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 갈등에 묻히곤 하지만 사실 크림반도에서 가장 큰 피해자들은 이들이다.

튀르크계 유목민들의 후손으로, 한때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평원을 휩쓸며 수백만명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댔으나 현재는 일개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민족 말살을 목전에 둔 '피해자가 된 가해자' 들이라 할 수 있다.


중세시대부터 크림반도에 들어와 키예프 공국과 대립하던 타타르인들은 크림 칸국을 세워 동유럽을 휩쓸고 슬라브 노예들을 종주국 오스만과 이탈리아의 부유 도시들에 팔아치우며 번영했다.

3세기동안 이들이 팔아치운 규모만 수백만. 모스크바는 한번 털렸다가 무려 10만명이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음.

그리고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포리자 공동체가 뭉쳤는데 현재 우크라이나 민족은 이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렇게 잘나가던 크림 칸국은 종주국 오스만이 몰락하고 러시아 제국이 급성장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이와중에 러시아의 진출만은 막고 싶던 자포리자 코자키랑 연합도 했다.

하지만 결국 러시아는 18세기 크림을 병합하고 크림 타타르인들은 강제이주 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돈이 있던 타타르인들은 오스만으로 이주했고 크림 칸국에 살던 다른 민족들은 새로 온 러시아인들에게 동화되었다.


다만 아직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 비율은 98%에서 30%까지만 내려가있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지자 자기들만의 크림 공화국을 세우기도 했다.

이를 두고볼 수 없던 볼셰비키는 2개월만에 해군을 앞세워 독립운동을 진압하고 대통령을 갑판에서 총살했다.



(1930년의 타타르인 비율 지도)

소련은 러시아 제국보다 결코 더 좋지 않았다.

적백내전으로 인한 전시경제체제와 거지같은 농업 집산화 뻘짓들로 인해 최소 15만 명 이상의 타타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이 있다며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으나 원래도 이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스탈린은 나치와의 협력을 명분으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를 명령한다.


20만명의 타타르인들이 화물칸에 수용되는 데에는 정확히 3일이 걸렸고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하는 과정에서 8천명은 살아남지 못했다.

대다수는 크림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1989년이 되어서야 15만명의 타타르인들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돌아왔을때 이미 남은 자리는 없었다.

'낯선 이웃들'은 그들이 얻은 터전을 나눠주고 싶어하지 않았고 오히려 타타르인들이 외래인으로 배척받았다.

결국 평야가 많고 물을 구하기 쉬운 남부를 포기한 타타르인들은 척박한 북부와 동부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 2년 뒤 소련이 해체된다.


러시아는 크림 귀속을 희망했으나 이미 박해의 경험이 깊은 타타르인들은 이를 결사반대했고 우크라이나라는 낯선 나라도 자신들을 박해할까 권리 주장 시위를 벌이다 진압당하기도 했다.

다행히 우크라이나에겐 크림의 러시아인들이 문제였지 듣보잡 튀르크계 민족은 알빠노였다.

타타르인들도 굳이 어그로 끌 생각도 없고 그럴 숫자도 안 되니 우크라이나 치하에서 이들은 오랜만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역사가들은 이들의 노예 사냥 역사를 여전히 비난했고 지역 마피아의 분풀이 단골 대상 역시 이들이었다.


하지만 2014년 정체불명의 친러 시위대가 크림 의회를 장악하고 분리독립을 선언한다.


(2014년 3월 러시아의 점령에 항의하는 타타르인들의 시위.)


타타르인들은 당연히 저항했고


(마찬가지로 2014년 3월 가족들에게 잠깐 나갔다 온다는 말을 끝으로 의회 앞에서 묵언 1인 시위를 하던 중 크림 내무군에게 승합차에 납치당한 레샤트 아메토프(Решат Аметов). 2주 후 목 없는 시신으로 발견.)


러시아는 이를 탄압했다.



타타르인들의 시위는 명백한 러시아를 향한 저항운동이었고 러시아는 타타르인들을 손봐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먼저 종교 지도자들과 민족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던 지식인들이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20년형을 선고받았고, 그 후엔 아무 남자들이나 붙잡아 무차별적인 고문과 처형이 반복됐다.

또한 그나마 살고 있던 해안 토지를 '사회적 목적'을 위해 양도해야했으며  그저 길을 가다가 자경단원들에게 처형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403231215488216)

(토지의 법적 소유권 문제는 소련 해체 때의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된 행정절차를 거치지 못한 탓이 크다.)


도망칠 수 있던 운좋은 몇몇은 우크라이나로 도망갔으나 그러지 못한 경우엔 그저 기도만 해야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끌려간 타타르인 중 상당수가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했다.

도망간 타타르인들도 환영을 받은 건 아니었다.

혼란했던 상황인만큼 헤르손 주민들은 타타르인들이 러시아가 보낸 첩자들이 아닐까 의심해야 했다.

병합 당시 하필 외부 일정을 위해 출국해있던 민족 정치인들은 귀국 금지를 통보받고 망명객 신세가 되었다.


(5월 16일 남아있는 타타르 공동체 대표들과 만나 보호 결정을 대가로 협력과 러시아의 지배 수용을 협의한 푸틴.)


역사적 문제로 크림 타타르인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던 우크라이나인들은 이후 러시아의 크림 병합 명분에 대항하기 위해 타타르인 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친우크라이나 성향인 타타르인들이 크림의 정당한 토착민족임을 부각하며 크림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러시아의 불법 병합을 규탄하려는 속셈.

이때문에 크림 위기 이후로 타타르인들과 우크라이나인의 사이는 빠르게 발전했다.


크림 타타르인 강제이주를 기리는 기념일이 제정됐고, 민족 고유 문화와 언어를 가르치는 자체적인 교육기관 설립이 보장됐고, 민족 고유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아조프 연대의 위생병으로 복무하다 마리우폴에서 생포된 뒤 227일간 포로로 억류됐던 무슬림 타타르인 하산.)


(제2의 고향 헤르손을 수복했을 당시의 크림 타타르 연대.)


지금도 수많은 타타르인들이 군대에 입대하여 '불법 체류자'들에게서 고향을 되찾을 것이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모두가 지켜보는 것처럼 크림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