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역사중 가장 특이한 군신관계를 유지한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신라의 42대 군주인 흥덕왕과 해상왕 장보고로 흥덕왕은 장보고를 가장 신뢰하는 신하로 생각했다.


장보고에게 청해를 본인의 구역으로 따로 때어져 청해진 대사라는 특이한 직책을 수여 했으며 심지아 군사 1만을 징발할수 있는 병권까지 장보고에게 제수한다.


흥덕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장보고는 한,중,일 삼국의 해상왕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흥덕왕의 본인의 의도치 않은 실책으로 신하 장보고가 암살되는등 두사람은 특이한 군신관계를 유지했다.





흥덕왕이 장보고를 신뢰하게 된건 신라 역사상 미스테리로 알다시피 신라는 가장 페쉐적인 신분정책인 골품제 시행하는 국가로 장보고는 알다시피 신분을 전혀 알수없는 양반이다.


그나마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을 역임한 인물로 그것을 제외하곤 신분을 전혀 알수없는 것으로 보아 6두품 보다 낮은 신분임을 알수 있는데 게다가 흥덕왕 이양반 골품제를 숭상한 군주중 하나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뜬금포로 궁궐에 와 흥덕왕을 알현해 그간의 당나라에서 벌어지는 신라인들의 사정과 그리고 해적 출몰과 본인이 직접 해적을 소탕하고 싶다는 의견을 왕앞에서 피력한다.


흥덕왕 입장에서는 뜬금포이지만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청해진 대사라는 직책과 심지어 군사 1만을 징발할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는 신라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장보고는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파격적으로  승진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왕의 신임에 감격해 신라의 골칫거리인 해적을 때려잡기 시작하는데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가 된후 신라의 해적은 제거된다.


그덕분에 해상 무역로가 안전해져 장보고는 근거지인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본격화 하며 신라는 단숨에 동북아 무역의 거점지가 되었으며 신라의 경제가 급격히 좋아지기 시작한다.


장보고와 청해진의 전성기로 흥덕왕의 파격적인 조치로 신라는 말기의 혼란을 어느정도 정리하고 나라가 처음으로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흥덕왕 본인이 장보고를 파격적으로 등용하고 청해진을 지원한 덕분에 신라가 경제와 문화적으로 발전하는 긍정적인 점도 있었으나 치명적인 단점들이 신라를 괴롭히게 된다.


바로 해적이 사라지고 해상무역으로 경제가 좋아져 당나라 심지어 중앙 아시아 국가들의 무역으로 사치품이 신라사회에 들어오면서 사회가 혼란해지기 시작한것이다.


평민 부터 귀족에 이르기 까지 돈이 많아지면서 이들이 당나라와 중앙 아시아 사치품을 무자비하게 구매하면서 신라사회가 혼란 해지기 시작한것으로 혼란의 원인인 아이러니 하게도 장보고의 해적 소탕과 해상무역 이었다.


즉 반란도 안일 어나고 해적도 사라지며 평화로운 시기가 오랜만에 신라에 들어오고 경제 역시 호황을 맞이하면서 평민과 귀족들의 사치가 심해진것으로 흥덕왕의 경우 이러한 풍조에 상당히 당황한다.





흥덕왕은 이러한 사치품조의 원인이 장보고과 청해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하인 장보고를 책망하지 않고 더욱더 자신의 신하에 대한 신뢰를 주며 해상무역을 활성화 시킨다.


오히려 군주본인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 했으며 흥덕왕은 앞으로 신분에 맞게 사치품 구매의 제한을 두는 정책을 시행하며 어떻게는 혼란을 잠재우려 했다.


물론 효과는 없었지만 그나마 왕본인이 정사에 열정적이고 자제에 능한 성격이라 신하를 숙청하는 손쉬운 선택지 대신 군주 본인이 문제를 해결하겨 노력 했으며 실제로 흥덕왕은 신라 하대 군주들중 유일하게 정사를 제대로 본 군주라고 평가된다.


고려 공민왕의 경우 여러개혁을 할때마다 누군가 태클을 걸거나 아니면 문제가 생기면 군주 본인이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개혁의 주체인 신하들을 숙청하는 짓을 자주 했는데 숙청의 대표적인 희생양이 바로 인당으로 공민왕은 압록강 8참 정벌의 주역인 인당을 참수했다.


공민왕은 신하들을 숙청해 정세운,안우,이방실,인당,김득배 그리고 유탁 같은 관료들과 장군들을 숙청하며 고려 멸망을 앞당겼으며 그결과 이성계는 누구의 견제도 없이 권력을 키워 나간다.





흥덕왕은 자신의 신뢰한 신하 장보고의 죽음을 앞당기는 원인을 제공하니 공민왕과 유사하게 부인을 너무 사랑한 애처가인점이 문제로 알다시피 군주가 애처가면 나라는 굉장히 혼란해 진다.


이유는 후사문제가 터지기 때문으로 흥덕왕은 부인이 죽은후 어떠한 궁중여인들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60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하며 또 신라왕족간의 후계다툼이 터진다.


문제는 장보고가 후계다툼에 휘말린것으로 장보고는 김우징을 지지하며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등극시키는 공신이 되지만 신무왕 사후 귀족들의 견제를 받아 염장에게 암살되고 만다. ( 반란설이 있지만 확실치가 않으며 대부분은 귀족들의 견제에 의한 암살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