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월 위기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왕국의 비밀 조직, Уједињење или смрт(우예디네네 일리 스므르트. 단결 혹은 죽음), 통칭 Црна рука,(츠르나 루카. 검은 손)과 손잡은 보스니아의 비밀 조직 Mlada Bosna(믈라다 보스나. 젊은 보스니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대공(Erzherzog Franz Ferdinand von Österreich) 부부를 암살하면서 유럽의 화약고에 불이 붙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선기. 이 깃발은 상선용이고 오스트리아 제국 깃발과 헝가리 왕국 깃발을 같이 계양했다.


▲ 오스트리아 제국 국기


▲ 헝가리 왕국 국기


순식간에 황위 계승자와 그 부인을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격노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세르비아인과 사이가 좋지 않던 보슈나크인(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이었다. 이들은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반 세르비아 폭동을 일으켜 세르비아계를 공격했다. 이 폭동 자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오스카르 포티오레프(Oskar Potiorek) 총독이 군 병력을 투입하며 진정되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곳곳에서 반 세르비아 폭동이 벌어졌고, 안 그래도 열 받아 있던 제국 정부는 방관했다.


※ 애초에 보슈나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자기들을 발 아래 두고 대 세르비아를 만들겠다는 주장을 하는 세르비아 왕국보다는 자기 권리를 챙겨주는 오스트리아에 더 호의적이었다. 특히 암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아 합중국이라는 이름으로 소수민족의 자치령을 다 따로 만들어서 연방제를 하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소수민족에 호의적이었다. 그런 사람을 암살했으니 반 세르비아 감정이 폭발할 수밖에.


▲ 암살범 Гаврило Принцип(가브릴로 프린치프). 처맞아서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


실행범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체포되자마자 개 같이 처맞고 감옥으로 끌려갔고, 수사 과정에서 Црна рука,(츠르나 루카. 검은 손)의 개입 사실을 확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전쟁 일변도로만 나선 것은 아니었다.

제국 내에는 강경파도 있었지만, 온건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온건파가 헝가리 총리였던 Tisza István(티서 이슈트반) 백작이었다. 티서 이슈트반 백작은 수사 상황을 좀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는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제국 내의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 왕국이 아예 발뺌 모드로 나서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주류 여론은 강경파로 돌아서게 된다.


1914년 7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파견한 Alexander Graf von Hoyos(호요스의 백작 알렉산더)가 독일 제국의 황제 Wilhelm II(빌헬름 2세)를 접견한다. 여기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원할 수 있냐는 호요스 백작의 질문에 빌헬름 2세는 전폭적으로 지지하지만,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 총리와 참모총장과의 논의에서도 같은 결론을 도출했고, 호요스 백작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명확한 입장을 정한다면 독일 제국은 이를 지지한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이 약속은 근거가 있었다.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프랑스 공화국이 모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자국 비밀조직을 동원에서 타국 영토에서 타국 황태자를 암살하는 행위는 세르비아 왕국의 자살행위였다. 따라서 다른 나라들도 무조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명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14년 7월 7일, 빈으로 돌아온 호요스 백작이 참석한 가운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내각이 소집되었다. 여기서 격론이 벌어졌고 7월 19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발송할 최후통첩문을 결정하게 된다. 이것이 아래에 나오는 통첩문이다.


세르비아 왕국은 아래와 같은 사항을 실천에 옮긴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증오심이나 경멸감을 조장하거나 그 영토의 보존에 반대하는 경향을 띤 일체의 출판물을 금지한다.

2. '인민의 방어'와 같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단체들을 즉시 해체하고 그 선전수단들을 몰수한다.

3.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내의 공공 교육 활동을 지체 없이 제거한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가담한 인물들을 군대 및 행정 조직 전체로부터 축출한다.

5.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영토 보존에 반대하는 전복 활동의 제거를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 대표의 세르비아 내 활동의 협조를 수락한다.

6. 6월 28일의 음모에 가담한 방조자들에 대한 사법절차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의 대리인들이 참여토록 한다.

7. 사라예보에서의 정부 조사단의 결과를 손상시킨 보야 탄코비치 및 밀란 치가노비치 두 사람의 관리를 지체없이 체포한다.

