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덕들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살리카 법(Salic low)은 '여성은 왕위에 오를 수 없다' 는 내용이 담긴 법전이다.


원래 이 법의 골자는 프랑크 족 계열의 부족이었던 살리족의 법령에서 출발했다.




당시 법조문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 그러나 살릭의 땅에서 유산의 일부는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으며 땅의 모든 유산은 남성에게 돌아갈 것이다.>

<... 테라 살리카(토지 재산)와 관련해 유산의 그 어떤 부분도 여성의 것이 아니며 모든 땅은 형제인 남성의 소유다.>



살릭 족에서는 철저하게 여성의 토지 상속을 엄격히 금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리를 잡은 프랑크 왕국은 이 법조항들을 받아들였으나 이 법이 적용되던 시기 역시 언제라도 대가 끊어질 수도 있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결국 프랑스 왕국에 속해 있던 네우스트리아의 왕이었던 '킬페리쿠스 1세'가 이 법령에 손을 댔다. 킬페리쿠스는 자기 이모의 아들들에게 왕위를 위협받았기 때문에 최대한 왕권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법을 바꾸길 원했다. 결국 살리카 법에서 말하는 '테라 살리카'를 '살릭 족 조상들이 살던 땅', 즉 오늘날의 벨기에 일대로 확정하고는 <테라 살리카 일대를 뺀 나머지 땅의 경우, 한 남자에게 남아 있는 아들이 없으면 그 딸이 토지를 상속받을 수 있다>로 바꿨다.





이 내용은 꽤 나타내는 바가 큰데 그 동안 고대 부족들은 유산을 상속할 때 주로 형제 상속으로 진행을 했으나, 킬페리쿠스가 살리카 법을 개정하면서 철저하게 직계자손에게 상속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 바뀐 법은 형제간에도 서로 죽고 죽이던 일이 빈번하던 프랑크 왕국과 그 주변에도 필요하다고 여겨져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런데 이 법이 또 한 번의 개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건 바로 프랑스 왕국의 카페 왕조 시기, 루이 10세가 죽은 시기였다.









이런 상황이었는데, 설명을 하자면 루이 10세가 죽었고 루이 10세에게는 동생으로는 푸아티에의 백작 필리프, 그리고 자녀로는 딸이었던 잔과 아들 장이 있었다. 당연히 아들이었던 장 1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5일 만에 의문사했다. 필리프는 장 1세의 섭정까지 맡으면서 왕위를 노렸고 마땅히 남자인 자기가 왕이 될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당시 프랑크 왕국법에 의거하면 왕의 장녀였던 장의 계승 순위가 더 높았다. 왕의 자녀가 형제보다 더 높았던데다 여성도 상속받을 수 있었기 때문.







결국 법 때문에 순위에서 밀려날 처지가 된 필리프는 계략을 꾸몄다. 우선 주교와 사제들을 꼬셔서 대관식이 열리는 랭스로 달려가 독단적으로 성유식, 즉 왕이 되기 전 이마에 성스러운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행한 뒤, 성직자들과 학자들을 끌어모아서 현재 적용되는 계승 법률 중 잘못된 부분을 고친다고 법석을 떨었다.


결국 고대의 법까지 뒤적거리다가 마침내 킬페리쿠스 1세가 개정한 살리카 법을 찾게 되었고 '원래 살리카 법은 여성에게는 토지 상속을 금지했고 군대를 지휘할 수 없는 여성이 토지 상속을 받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법의 범위를 테라 살리카로 한정한 것은 잘못이다' 라고 주장하며 다시금 여성의 토지 상속금지를 주장했고 놀랍게도 이게 받아들여졌다.


바뀐 법령 해석으로 인해 루이 10세의 딸 잔은 순식간에 계승 순위가 사라져서 완전히 밀려났고 필리프는 자신이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이 된 후 자신의 둘째 형수인 클레멘티아까지 유폐시켜 버렸다.







근데 정작 필리프 5세는 자기가 개정한 법에 자기도 통수를 맞아 버렸다.





필리프 5세와 왕비 '잔 2세'는 연달아 딸만 낳다가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고작 1년 만에 죽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개정한 살리카 법에 의거해 왕위는 필리프 5세의 자손이 아닌 자신의 동생인 샤를에게 넘겨야 했다.







문제는 샤를 4세도 아내를 3명이나 봤지만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훗날 오를레앙의 공작부인이 되는 막내딸 블랑쉐를 빼면 전부 유아기에 사망해 버렸다.









결국 미덥지 않지만 가까운 친척 셋 중에 하나를 왕으로 골라야만 했고, 결국 선택된 것은 사촌인 발루아의 필리프였다. 하지만 그 덕에 왕이 된 필리프 6세는 혈통이 끊어져 버린 카페 왕조를 사실상 닫아버린 뒤 (카페 왕가의 혈통이 섞이긴 했지만) 새로운 왕조인 '발루아 왕가' 를 창시했다. 그리고 나바라의 필리프 3세는 루이 10세의 딸이었으나 왕위계승권을 빼앗겼던 잔과 결혼했다. 그리고 문 닫아가는 카페 왕가에 마음이 떠났던 잔은 살리카 법이 적용되지 않던 나바라로 떠나 여왕 '후아나 2세'가 되었고 남편과 공동왕이 되었다. 이 때부터 나바라는 사실상 프랑스에서 독립해 버렸다. 








한편, 계승권이 있음에도 살리카 법 때문에 나가리가 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안 그래도 열 받고 있었는데 자신에게 대항했다가 된통 깨진 스코틀랜드의 왕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망명까지 떠나자 프랑스가 플랑드르 지역에서 무역권을 침해한다면서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는 공격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백년전쟁'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