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7월은 류성룡에게 악몽인 날로 류성룡은 전시재상으로 유명하지만 반면 아우를 나라에 바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인물로 유명한데 류성룡이 슬퍼한 이유가 있었다.


류성룡에게는 류종개라는 8촌동생이 있었는데 형인 류성룡이 전시재상이 되자 류종개 본인은 고향에서 장정 600명을 모집해 의병을 조직 의병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류성룡은 1592년 7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는데 바로 8촌아우인 의병장 류종개가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던중 전사했다는 소식으로 심지어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의병장 류종개는 형인 류성룡의 재능을 이어받은 상당히 유능한 의병장으로 이미 일본군이 경상북도를 침공하자 장정 600명을 모집해 거의 한달동안 훈련을 실시해 정예병들로 만든다.


그뒤 경상북도의 험난한 지형을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을 집중적으로 괴롭혀 일본군의 전진을 3일간 저지시키는 동시에 일본군 선봉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한다.


의병장 류종개가 일본군 본진을 3일간 잡아준 덕분에 경상북도 방면 조선군은 일본군을 상대할 시간을 벌게되었으며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유능한 의병장으로 존경받던 사람이다.


그러던중 1592년 7월30일 일본군이 류종개가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후미를 급습하면서 결국 류종개는 고작 36살의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으며 나중에 장인이 사위인 류종개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현장이 워낙에 난전수준이라 수습하지 못했다.




류종개는 류성룡의 8촌아우이지만 집성촌이 일상화 되어있고 가문구성원간 연대감이 강한 조선시대에서 8촌은 굉장히 가까운 친척으로 그냥 가족이라고 보면된다.


당장 대한민국 민법이 정한 혼인금지 촌수가 8촌일정도로 예전에는 정말 가까운 친척으로 류성룡은 전시재상으로 활동하던중에 결국 의병장인 아우의 전사소식을 듣게된다.


특히 징비록에 임진왜란에 참전한 의병장과 장수들의 행적을 모두 기록한 반면 8촌아우인 의병장 류종개에 대해서는 단1줄도 기록하지 않았는데 참고로 류종개는 경상북도를 지켜낸 공으로 사후 선조에게 예조참의를 제수받은 유능한 의병장이다.


오히려 난중잡록이나 학봉문집에 류종개에 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편으로 정작 류성룡은 징비록에 의병장인 자신의 8촌아우에 대한 전공을 적지않아 왜적지않았는지 알수없다.





류종개는 시신도 수습하지 못해 안동선산에 묻히지 못했으며 그대신 의관묘가 격전지인 봉화군에 있는데 후손도 없는편인지 제사와 의관묘 관리는 류성룡의 후손들이 해주고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들에게 8촌아우의 애기를 자주해주는지 훗날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는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류성룡의 셋째아들인 류진은 의병을 일으켜 후금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지금도 류성룡의 후손들이 류종개의 의관묘를 관리하고 있으며 심지어 전사한 장소에서 제사도 지내고 있는데 사실 임진왜란에서 가족을 잃은 조선의 인물들은 많다.


당장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셋째아들인 이면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했으며 한음 이덕형은 부인이 왜군에게 욕보일수 없다며 자결하고 동인의 영수였던 이산해는 사촌인 의병장 이산겸이 옥사하는 일을 격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