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 휘하의 무장이자 시즈가타케 칠본창의 말석이었던놈

 

원래는 오다 휘하의 무장이였으나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으로 전출하여 히데요시의 천하 공략전에 활약한뒤 오우미의 3만3천 석의 영주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육지가 아닌 수군 장수가 되어 임진왜란에 참전함

 

이후  보급을 위해 잠시 육지에서 머무르던때 용인에서 조선군 5만 이상을 1천명으로 궤주시키는 활약을 펼쳤는데, 이 활약이 과장되면서 순식간에 5만대 1천 맞다이를 이긴 관우나 항우의 전생자가 되어 조선의 공포가 되어버림. 정작 일본군에서는 무모한 돌격을 했다고 까임

 

이후 한산도에서 역대급 패배를 당한뒤 그다음 명량해전에서도 또한번 털렸는데 그뒤로는 얌전히 구경만 하다가 자기네 나라로 귀환한뒤 도쿠가와편으로 갈아타서 잘먹고 잘살다 감.

 

뭐 아예 병신은 아니었고 활약도 있긴 했지만 일본에서는 그냥 히데요시 따까리 1 정도의 취급이었고 오죽하면 시즈가타케 칠본창의 필두였던 마사노리는 와키자카를 보고 그의 면전에서 "너따위가 뭔데 나와 동급으로 묶인것이냐?" 라며 대놓고 꼽을 주는대도 아무말 못할 정도였음.

 

하지만 조선에서는 용인전투의 대활약, 현대에서는 이순신에게 개털렸다는 극적인 비중덕에 이순신 띄우기 중간보스 용도로 많이 활용되어 어느세 일본군 최고의 명장으로 각색됨. 비슷하게 인지도 높은 고니시나 가토 기요마사는 영지가 10만석이 넘어가는 유력 영주였기라도 하지 이놈은 3만석 따까리 수준이었으나 전장과 상대를 잘만나서 인지도가 날아오른 케이스.

 

덕분에 일본 제일의 지장의 타이틀을 달고 히데요시가 동쪽의 도쿠가와, 서쪽의 다카카게 라 평가한 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수군 총대장이자 침묵의 용장(沈勇の士). 이라 평가받던 가토 요시야키는 그냥 쩌리가 되어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