8.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을 넘는 무기 및 화약류의 불법거래를 방지하고 사라예보 사건 당시 무기 거래를 방치했거나 방조한 관리들을 처벌한다.

9. 6월 28일 범죄 이후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적대적 발언을 자제하지 않았던 세르비아 고위 관리들의 정당화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한 설명을 촉구한다.

10. 앞서 제시된 조치들의 집행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 지체 없이 보고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7월 25일(토요일) 저녁 6시까지 세르비아의 답변을 기대한다.


※ 이 통첩문은 1914년 7월 23일 오후 6시에 세르비아 왕국 정부에 전달되었다.


▲ 세르비아 왕국 국기


여기서 골 때리는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이 당시, 세르비아 왕국 수상은 지방 여행 중이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최후 통첩문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수도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미 시간을 하루는 날려먹은 뒤였다. 전쟁이 터지냐 마냐 하는 개판에 여행을 떠나는 미친 놈이 있다니.

다른 강대국 외교관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결정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러시아 공사는 오스트리아 공사와 만찬을 같이 하며 위기 수습을 논의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온건파로 전쟁에 반대하던 오스트리아 공사는 러시아 공사 암살 의혹에 결백을 증명하느라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프랑스 공사는 병으로 사직한 상태였고, 영국 공사도 병에 걸려 자리보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공석이 된 프랑스 공사와 러시아 공사는 프랑스 대통령 Raymond Nicolas Landry Poincaré(레몽 니콜라 랑드리 푸엥카레)가 러시아 제국 방문 중이라 새로 파견하는 게 늦어지고 있었다.


그렇긴 해도 대영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의 입장은 확고했다.


너네 비밀 조직이 남의 나라 황태자 부부를 쏴죽인 건 사실이잖아? 그런 비열한 짓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대영제국 입장은 당연했다. 자기 나라도 제국인데, 다른 나라 비밀 조직이 개입해서 자국 황제와 황태자를 쏴죽이면 어떻겠는가?

프랑스 공화국은 공화국이었지만, 여전히 전 귀족을 그래도 대우해주던 입장이었고, 이건 누가 봐도 세르비아 잘못이 맞았다.


어차피 자국에 비해 훨씬 강대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하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던 세르비아 왕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최후통첩을 수용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1914년 7월 25일, 최후통첩시한을 겨우 몇 시간 앞두고, 러시아 주재 세르비아 공사에게서 다른 소식이 들어온다. 바로 러시아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을 지지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시간을 끄는 걸 보고 러시아 제국 관료들이 내린 오판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국 내의 온건파-강경파 대립 때문에 시간을 끌었던 건데,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독일 제국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일의 지원이 없으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러시아가 손봐주고 범슬라브주의를 실현하자는 의견이 지지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도와준다고 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최일선에서 맞서야할 세르비아 왕국이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관리의 자국 진입을 거부하는 대신, 다른 조항을 수용하기로 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이 제안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최후통첩을 세르비아 왕국이 거절했다며 격분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간의 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한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게 선전포고한다.



2. 연쇄 선전포고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선전포고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건 세계 대전으로 이어질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노는 정당했으니까. 당장 대영제국과 프랑스 공화국도 세르비아 왕국에 최후통첩을 수용하라고 압력을 넣지 않았던가?


▲ 러시아 제국 국기. 국장이 들어간 깃발은 황제 개인용 깃발로, 1차 대전 발발 이후 만들어졌다.


여기서 러시아 제국이 첫 삽을 뜨기 시작했다.

당초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부분 동원령을 발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군부는 러시아 제국이 부분 동원령을 내리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총동원령을 내릴 텐데, 그러면 병력 동원 속도에서 열세에 놓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사실을 들은 니콜라이 2세는 참모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1914년 7월 31일에 총동원령을 내린다.


하지만 독일 제국과의 전쟁은 러시아 제국에게도 너무 큰 부담이었다.

마찬가지로 독일 제국도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니콜라이 2세는 빌헬름 2세에게 전보를 보내 이번 군사 동원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독일 제국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설득하려고 했으며, 빌헬름 2세는 이에 대해 진정성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이에 7월 31일 오전, 니콜라이 2세는 총동원령을 취소한다.

