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가례엔 그런 거 없다



“정초, 동지, 초하루, 보름에는 하루 전에 청소와 재계를 한다. 이튿날 날이 새면 사당 문을 열고 신주를 모셔둔 감실의 발을 걷어 올린다. 신주마다 햇과일이 담긴 쟁반을 탁자 위에 차려둔다. 그리고 찻잔과 받침, 술잔과 받침을 둔다.”

애초에 차례(茶禮)니까 제사상이랑 엄밀히 다른 건데 현대와서 지랄염병하는 거임




그리고 제삿상 차리는 법도 따로 떼서 보자면


한자로 과 써놓은 거 보면 알겠지만 무슨과일을 써라 이런 것도 없음 당연히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지랄하는 것도 다 창작

간장 종지까지 포함해도 딱 19개 밖에 안되고

조선 후기 이병상(李秉常, 1698∼1761)은 제상에 올리는 떡으로 가래떡 (權枚)을 쓰기도 했을 정도로 기준이 무척 유연했음

원래 사대부 집안의 제사에서는 고명을 얹은 시루떡을 쓰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주위 사람이 궁금하여 묻자, 집에 있고 없는 것에 맞추어 상을 차렸을 뿐이라고 대답했음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 민족 문화사 연구소 한문학 분과 옮김, 『18세기 조선 인물지』, 창작과 비평사, 1997, 59∼60쪽)


그리고 제삿상의 규범을 제시한 문헌들에서도 세부적인 내용이 다 달라서 <제의초>, <격몽요결>, <가례집람>, <사례편람>같은 서적부터 지방마다, 가문마다, 지위고하와 재산상 여건까지 고려하면 획일화된 예시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구조임

그러니 양반은 10%도 안됐던 나라에서 지랄염병하지 말고 그냥 지갑사정 맞춰서 간단하게 해먹고 치우는 게 정답