 Breve를 통해 표기하는 것으로 해두었지만, 현대 표준 발음법을 따라 단모음으로 간주한다면 딴이를 쓸 수도 있음


하지만 필기체는 실제로 써보면 알겠지만 필기체가 익숙한 사람에게도 여전히 실사용하기엔 불편한 부분이 꽤 있음

ㅓ와 ㅕ, ㅅ과 ㅛ가 속기할 때 헷갈리게 생긴 문제나 ㄹ은 자형 자체가 빠르게 필사하기 힘든 등

그래서 내가 평소에 쓰는 풀어쓰기 필기체는 최현배 선생님 안을 쓰기 편하고 변별력 있도록 다소 변형한 것임



이건 김두봉이 제안한 한글 필기체


이 분은 주시경 선생의 수제자인데 주시경의 풀어쓰기와 같은 결로 한글을 변형하지 않았고 필기체에서도 기존 한글 형태가 크게 드러나지만 그 때문에 자모 변별이 힘듬

그래서 사실 난 아직까지 아래 문장을 제대로 해독을 못함

이후 해방 뒤에 북한의 초대 국가수반 자리를 지내면서도 한글 정책을 담당하며 풀어쓰기를 주장했지만 결국 씹히고 나중엔 김일성한테 숙청됨


결국 풀어쓰기 운동은 최대 한계인 익숙함과 가독성을 이기지 못하고 모아쓰기 타자기가 나오면서 사실상 맥이 끊겼다

현대의 우리가 볼 땐 한글 자모의 로마자/키릴스러운 변형과 필기체 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고 나름의 장점도 있지만 대소문자/필기체 등 라틴 문자의 특징을 걔네들의 문자 발달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과 모아쓰라고 만든 문자를 어거지로 풀어쓰다 보니 정보전달 효율 등 문제점도 많았음


대신 이 학자들이 풀어쓰기와 함께 주장한 좌횡서(左橫書) + 띄어쓰기는 받아들여져서 지금도 필기 및 독서 능률에 기여를 하고 있는 중

실제로 좌횡서가 오른손잡이가 대다수인 상황에서 읽고 쓰기에 더욱 편하다고 한다

띄어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 보편적 한글 필기체를 계승하는 서체로 서예가 백강 이태희 씨가 만든 백강고시체가 있음

이 서체는 위에서 설명했던 반흘림과 유사하게 기존 정자체를 다소간 변형해서 쓰기 편하게 하되 글자끼리 이어지지는 않는 특징이 있고

'고시체' 라는 이름답게 가독성을 몹시 중시해서 자음을 크게 쓰고 세로획을 짧게 쓰는 특징이 다른 언어의 필기체들과 구분되는 점이다

하지만 사시가 죽어버리고 손글씨가 도외시되면서 옛날의 권위를 갖진 못하는 중


물론 서두에 말했듯 필기체는 사람마다 다르고 날려쓴 모든 글씨체가 필기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대표적인 게 이거다라고 소개하는 것임

내가 백강체를 배워보진 않았지만 손글씨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배워보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음



이런 다른 한글 필기체들도 있긴 한데 개인이 만들어서 그 사람 혼자만 쓰고 읽는 수준으로 지엽적인 게 보통임


하지만 그렇다고 보편적 한글 필기체가 죽은 건 아닌게

서두에 썼듯이 날려쓴 글씨는 모두 훌륭한 필기체고, 여러 사람들의 날림글씨를 보다 보면 세부적 필체는 다를지라도 자모의 이어쓰는 방식이나 간략화하는 방법 등의 큰 틀은 비슷비슷한 걸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을 종합해내면 그게 바로 보편적 한글 필기체라고 할 수 있지

사실상 자각만 없을 뿐 우리도 보편적 필기체를 잘 쓰고 있는 것


나는 필기체로 하는 손글씨 메모를 좋아해서 최현배 풀어쓰기 기반의 필기체를 평소에 쓰고 있음

물론 앞서 말했듯 현대에는 손글씨 쓸 일도 잘 없고 풀어쓰기 운동도 사실상 사멸함. 나도 풀어쓰기 자체를 지지하진 않고

그래도 손글씨 감성과 나름의 멋도 있고 다른 사람이 못 읽게 하고 싶을 땐 이것만한 게 없어서 잘 쓰게 되더라


여기서 더 왈가왈부하기엔 자작 문자 지양하라고 하니깐 최현배 풀어쓰기의 예문 느낌으로 내 손글씨로 쓴 윤동주 시인의 서시만 올리고 끝냄



잘못된 점 있으면 지적해주고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