총동원령이 취소되자마자 러시아 제국 군 수뇌부가 독일 제국이 기습적으로 러시아 제국을 공격할 가능성을 언급하며 취소 철회를 간절하게 요청했고, 애원, 애걸복걸, 심지어는 압박까지 동원된 몇 시간의 설득 끝에 러시아 제국은 다시 총동원령을 내리게 된다.



▲ 독일 제국의 국기


이번에는 독일 제국이 발칵 뒤집힐 차례였다.

러시아 제국의 총동원령으로 뱃놀이 나갔던 빌헬름 2세는 허겁지겁 베를린으로 복귀했고, 독일 제국 내각과 의회는 격론을 벌였다.

사실 독일 제국 의회는 반전 세력인 노동 계급 정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독일 보수파는 러시아 제국의 총동원령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뿐만 아니라 독일 제국도 위협한다는 사실을 설득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보수파가 반전 세력을 설득하는 것과는 별개로, 독일 제국이 강경하게 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러시아 제국이 러일전쟁에서 벌인 추태가 있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게도 온갖 추태를 보이며 패배한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 같은 강대국을 상대로 함부로 전쟁을 벌일 수도 없고, 만약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금방 혁명이 일어나서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점까지도 독일 제국은 양면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독일 제국은 대영제국과 접촉하여 대영제국이 프랑스 공화국의 중립을 보증하는 쪽을 선택하려고 했다. 하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해서 악감정을 품은 프랑스 공화국이 중립을 지킬 생각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독일 제국 내의 반대도 있어 결국 슐리펜 계획을 발동하기로 한다. 그렇게 8월 1일, 독일 제국이 총동원령을 내리며 두 번째 스위치가 눌리게 된다.

물론 이 시점까지도 독일 제국 외교부는 프랑스 공화국과 대영제국에 외교적 협상을 진행했다. 프랑스 공화국은 실제로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하기 전에 독일과의 국경에서 병력을 후방으로 철수시키며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고, 대영제국도 명분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명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전달하러 간 외교관도 선전포고문을 전달하기 전에 러시아 제국 외무장관에게 개인적 친분관계, 인연, 유대관계 등을 언급하며 총동원령만 취소해달라고 애걸복걸했을 정도다.


하지만 모든 외교적 노력은 허사였고, 독일 제국은 8월 1일에 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 8월 3일에는 프랑스 공화국에 선전포고하게 된다.


▲ 프랑스 공화국 국기


프랑스 공화국의 사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프랑스 공화국은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명분에 동의한 상태였고, 러시아 제국이 명분없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공화국 내 강경파들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원한을 설욕할 기회라고 보고 절대 독일 제국과 협상할 수 없다고 버텼고, 온건파들은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1892년부터 이어온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지키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간 비스마르크 시기의 외교적 고립을 다시 겪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독일 제국이 선전포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 공화국도 이에 맞서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 하며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 대영제국의 국기


세르비아 왕국 비밀 조직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를 쏴죽인 "사소한" 사건이 온 유럽을 불태우려고 하자 대영제국은 발을 빼고 싶었다. 1907년에 삼국협상을 맺긴 했지만, 이번 전쟁은 100% 세르비아 왕국과 러시아 제국이 잘못한 거긴 했으니까.


※ 이 새끼들 인성이 이런 건 원래 그런거다.


하지만 독일 제국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 왕국에 "프랑스를 침공할 길을 열어라"라고 요구했고, 벨기에 왕국이 중립국에게 뭔 개소리냐고 거부해버리자 8월 4일에 벨기에 왕국에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대영제국도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 벨기에 왕국 국기


사실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벨기에 왕국 침공을 막고 싶어했다.

벨기에 왕국을 침공하면 벨기에 왕국의 중립을 명시적으로 보장한 대영제국이 참전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모총장이었던 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통칭 小몰트케)에게 벨기에 왕국을 침공하지 말라고 요구하지만, 슐리펜 계획에 따라 모든 동원 체계를 준비한 독일 제국군이 슐리펜 계획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 슐리펜 계획 지도.


이 계획에 따르면 독일제국군은 프랑스 주력군이 방어하는 프랑스-독일 국경 지대 대신 약한 벨기에 왕국을 짓밟고 크게 우회해서 프랑스 공화국군을 포위섬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에 따라 독일제국군은 중립국을 자처하던 벨기에 왕국을 침공한 것.

