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주인공은 바로 프로이센의 전성기를 끌어낸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 이다.


프리드리히 2세, 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하면 이 인물을 지칭한다.




일단 이 양반은 '동성애자'다. 이 양반 주류 학계의 학자들도 이미 동성애자가 맞다고 어느 정도 판명된 인물이다. 실제로 결혼을 하긴 했지만 애도 없었고, 왕위도 조카가 물려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가 빼박 동성애자로 찍힌 사건이 있는데 왕세자 시절에 있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내이자 왕비, 즉 프리드리히의 엄마였던 소피아 도로테아(Sophia Dorothea)는 영국의 조지 1세의 딸이었고 프로이센과 영국을 더 긴밀하게 만들고 싶어서 아들을 당시 왕이었던 조지 2세의 딸인 아멜리아 공주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이 영국 왕실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게 아니꼬왔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다가 결국 아들의 결혼을 파토냈다. 게다가 왕세자가 귀족이자 측근이었던 페터 카를 크리스토프(Peter Karl Christoph)와 너무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돌고 또 마찬가지로 영국과 혼담이 오가고 있던 누나 빌헬미네 공주와도 친하게 지내자 왕자를 강제로 떼내서 사냥용 궁전으로 보내 혼자 살게 했다.




대영제국의 아멜리아 공주. 프리드리히와의 혼담이 깨진 후 리치몬드 공원의 관리인으로 혼자 살다 죽었는데 품 속에 프리드리히 왕자의 조각상이 있었다고 한다.




키스(Keith)의 페터 카를 크리스토프. 왕세자 프리드리히와 굉장히 가까이 지냈고 영향을 많이 준 인물인데 결국 소문이 퍼지자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네덜란드와의 접경지인 클레베로 강제 전근 시켜버렸다.




빌헬미네 공주. 참고로 이 여인도 딱한 게 아버지 때문에 웨일즈의 왕자 프레더릭과의 결혼이 성사되지 못했고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후작인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했다. 웃긴 건, 프리드리히는 빌헬미네 공주의 여동생인 소피아와 이미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1세가 이걸 파토내고 강제로 빌헬미네와 이어버렸다. 




결국 영국에 대한 열등의식에 쩔어있던 아버지 때문에 온 가족과 함께 불행해야 했던 왕세자 프리드리히는 거기서 한 명의 친구를 사귀게 되는데 그가 바로 프로이센 군의 중위였던 '한스 헤르만 폰 카테(hans Hermann von Katte)'였다. 




한스 헤르만 폰 카테




명목상으로는 친구였지만 둘은 한시도 서로를 떠나지 않을 정도로 붙어다녔고 결국 둘의 관계는 주변인이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져 추문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어느 한 날은 프리드리히 1세가 좀 이른 시간에 사냥궁에 온 적이 있는데 한스, 그리고 왕세자에게 플루트 부는 법을 알려준 요한 요아킴 콴츠(Johann Joachim Quantz)는 왕을 피해 서둘러 자신들의 옷을 난로에 넣어 불태우고 벽장 뒤로 숨었는데 흔적을 발견한 왕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친 탓에 1시간이나 좁아터진 벽장에서 나오질 못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계몽가이자 철학자였던 볼테르(Voltaire). 사실 볼테르는 '필명'이고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 이 양반은 프리드리히 왕세자와 함께 거주까지 했었으니 왕세자와 한스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 사건 이후 폭발해 버린 프리드리히 왕세자는 가족에게 엄격하기만 하고 제멋대로인 아버지한테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자신의 애인인 한스 및 아버지 때문에 먼 곳으로 가버린 페터 키스(페터 카를 크리스토프)와 페터의 동생인 로베르트 키스(Robert Keith), 그리고 하급 장교들 몇명과 모의해 어머니의 친정집인 영국으로 망명을 떠날 계획을 꾸몄다. 



하지만 팔츠 선제후국을 지나던 중에 조국을 배반한다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로베르트 키스가 그만 국왕을 찾아가 이 계획을 전부 고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결국 왕세자와 한스는 현장에서 붙잡혀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퀴스트린(Küstrin, 오늘날의 폴란드 코스트신나트오드롱)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고 왕세자를 맞이하려고 달려오던 페터 키스는 이 소식을 듣고는 다시 길을 돌려 헤이그로 달아났고 나중에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처형 당하기 위해 이동하는 한스의 모습. 창 너머로 애처롭게 손을 뻗은 프리드리히의 애절한 모습도 보인다. 




결국 한스가 울고불며 애원하는 프리드리히를 두고 먼저 끌려가서 처형을 당했는데 프리드리히 1세는 원래 군인의 몸으로 아들을 유혹해 도망가게 하려 한 이 대역죄인의 팔다리를 자른 뒤 목을 메어 죽이는 잔혹한 처형을 원했으나 재판정에 있던 모든 이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혹독한 아버지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는 그 잘린 목을 내건 뒤, 병사들로 하여금 아들의 얼굴을 창살이 있는 창에 강제로 붙여서 오랜시간 바라보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아들을 보고는 대책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왕세자로서의 직위를 박탈한 뒤 한스와 마찬가지로 반역죄를 씌워서 처형하려고 준비를 했다. 그 때 프리드리히에게 태클을 건 이가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었던 카를 6세(Karl VI)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6세.




카를 6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아들까지 죽이려 드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중재에 나섰다. 당시 독일 지역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상태라 신성로마제국 소속도 있었으나 독립 구역도 있었는데 프로이센의 영토 중 포츠담과 수도 베를린이 속한 브란덴부르크 일대와 포메른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의 소속이었다. 때문에 프로이센 국왕은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Markgraf) 직위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카를 6세는 '제국 소속의 왕족이나 귀족의 재판 및 처분은 오로지 제국 회의에서만 가능하다' 는 이유를 들었고 프리드리히 1세로서는 당시 프로이센이 제국 내 입지가 그리 크지 못했던데다 아들을 죽이려고 회의를 열었다는 거 자체가 명분이 없던 탓에 회의까지 가봐야 망신만 살 게 뻔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는 영국보다는 합스부르크와 친하길 원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1세가 카를 6세의 권위에 굴복함으로써 왕세자 프리드리히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이자 오스트리아의 국왕으로 즉위한 마리아 테레지아.




카를 6세에 의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왕세자 프리드리히는 훗날 프로이센의 국왕이 되었고 후계자가 없어 카를 6세의 딸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가 왕위에 오르자 그걸 빌미로 전쟁을 일으켜 알토란 땅인 슐레지엔(Schlesien)을 털어먹었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복수전을 일으키자 겨우겨우 버티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배신하고 프로이센의 편을 들면서 결국 최종적으로 승리자가 되었다.


 



<요약>


아빠 때문에 고통받던 금수저 게이, 결국 도망갈려다가 걸려서 진짜 죽을 뻔 했는데 아빠 상사 때문에 목숨을 건짐. 근데 나중에 자기를 구해준 아빠 상사 딸래미 통수를 쳐서 부동산 털어먹었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