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일본과 명나라,조선 3국이 벌인 7년간의 전쟁인 임진왜란은 일본이 이득이라는 반응이 많은데 실제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조선 역시 타격을 받은것은 맞다.


우습게도 다이묘들만 이득을 밨지 정작 전쟁의 당사자들인 일본민중들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손해를 보았는데 도요토미 일가는 멸문을 당했으며 민중들의 경우 종전후 다이묘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 싸우는 내전이 일어나 일본 서남부 해안이 초토화 된다.


에도막부가 극단적으로 내정에 집중하고 조선과 화해를 요청한데에는 이러한 일본의 사정이 숨어있으며 일본이 안정화 된건 임진왜란 떄문이 아니라 에도막부가 극단적으로 내정에 집중했기에 안정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은 지금도 의문인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단 적국으로 정한 조선의 국력을 너무나 얕보았는데 당시 일본의 인구는 1700만명 이었다.


조선 역시 1200만명의 인구를 보유해 정작 일본과 인구수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수군과 육군을 포함 약 13만5천에 달하는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문약한것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명나라 다음의 국력을 보유한 국가로 임진왜란전 여진족을 패고 있었을 정도로 군사력 역시 약하지는 않았으며 또한 권율,이순신,송상현 같은 인물들을 전방에 배치할 정도로 전쟁준비 역시 하고 있었다.


다만 왜군의 규모를 2만정도로 잡았지 설마 14만에 달하는 왜군이 조선에 올줄을 몰랐다는게 함정이지만 조선조정은 시간이 지나자 총동원령을 때려 17만에 달하는 대군을 징병해 왜군을 경악시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이 의문인 마지막 원인은 바로 동아시아 최강국 명나라의 존재를 까먹은것로 명나라는 인구 7천만명을 보유한 명실상부 동아시아의 천조국이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하자 류큐,아유다이 왕국이 명나라편에 서서 참전하려 시도를 했을정도이며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개입을 무시했는데 문제는 명나라 입장에서 조선은 굉장히 중요한 번국이다.


당장 여진족을 제어시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고있는 동시에 만일 왜군이 조선을 멸망 시켰다간 명나라는 요동반도에 수많은 명나라군을 배치해야 했기에 명나라 조정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무려 11만에 달하는 명나라군을 조선에 파병한다.





왜군은 하늘이 내린 성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11만에 달하는 명나라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임진왜란에서 주력병력 10만이 날아가는 일이 벌어진다.


그후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트롤링으로 한양으로 가지만 직산전투에서 명나라군 기병대의 공격을 받는 동시에 명량에서 벌어진 성웅의 반격으로 인해 병력 상당수를 잃어 해안가에 성을 쌓고 소모전에 들어간다.


결국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왜군은 철군하기 시작해 마지막에 성웅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연합수군과의 해전인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의 전쟁는 막을 내리고 만다.


조선과 명나라 모두 전쟁의 타격을 받았지만 조선의 경우 군사적 타격은 크게받지 않아 전후 무려 1만5천에 달하는 북방병력과 5천에 달하는 기병을 양성했다.


명나라 멸망과 임진왜란은 관련이 없는게 멸망에 소요된 시간이 몇십년 이상인데다가 사실 원숭환의 처형이라는 희대의 병크를 숭정제가 저질러 청나라가 아닌 이자성의 난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일본도 국가적 타격을 크게 받았는데 전쟁이 7년이라는 초장기전으로 흘러가면서 일본 역시 막대한 인명과 물적손실을 격었으며 임진왜란 때문에 일본 서남부 지방이 초토화 된다.


특히 일본이 자랑하던 수군력이 큰 타격을 받아 수군전력을 재건하는데 무려 300년이 걸렸으며 일본수군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대부분 전쟁에서 성웅이 이끄는 조선수군에 의해 소멸이 되었다.


게다가 동군과 서군이 나누어 다이묘들끼리의 내전이 터지는등 일본 역시 타격을 받았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지를 받은 이유자체가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다이묘 였기 때문이다.


도요토미가를 멸문하고 세워진 에도막부는 전쟁과 내전의 타격을 만회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내정에 전념했으며 또한 조선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중,일 삼국에 X를 제대로 뿌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