하지만 이미 언급했다시피 벨기에 왕국의 중립을 보장하는 것은 대영제국이었고, 벨기에 왕국에 선전포고하고 침공을 시작한 순간, 대영제국의 참전도 확실시되었다.


물론 대영제국은 원조 혐성국답게 바로 참전한 건 아니고, 벨기에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최후 통첩 시간을 독일 표준시로 해놓고도 런던 표준시까지 더 기다리는가 하면, 독일 제국이 대영제국에 선전포고 했다는 오보에 선전포고문을 발송했다가 오보임이 밝혀지자 회수하는 추태를 보이면서까지 전쟁을 회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독일 제국은 대영제국의 노력을 무시하고 벨기에를 짓밟았고, 대영제국은 결국 8월 5일 0시를 기점으로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한다. 이것으로 마지막 연쇄 스위치가 눌리면서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소소하게 일본 제국이 영일동맹에 따라 8월 28일에 참전하기도 하는데, 이건 뭐... 



3. 프랑스의 제17계획과 독일의 슐리펜 계획의 실패


이때 프랑스 공화국의 전쟁 계획은 제17계획(Plan XVII)이었다.

독일 제국과의 전쟁이 터지면 알자스-로렌 지방으로 공세를 펼쳐 알자스-로렌 지방을 탈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화국은 계획대로 군을 동원해 알자스-로렌으로 진격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제17계획은 Grenzschlachten(국경 전투)라고 하는 전투에서 독일제국군의 우주방어에 가로막혀 박살나고 만다.


독일 제국의 슐리펜 계획은 사정이 좀 나았다.

계획대로 벨기에 왕국을 순식간에 짓밟은 독일 제국군은 강력한 공세를 통해 프랑스 공화국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하지만 몰트케 참모총장은 Alfred Graf von Schlieffen(슐리펜 백작, 알프레드)가 세운 원칙인 "우익 강화"를 어겼고, 독일 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수송수단이 부족하다는 본질적인 한계도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동프로이센 지방에 도달하면서 예비대를 돌리기까지 했다.


웃기는 것은 이 예비대가 동프로이센에 증원되기 이전에 타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annenberg)에서 독일 제국군이 대승을 거뒀다는 것이다. 여기서 러시아 제국군이 박살나면서 동프로이센으로 향하던 예비대는 부랴부랴 다시 서부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물론 국경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프랑스 공화국과 대영제국군은 파리에서 50km 떨어진 지역까지 물러난 상황이라 독일 제국에게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예비대가 서부전선에 지원되기 전, 1914년 9월 벌어진 La première bataille de la Marne(제1차 마른 강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은 패배했고, 진격할 여력을 상실한 독일 제국군은 그대로 주저앉고 만다. 그리고 1914년 10월부터 11월까지 벌어진 Première Bataille des Flandres(영어로는 First Battle of Ypres. 제1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또 패배하면서 슐리펜 계획도 완전히 쓰레기통에 들어가게 된다.



4. 참호전의 시작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의 사진


독일 제국군이 주저앉으면서 대영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이 반격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독일 제국군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점령지 유지와 반격 방어를 위해 독일 제국군은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대영제국군과 프랑스 공화국군도 독일 제국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참호를 팠다.


이때부터 양측은 참호를 우회하려 시도하고, 그 시도가 돈좌되면 그 자리에서 참호를 파고, 판 참호를 원래 참호와 잇는 걸 반복하는 뻘짓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초기에 타개할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독일 제국이 1914년 11월, 제1차 이프르 전투가 끝나자 동부 전선에서의 우위라도 확보하기 위해 서부 전선의 병력을 차출해갔는데, 이 기회를 노린 프랑스 공화국군과 대영제국이 1914년 12월, 동계공세를 개시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공화국군은 예비 병력 투입 타이밍이 늦어 일선 병력이 괴멸된 뒤에야 지원병력이 도착하는 문제가 있어 실패했고, 대영제국군은 포탄 부족 때문에 기껏 뺏은 거점을 독일제국군의 반격에 다시 토해내는 뻘짓을 반복했다.


그리고 참호가 점점 늘어나면서, 우회기동을 통해 참호를 돌파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이제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